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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베게너. 그는 최초로 모든 대륙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고, 그의 이론은 현재 지질학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베게너는 현재 가장 무더운 사막이 


 

 

한때는 극지방의 빙관(산 정상이나 고원을 덮은 얼음 덩어리)아래에 있었으며 모든 나라(대륙)들이 지금과는 다르게 분포되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베게너는 움직이는 대륙이 화산, 지진, 산의 형성, 자성을 띠는 극의 움직임 등을 포함해 지구의 모든 대규모 활동을 설명해 주는 원리의 일부분이라 확신했다.


 

알프레드 베게너는 1880년 11월 1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게너는 어린 시절부터 그린란드를 동경했고, 때문에 그는 언젠가 극지방 탐험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스키와 스케이트를 열심히 배웠다.



 

1904년 배를린 대학에 진학,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곧 기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게너는 열기구를 타고 55시간 이상 공중에 머무르며 상층 대기를 연구했는데 이것은 세계 신기록이 되었다.


 

1906년 극지방의 공기 흐름을 연구하기 위해 그린란드 동해안을 탐사, 극지방의 불모지를 연구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어려운 주제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여 학생들의 신망을 받았다.



 

베게너는 일찍이 대륙의 형태에 대해 생각했다. 베개너는 1910년 12월, 약혼녀에게 이렇게 전했다.


 

"마치 한때 서로 붙어 있던 것처럼 남아메리카의 동해안이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지 않아? 앞으로 내가 연구할 게 바로 이거야"


 

1911년 베게너는 대서양 양 끝에서 발견된 동식물 화석을 나열한 논문을 통해 당시 과학자들의 「바다가 한때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구가 냉각하고 수축하면서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는 설을 개소리로 생각하며 수긍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때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 있었고, 그것이 분리되어 조각조각 흩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선사 대륙을 그리스어로 지구 전체라는 뜻으로 '판게아(pangaea)'라고 불렀다.


 

 

베게너는 1912년 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지질학 학회 모임에서 이를 발표했다.

같은 해 그는 대륙 이동에 관한 생각을 발표하고 그린란드로 떠난다


 

그들은 극지방의 빙관에서 겨울을 보낸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고 이듬해 봄(이지만 겨울과 다를바 없음...)에 약 1200km의 눈 벌판을 지나 높이 3천 m에 달하는 얼음 봉우리에 올라가 빙상 위에서 길고 힘든 여행을 했다.


 

 

이때 수집한 자료들을 독일로 가져와 베게너는 극지방 기상학과 빙상학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존경받게 된다.


 

 

베게너는 대륙의 땅덩어리가 지구 깊이 박혀 있지 않고 그 위를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2억 년 전에 분리되기 시작했고, 그 조각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움직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의 땅덩어리가 또 다른 땅덩어리와 충돌할 때 암석을 함께 밀어내 위로 접혀 올라가게 함으로써 산맥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대륙이 움직이는 이유, 현대의 판 구조론은 배게너가 주장한 땅덩어리의 움직임을 설명해 준다. 판은 마그마로 이루어진 맨틀의 상부를 떠다니며 지구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움직인다. 

 

지금도 대서양이 실제로 넓어지고 있으며 태평양은 좁아지고 있다. 

북아메리카는 1년에 2.5cm씩 유럽에서 멀어지는 중.


 

 

베개너는 자신의 이론이 널리 수용되려면 많은 이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수백만 년 전의 기후 유형을 잘 보여준 고기후학이었다. 베게너는 자신의 판게아 지도에서 고대 정글, 빙상, 사막을 찾아냈는데 모든 것이 다 들어맞았다.


 

 

2억 9천만년 전 페름-석탄기의 빙하기는 전 세계에 무작위적으로 흩어진 빙상을 보여 주는 듯했고, 그중 일부는 가장 더운 사막에 있었다.

베개너의 지도에서는 그것이 아프리카, 남극 대륙, 호주, 인도가 한때 만났던 남극 주변 한 곳에 몰려 있었다. 


 

 

베게너는 즉시 학회에 자신의 이론을 발표했고

이것이 바로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이다.


 

 

하지만 베게너의 이론을 둘러싼 갑론을박 때문에 그를 교수로 임명하려는 독일의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1924년 그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작은 그라츠 대학은 그를 받아 주었다.

 

그는 그라츠에서 극지방 기후에 대해 계속 연구를 했고, 1930년 다시 그린란드로 갔다.

