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제2차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었던

 

이오지마 전투에 대해 알아볼게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라는 영화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섬쟁탈전입니다.

 

이오지마(유황도)는 서울 여의도면적의 2배가

 

조금 넘는 유황으로 뒤덮인 정말 작은 화산섬입니다.

 

화산섬이다보니 물도 거의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였습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작은섬을 차지하려는 미국과

 

결사방어하려는 일본은 어떤 전략적 중요성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볼게요

 

▲이오지마의 위치

 

이 섬의 위치는 동경에서 정남향으로 1080km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 섬에서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비행장이 있었고

 

80대의 공격기가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일본 본토공략을 위해 중국의 내륙지역에서

 

 띄우는 폭격기로 본토공습을 하다가

 

1944년 마리아나제도를 탈환한 후는

 

 거리상으로 가까운 이곳에서 폭격기를


출격시켜 동경 등 일본본토 주요도시를

 

 폭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초기지격인 이오지마에서

 

 미군기의 이동을 사전에 본토로 연락하여

 

 방공포대와 요격전투기가 미리 준비하고

 

 있도록 해주는 조기경보를 보내

 

 미공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고, 폭격의 주요목표도

 

 사전에 폭격을 대비하는 준비를 하는 등


미군의 원했던 폭격의 결과를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

또 폭격기의 이동거리가 워낙 장거리다보니

 

 항속거리가 짧은 호위전투기가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군 요격기에 의해

 

 격추당하는 일이 많아, 중간기착지가

 

 절실히 필요했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큰 희생을 치루고라도

 

 이오지마를 점령해야하는 이유였습니다.


 

일본의 방어 계획

 

▲일본 수비군 사령관 쿠리바야시 육군중장

 

쿠리바야시 중장, 1944년 5월에

 

제109사단 사단장이 되어 오가사와라지구

 

 집단군사령관으로 치치지마에 부임합니.

 

 당초 요새가 있는 치치지마에 사령부를

 

두게 되어 있었지만, 정세를 조사한

 

 쿠리바야시 중장과 대본영은 미군이 이오지마를

 

공략할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무방비상태인 이오지마에 즉시 사령부를

 

 옮기고 진지의 구축에 착수합니다.

 

계획에 의하면 갱도는 지하에서 섬 전체를

 

연결하게 되어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습도와

 

 고온의 지열 등으로 작업시간은 짧을 수 밖에 없었고

 

 또 미군의잠수함에 의한 방해로 물자가 생각대로

 

 공급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계획은 늦어져서

 

결국 전체 길이28 km의 계획중 18km 정도 밖에

 

 완성하지 않고,미군을 맞이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실제전투시 지하 갱도는 맡은바 역할을

 

 충분히 완수하게 됩니다.


섬 방어를 위한 첫 조치로서 전민간인의 섬 외

 

 퇴거가 시작되어 7월 후반까지 완료하고

 

증원군도 서서히 섬에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약 5,000명의 제2 독립 혼성여단을

 

다른 섬에서 이오지마로 이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항공대 및 지상 정비원을 포함한 2,300명의 해군

 

 포병대 및 5개의 대전차대대와, 만주에서도


제 26 전차부대도 차출하여 배치가 됩니다.


최종적으로, 쿠리바야시중장은 육군과 해군을

 

합해 23,000명의 병력을 지휘하에 두게 됩니다.

 

이오지마 수비대장 쿠리바야시중장의

 

초기방어전략을 살펴보면

 


1. 포대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적의 상륙 준비포격시는 대응하지 않는다.
   (미국의 군함에 대한 포격은 실시하지 않는다) 


2. 상륙이 시작되면, 상륙하는 미군을

 공격하지 않는다. 

 
3. 상륙한 미군주력이 500m이상 해안

을 벗어나는 시점에집중포화를 가한다. 


4. 상륙 부대에 최대한의 손해를 입힌 후,

 포대는 즉시 북쪽으로 이동후 지하갱도에서

 

 전투준비를 한다

 

 

 

 

미군의 상륙

 

 

1945년2월19일,오전6시40분 이오지마앞바다를

 

 가득 메운 구축함과 순양함을 중심으로

 

 함포사격이 시작되고

 

 8시부터는 120대의 B-29를 주축으로

 

집중폭격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위에 설명한 일본군의 강력한 지하요새에

 

 병력과장비가 숨겨져 있어서 그 효과는

 

 거의 없었지만 미군측은 충분히 피해를

 

입혔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2월19일 오전 9시, 미해병 3,4,5사단의

 

 본격적으로 상륙을 개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위의 쿠리바야시중장의 전략대로


미해병대의 상륙시에 포격 및 중/소화기사격은

 

 실시하지 않아서, 제1파로 30,000명의

 

 병력이 무사히 해안에 안착을 하게됩니다..

 

 


일본군의 아무런 저항이 없음에 미군은

 

 함포 및 공중폭격으로 이미 일본군은

 

 궤멸되었다고 생각하게되버립니다.

