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유황도)전투의 잘알려지지않은 비화들
안녕하세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지옥도가 펼쳐진 이오지마전투의
잘알려지지않은 비화들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1. 도널드 럴 일병
스리바치 산의 일본군들과 교전하던 도중
소대 한가운데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이 떨어지게 됩니다.
도널드 럴 일병이 수류탄이 떨어졌다며
주변의 소대원에게 소리지르고,
곧바로 수류탄에 몸을 날려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소대원들의 생명을 구했다고합니다.
이후 럴 일병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미군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해상에서 실종된
조종사들을 찾으려고 함재기 8대를 날렸는데
2대가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격추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격추된 조종사중 1명인
헨리 힌리치 소위는 다행히 미군 초계정에
발견되긴 했는데, 수병들이 일본군 조종사인줄
착각을하고맙니다.
그래서 그 "일본군 조종사"가 구조해달라고
해놓고 수류탄을 던질까봐 소총을 겨냥하고
큰 소리로 욕을해서 기를 죽이려고 했는데
구조해달랬더니 총을 조준하는 모습을 보고
힌리치 소위가 영어로 더 큰 소리로
별 오만가지 듣도보도못한 욕
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수병들은 미군 파일럿이라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그후 구조작업을 시작하고나서도
힌리치 소위가 수병들에게 밑도끝도없이
평생동안 듣기도 힘들 오만가지
욕을 했다고 합니다.
3. 지뢰
지뢰 제거를 위해 지뢰제거전차를 사용했는데
일본군은 예상을 하고 지뢰에 어뢰탄두와
폭뢰.기뢰등으로 개조하여
전차가 파괴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오지마 모래엔 철 성분이 많아 지뢰탐지기가
제역활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병들이 일일이 하나하나 나무막대기나
칼로 모래속에 꽂아가면서 지뢰를
제거해야 했다고 합니다
4. 월시 중사
이분도 위에 소개했던 럴 일병이랑
비슷합니다.
이오지마 북부 일본군 소탕작전 중
막 장악한 고지 정상에 방어선을 편성하는 도중
일본군 수류탄이 또 소대원 한가운데 떨어집니다.
월시 중사가 그대로 수류탄을 덮쳐
소대원들을 구하였습니다.
5. 잭 러머스 중위
베일리 대학의 미식축구 선수로
베일리 대학이 미식축구에서
우승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장래의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러머스 중위는 입대하기 전부터 유명인이었습니다.
이오지마 북부 일본군 격퇴중에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바위와 골짜기 틈에서 일본군은
해병대의 진격을 악착같이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교착 상태에서 러머스 중위는
일본군의 방어선을 앞장서 꺠트리기로 결심하고
가까이 보이는 일본군 엄폐호로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신으로 달려드는 러머스 중위에게
일본군의 수류탄이 날라와
그 충격으로 러머스 중위는 넘어졌으나
벌떡 일어나 엄폐호에 뛰어들어
일본군을 소탕하였습니다.
엄폐호를 나서는 순간 또다시 수류탄이 날아와
어깨에 부상을 입었으나, 러머스 중위는 두번째
엄폐호에 뛰어들어 내부의 일본군을
또 몰살시키게 됩니다.
이어서 3번째 엄폐호까지 소탕하고 나온
러머스 중위는 놀라서 지켜보던 부하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명령에 그의 소대가 돌진을 시작
또한 E 중대 전체가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중대의 선두에서 돌격하던 러머스 중위는
지뢰를 밟고 말았고,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자
러머스 중위는 피투성이의 웅덩이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였다고 합니다.
러머스 중위는 지뢰의 폭발로 두 다리가
날아가 버렸고 이로 인해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로
보장되던 그의 화려한 미래도 동시에
날아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러머스 중위의 모습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으나, 그 상황에서도
러머스 중위는 계속 북쪽을 가리키며
돌격하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병사들의 마음속에 소대장에 대한
존경과 연민,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휘몰아쳤고, 미국판 반자이 돌격이라 할만큼
엄청난 함성을 지르며 무서운 기세로 내달렸습니다.
결국 냉정하고 침착하게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군들도 괴성을 지르면서 돌격해오는
E 중대의 기세에 눌려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야했습니다.
그날 E 중대는 저녁때까지 작전구역 내의
일본군을 모조리 사살하고 북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게됩니다..
후송된 러머스 중위는 그날 저녁에 사망하였고
후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6. 이노우에 대좌
사무라이의 후손으로 검술의 고수인
이노우에 대좌는 떠들썩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자주 부하들과 어울려 말술을 마시며
자신의 무용담이나 여자 이야기등을
떠들어 대곤 했고, 많은 부하들이 남자다운
그의 모습을 좋아하고 존경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는 방공호에 앉아 부하들이
포위되고 전멸당할 때까지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는데다,
거기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 이후
매달 8일은 일본인들에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날이 되어 있었는데,
이노우에 대좌는 3월 8일을 자신의 제삿날로
정하고 모두가 기억할만한 화려한 방식으로
최후를 장식하고자 마음을 먹습니다.
3월 8일 밤 10시 대좌는 약 1,000명 정도
되는 자신의 부하들을 모두 이끌고
전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무장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고 몇몇은
죽창을 들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소총,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
몇몇 병사들은 자폭할 마음을 품고
가슴에 지뢰를 묶기도 하고, 의무병으로 위장해
해병대원에게 접급하기 위해 들것을
가지고 온 병사도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대좌는 수리바치 산 탈환을
최종 목표로 잡고, 도중에 비행장에 침입하여
최대한 많은 항공기를 파괴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3월 8일 오후 11시에는 제2/23 대대와
제3/24 대대의 방어선에 전례가 없는
엄청난 일본군이 방어선을 침투하려고 시도합니다.