 

하지만 이번 탐험은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탐사대의 일부가 해안에서 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탐사 대장으로서 베개너는 구조대를 보내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베개너의 구조대 대부분이 별다른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베개너와 동료가 캠프까지 도달하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으며, 온도는 영하 58도였다.

 

1930년 베개너의 50세 생일을 축하한 다음 날, 베개너와 그를 도와 준 그린란드인 빌룸센은 귀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봄 베개너의 시신이 침낭에 쌓인 채 발견되었고 이후 그의 시신은 눈과 얼음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이론은 시들어 갔다. 그러나 1950년 대 새로운 과학 기법이 등장하면서 지각 활동을 새로운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해양학과 지구의 극성이 수백만 년에 걸쳐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연구 덕분에 베개너의 대륙 이동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의 고리라고 들어 봤을꺼에요

 

 

10일 전부터 환태평양 주위서 4.0이상 지진이 몇 백번 일어나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지진대국에서는 조금 전에도 쿠마모토서 5.0넘는 지진이 일어났죠 


근데 지금 일어나는 지진이 심상치 않아요


이틀전에 뉴스보다가 찍은 사진인데 

진원이 쿠마모토서 점점 동북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거죠


 

 

 

 

14일부터 16일까지 계속 이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14일에 일어난 곳이랑 16일에 일어난 곳 사이에 있는 

아소산이 분화하기 시작했죠


근데 아소산은 작년부터 분화를 해서 일본애들이 크게 걱정은 안하는 거 같아요


지금 쿠마모토서 활성 단층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진 진원 깊이가 10km인데 

아소산 마그마는 20km 이하에 있어요

그래서  대규모 화산 폭발이 일어나려면

깊이 10km에서 7.0급이 10회 이상 일어나거나

깊이 20km에서 7.0급이 10회 이하로 일어나지 않는 이상

대규모 폭발은 없을거에요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라는거에요


 

 

 

 

쿠마모토서 일어난 지진의 원인이 되는 활성 단층이 일본 열도 절반 이상이 이어져 있어요


일본 애들은 저 빨간 네모 안에 쓰여진 중앙 구조선이라는 

활성 단층을 따라 오사카, 나고야를 거쳐

수도 도쿄로 진원이 이동해 오는걸 가장 두려워 하고 있어요


뉴스에 지진 해설을 하러 나온 도쿄대 명예교수도 몇 일만에 진원이 

이동하는건 자기도 첨 보는 거라서 설명이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설마 도쿄 쪽으로 올까 했는데


 

 

 

지진 얼마나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검색해봤더니


진원이 이동하고 있어요


지진 규모는 진도 3.1이고 지상엔 진도 1밖에 흔들리지 않았지만

중요한건 쿠마모토랑 같은 깊이인 10km에서 일어난 지진이에요

즉, 쿠마모토랑 같은 원인으로 일어난 지진이니 

진원이 중앙 구조선을 따라 동북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또 신경 쓰이는건 도쿄로 진원이 이동하는 중에

원자력 발전소 몇 개랑 후지산을 지나기 때문에

도쿄는 지진이 오기 전에 화산+방사능으로 위험할지도...


이번엔 311토호쿠지진이랑은 느낌이 달라요

뭔가 심상치 않은거같아요

조만간 불의 고리가 열도 전체를 흔들어 줄거 같아요


 


 


 

 

 

지난 2편에서 
2002년 오직 스승 조훈현만이 다다를 수 있었던
프로 통산 1000승과 타이틀 획득 100회라는
철의 금자탑을 세우며

조훈현 시대의 패막과 
이창호 시대의 개막을 알렸던 이창호였다

2편에 빠트린 내용이 있었는데 짚고 넘어가자면

 

2000년도
제 4회 응씨배에서 중국의 창하오를 3-1로 꺾고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게 돼
응씨배 우승은 세계 최강을 자처하는 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코스인데
한중일 국내 기전, 세계 기전을 통틀어 최대 규모의 상금으로 치뤄지는 대회이기도 하고
4년 마다 한 번 씩 열리기 때문에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리며
세계 바둑팬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대회야

여담으로 아쉽게도 이세돌은 아직 이 대회의 타이틀이 없어
다른 세계 대회는 모두 우승했는데 이 타이틀이 없어서
이세돌이 앞선 최강자들의 커리어를 넘어설 수 없게 만드는 
이세돌에게는 아킬레스 건이지

올해 2016년에 중국에서 제 8회 응씨배가 개최되는데
이세돌은 이 대회 우승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어
사실 4년 마다 개최되는 대회이기 때문에 이번에 우승하지 못하면
4년 후를 기약해야 하거든
이세돌이 이제 30대 후반 줄에 접어든 것을 감안하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마샤오춘 9단
이세돌의 어록 중에 '아 마효춘은 빼주세요'가 아주 유명해