 

하지만 오전11시, 방심상태의 미해병대가

 

 해안을 벗어나려는 순간

 

 섬 내륙쪽과 스리바치산의 동굴포대가

 

일시에 집중포격을 개시하고

 

 미해병대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상륙 제1파로 해안에 도착한 M4 셔먼전차

 

 56대 중 28대가 그 자리에서 완파.

 

또, 해병 24, 25연대병력의 25%이상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게되는 큰 피해를 받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일시의 집중공격은

 

 태평양전쟁사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추가로 4만명의 미해병대가 상륙하여

 

 미군은 코딱지 같이 작은 섬에 11만명의

 

 대군을 투입하게 됩니다.


 

위에 사진에 나오는 산이 스리바치산인데

 

이 산이 작은 섬의 유일한 고지대였습니다.

 

높이는 169m이였습니다 이 섬은 개미굴처럼

 

지하갱도로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 배치된

 

 일본군의 중화기 및 포대를 파괴하는 것은

 

 제공 제해권을 쥔 미국으로서는 공중폭격과

 

 바닷가의 함포에 의지해야 했지만, 

 

일본군의 철저한 준비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토치카와 지하갱도 탓에, 공중과 해상의 맹폭은

 

 어떠한 효과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해병대원 스스로 산을 기어 올라가며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제압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준비된 일본군의 저항에 1m를

 

전진하는 데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병력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해병대의 팔각모는 이오지마전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7번의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고 8번째에

 

 성공했다는 이오지마 승리의 교훈을 잊지

 

않는다는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엄청난 희생을 내고 점령한

 

스리바치산에서 찍은 이사진은 

 

퓰리처 상을 받은 사진으로 

 

너무나 유명합니다.


숨겨진이야기를 소개한다면

 

 이 유명한 사진이 촬영된 다음날 아침

 

 다시 일장기가 펄럭였습니다.


거미줄같이 얽힌 일본군의 지하갱도를

 

완전히 제압하고 고지를 점령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아니었던 것이였죠

 

하지만 이 한장의 사진이 미국정부와 국민에게

 

 너무나도 큰 용기와 감동을 주었기에

 

 다음날 성조기가 일장기로 바뀌어 게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되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박물관에 보관된 성조기는

 

사실 두번째로 게양된 성조기입니다.

 

 

 

 

결 과

 

이 작은섬에서 2만3000명의 일본군과

 

11만의 미군이 한달하고도 1주일간

 

정말이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전투는


이미 제공제해권이 없고 수백척의 미군의

 

 작전함정으로 포위된 고립된 일본군은

 

 어떠한 지원과 증원없이 끝까지 미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저항을 하게됩니다.

 

남태평양의 작은섬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또 동남아 밀림에서 일본군이 최후에 쓰는

 

 전략은 반자이를 외치며 적진으로 달려들어

 

기관총 밥이 되는

 

"반자이토츠게키"(만세돌격)이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은 최후의 순간에도

 

반자이 돌격명령은 내리지 말 것을

 

각 부대의 소대장에 지시합니다.

 

 

3월17일 아침, 대본영에서는 쿠리바야시 중장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고 대장으로 승진시킨다는

 

 전보를 보냅니다.


일본군 역사에 최연소 육군대장이

 

 탄생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날 오후, 쿠리바야시중장 아니 대장은

 

 이오지마 수비대는 마지막 작전을 감행한다고

 

 본국의 대본영에 타전합니다.

 

그리고 3월25일 산개된 각 예하 부대에

 

 이하의 명령을 내립니다.
(예하부대라고 적었지만 총병력은 400명)

 

전세는 최후의 순간에 직면하였다.


전병력은 오늘 밤,

 

총공격을 결행하여 적을 격멸한다.


각 부대는 금일 자정 각 방면의 적을 공격하며

 

 최후의 1명까지 결사감투함을 승인한다.


나는 항상 제군들의 선두에 선다.

 

 

이 마지막공격은 무의미하게 총검을 들고

 

 기관총 앞에 뛰어드는 반자이돌격이 아닌

 

 필사의 각오로 임하는 조직적인

 

야간기습이었습니다.

 

 

물론 전멸이라는 결과는 뻔했지만

 

 그날 밤의 야습으로 미군 53명이 전사하고

 

 119명 중상이라는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1945년 3월26일


일본군의 조직적 전투행위는 종료되고

 

 미국은 섬의 점령을 공식 발표됩니다.

 

일본군의 토치카를 파괴시키고 일장기를

 노획한 미 해병대원들

 

  일본군 전사 및 실종 약22,000명, 포로 약1,000명


  미군 전사 6,800명, 전상자 21,800명 

 

의무대 지원을 못받는 일본군의 상황에서

 

 전체전상자를 비교하면 미국은

 

일본의 22,000명보다 많은 28,000명의

 

 인명손실을 입는데 이 또한

 

 태평양전쟁사에서는 유래가 없는

 

전투결과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쿠리바야시중장의 전략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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