곳곳에서 수류탄을 주고받고 정신이 없던 도중
오후 11시 30분에 이노우에 대좌가 전형의
선두에서 군도(군인용 칼, 일본도)를 뽑아 높이
치켜들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최전방에서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였고
부하들 또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일본군이 미군의 방어선에 접근하자
조명탄이 터지며 일본군의 모습을 환하게 비췄고
이어서 미군의 기관총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이노우에 대좌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뛰어난 검술을 미군에게 보여주겠노라고
장담했지만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이누우에 대좌는 벌집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일본군은 계속 돌격해
방어선에 도달한 후 일본군은 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은 어두운 밤중에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소총과 총검, 개머리판 등 온갖 무기로
백병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들것을 가져온 일본군들은 들것병으로 위장해
부상한 미군이 의무병을 부르면 달려가서
부상병과 뒤늦게 달려온 의무병을 사살하였습니다
이날의 전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서
다음날 해가 뜬 이후에도 소탕전이
계속되어 정오가 되어서야 끝났다고합니다.
▲이오지마의 포탄 구덩이에서 죽어 가는
일본군 병사의 입에 손으로 담배를
물려주는 미 해병 대원
이떄의 반자이 돌격은 평소의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학살당한 전과는 다르게
일부 병력이 소란을 피우기는 했어도
해병대의 방어선에 접근할 떄까지
최대한 조용히 지형지물에 엄폐를 하면서 이동했고
공격에 참가한 병사들도 잘 무장되어 있었고
사전 정찰에 화력 지원도 충실했었다고합니다.
7. 니시 대좌
▲ 니시 다케이치
이오지마 전투의 막바지 무렵
니시 다케이치 대좌는 450여명의 부하들과
커쉬맨 고립지대의 한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중 300명은 누워서 꼼짝도 못할 중상자들이었고
나머지 150명중 90명 정도는 겨우 기어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니시 대좌가 이 고립지대 내부에 있다는걸 안
해병대의 고위 지휘관들은 일본인
최초의 올림픽 승마부문 금메달리스트인
그를 구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합니다.
항복 권유 방송에서 남작인 니시 대좌에게
깍듯이 작위를 붙여 불렀으며
전쟁 이전 그와 친했던 육군의 버틀렛 대령을
괌에서 항공편으로 급히 데려와
항복권유 방송에 투입하는 성의를 보였으나
니시 대좌는 이런 항복 권유를 무시했습니다.
그가 어디서,언제 죽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결국 그가 어디서 최후를
맞았는지는 아무도 모른 채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8. 쿠리바야시 장군의 최후
쿠리바야시 장군이 마지막으로 방어하던
지역만을 남긴 채 이오지마 전역이
미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어스킨 소장은 일본군 고위지휘관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로 하고. 자원한 일본군
포로 2명에게 어스킨 소장의 친서를
이케다 대좌에게 전달해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 일본군 전령들은 해병대 구역을 떠나
일본군 전선으로 들어가 이케다 대좌에게
어스킨 소장의 친서를 무사히 건넸으나
마침 회의 중이던 쿠리바야시 장군 또한
같이 친서를 읽었고, 쿠리바야시 장군은
항복하지 않기로 한 듯 하였습니다.
18일 저녁, 쿠리바야시 장군은 도쿄에
"일곱번 다시 태어나도 무기를
잡고 적과 싸우겠다"는
자신의 절명시를 타전하고,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최후는 자결했다던지,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했다던지 여러가지 말이 많으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이사람 또한
니시 대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른다고합니다.
3월 25일 일본군의 마지막 계곡지역을
장악한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가 끝났다고 믿었으나
300여명의 다수가 장교로 이루어진 일본군이
25일 밤에 지하통로를 통해 은밀히 해병대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다음날 새벽에 북부 비행장과
미군 야영지를 기습하였습니다.
이 공격은 반자이 돌격과는 완전히 다른
일본군 능력의 한도 내에서 제일 가치있는
목표인 제7전투기사령부의 조종사들을
제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3개의 부대로 나뉘어 2개의 미끼부대가
미군의 주의를 돌리며 증원을 방해하는 동안
주력이 조종사들이 사용하는
천막들을 기습하였습니다.
공격에 참가한 일본군들은 이례적으로
미군의 콜트 45구경 권총, M1 개런드, BAR 등의
미제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심지어
바주카포 1문까지 있었습니다.
이 기습에서 일본군은 262구의 시체를 남겼고
18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들 특공대는 미군 53명을 사살하고
119명에게 부상을 입혔는데
사상자들은 대부분 조종사들이었습니다.
10. 항복? 자살?
이오지마 전투가 거진 끝난 줄 알았던
4월 16일 제147연대의 병사가 지하 30m의
동굴속에 있던 일본군의 야전병원을 발견합니다.
이곳에서는 3명의 군의관이
약 70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었는데
항복권유방송을 하자 군의관
이노아카 마사루 소좌는 동굴 내의 생존자들과
함께 항복여부에 대해 토론을 가지고
투표를 실시하게 됩니다.
결과는 항복에 찬성69명, 반대 3명이었다고합니다.
반대자 3명중 고지마 규타로 상등병은
투표 결과가 항복으로 결론이 나자
그자리에서 자살해 버렸습니다.
전후 일본에 돌아간 군의관들 중
노구치 대위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곳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스스로의 회환과 주위의
싸늘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을 떠나
브라질로 이민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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