 

 

 

창하오 9단
이창호 보다 한 살어린 중국의 프로기사로서
이창호와 동시대에 활약했고 이창호에 가려 빛을 못봤지만
이창호를 존경하고 예의가 아주 바른 건실한 친구야

 

 

 

2015년 한국에서 열렸던 한중 어린이 바둑대회
행사 차 방문했던 창하오가 뒷풀이 자리에서 이창호와 맥주를 마시는 모습
이창호 앞에서 양 손을 모아 공손히 마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뤄시허 9단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무렵 중국바둑계는
이 세 명의 피튀기는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고
(물론 세 명 다 세계 무대에서는 이무렵 이창호에게 상대도 안됐다)

참고로 제 1회 응씨배가 끝나고
조훈현의 결승전 상대였던 녜웨이핑은 '내게는 무서운 제자 둘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마샤오춘과 창하오였어


하지만 녜웨이핑은
조훈현에게 이창호라는 끝판대장이 있다는걸 모르고 있었지
 

 

 


 

응씨배 역대 우승자
 

삼성화재배 역대 우승자

위 두개의 대회는 대표적인 세계 대회라고 할 수 있는데
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오랫동안 세계 무대에서 최강으로 군림해오던
일본바둑계는 조훈현을 필두로 한국과 중국의 강호들에 밀려 
세계 무대에서 쇠락의 길을 걷더니
2000년대 부터는 세계 무대에서 종적을 감추고 만다

일본의 갑작스런 몰락의 이유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한국과 중국의 급성장 때문이기도 하고
두번째는 일본의 프로기사 제도 운영탓이야

왜냐하면 일본은 대회 일정상 세계 대회와 일본 국내기전의 일정이 겹칠 경우
반드시 일본 국내기전을 우선하여 참가한다는
규정이 있거든
그래서 일본 기사들은 좋든 싫든 
세계 대회보다는 국내 기전을 우선시 하고 있어
그도 그럴것이 세계 대회보다 일본 국내 기전이 상금 규모가 크거든

그렇기 때문에 세계 대회에 나설 기회가 적어진 
일본의 기사들은 세계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 밖에 없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은 한국처럼 
현재 국내 기전의 인기도 바닥을 치고 있어

그나마 이야마 유타 9단이 현재 일본 바둑계를 씹어먹고 있는데

 

이야마 유타 9단
현 일본 최강

현재 일본 내의 모든 기전을 독식하고 홀로 외로운 독주를 펼치고 있는 일본기사야
상대가 없어
아마 기력으로는 그나마 현재 세계 무대에서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일본 프로기사가 아닐까 싶어
얼마전 3월 초 끝난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에서
이세돌을 만나 패한 적이 있었지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은
한.중.일 대표 5명이 차례로 나와 벌이는 팀토너먼트 전 형식인데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던 게이들이라면
위너스리그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거야
팀 별로 한 명씩 나와서 승리한 기사는 계속해서
승부를 이어가고
진 팀에서는 다음 주자가 나와서 승부를 벌이는 형식이거든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는 이세돌에게는
'제 2의 상하이 대첩'이 될 수도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
종국에 한국에서는 이세돌 9단 한 명만이 살아 남았고

일본은 
무라카와 8단,이야마 유타9단
중국에는 
롄샤오 7단
커제 9단이 살아남아 있었거든

이세돌은 
이 대회를 한국의 우승으로 결정 짓기 위해선
네 명의 적을 연달아 꺾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어
그런데 앞선 여기서 세명을 모두 꺾고
정말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연출하는가 싶었지만
아쉽게 천적 커제에게 무릎을 꿇으며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지
작년 삼성화재배, 몽백합배의 커제와의 패배 이후 이 대회에서도
커제에 설욕을 실패하고 무릎 꿇으며
이세돌은 현재 커제만 만나면 맥을 못추고 있는 상태야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결승국

 

 

(좌) 구리 9단 (중) 커제 9단 (우) 롄샤오 7단

 


아마도
이 부분은 내가 이세돌 편을 쓰게 된다면 훨씬 자세히 다루게 될 수 있는 부분이야






여담이 길어졌는데 다시 본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리고 이창호는
2003년 
춘란배 와 도요타 덴소배(2009년 구리 9단의 우승을 끝으로 지금은 사라진 대회)의 우승으로

주요세계대회
-삼성화재배,후지쯔배,LG배,응씨배,춘란배,도요타덴소배-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아쉽게도 유창혁이 1년 먼저 세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해서 최초는 아니다)

이때 이창호는 한 해에 우승상금으로만 10억 이상을 벌어들이는 유일한 프로기사였다
광고수입, 프로리그 연봉, 대전료 등을 제외하고 순수 우승 상금만 10억이 넘었으니까
1년에 못해도 20억 정도는 벌지 않았을까 싶다
(바둑 기사로서 평생가도 10억도 모으기 힘들텐데 1년에 20억...)

그리고 드디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후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바둑계 최대의 사건
'상하이 대첩'이 쓰여지는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이 2004년 말 개최된다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 대회 개막식

이 농심 신라면배는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대회야
1회 대회 부터 전기 5회 대회까지 모두 한국팀이 우승을 차지했고
공교롭게도 1회 부터 5회까지
늘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타자는
'이창호'였어

중국이 한국만 만나면 힘을 못쓴다는 '공한증'이 바둑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지
말그대로 '한국은 공포의 대상'이라는
'공한증'은 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지역 축구 예선전에서
중국이 한국에 패하며
중국 언론에 처음 등장한 단어였는데

이후에 바둑계에서도 '공한증'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
이창호와 관련된 기사에 주로 쓰였고
중국인들은 번번이 중국에 물을 먹이는 이창호를 보며
처음에는 욕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창호를 존경하고 신성시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돼
그냥 두손 두발 다 든거지

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취임 후 한국에 방문했을 때
청와대 만찬 자리에 이창호 9단을 초대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기도 했어
시진핑은 소문난 바둑광인데
그중에서도 이창호의 광팬이었거든
이창호의 팬이라는 기사가 중국 언론에까지 보도될 정도였어

 

 

"나는 이창호9단의 팬이다"

 

 

 

 

 

 
이창호의 위엄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제 6회 농심 신라면배가 개최되었어

한국에서는
한종진 5단,안달훈 6단,최철한 9단,유창혁 9단,이창호 9단이 출전했고

 

 

 

 

당시 한종진 5단과 안달훈 6단은 떠오르는 신예기사들이었고
농심 신라면배 국내 대표선발전을 뚫고 올라온 실력자들이었어

유창혁 9단은 전편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이창호 못지않은 최강의 기사였고
최철한 9단은 4년후 6회 응씨배에서 우승을 거머쥐게 되는 실력자야

 

 

최철한 9단

 

 



사실 전기 대표팀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지적이 많았어
한종진과 안달훈은 세계 대회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거든
하지만 이 둘 모두 국내 대표선발전을 거치고 올라온 실력자들이었고
최철한,유창혁,이창호로 이어지는 필승조는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게 충분한듯 보였지

 

 

최강의 필승조


이에 맞서는 중국은
펑취안 5단,왕시 5단,왕레이 8단,저우허양 9단,뤄시허 9단이었어

마지막으로 일본은
다카오 신지 8단,장쉬 9단,왕밍완 9단,미무라 도모야스 9단,조치훈 9단으로

당초 한국언론들은 예상하길 중국은 해볼만 하나
일본이 예상외의 복병일 것이다라고 많이 예상을 했어

개인전에서 세계 무대를 한국과 중국에 모두 내준 일본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드림팀을 구성해 나온 모습이었거든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떻게 팀을 짜도
어디에서도 꿇리지 않을 기사들이 즐비했기에
6회 대회 또한 무난한 우승을 예감하고 있었지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달라졌어

첫 대국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열렸다
농심 신라면배는 한국기원이 주관하고
농심이 후원하는 세계대회로서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경기를 진행한다
보통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막을 하고
한국의 부산이나 서울로 왔다가
결승전을 중국의 상하이에서 치른다

첫 주자로 나선
한종진 5단이 일본의 미무라 도모야스 9단에 불계패를 당했고

중국의 저우허양 9단이 미무라 도모야스와 한국의 안달훈 6단을 연달아 꺾어버렸어
 

 

결국 패기를 기대했던 신예 둘이 어이없이 연달아 무너져 버린 한국은
곧바로 유창혁 9단이라는 필승조를 투입시키게 되는데
장소를 부산으로 옮겨 다음 대국이 펼쳐지게 된다
유창혁의 상대는 일본의 다카야 신지 8단
그동안 거둔 성적으로 보나 명성면에서
유창혁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믿을 수 없게도
일본의 최약체로 꼽혔던 다카야 신지 8단에 4집 반 패배
사실 이창호 다음으로 한국팀에서 믿고 있었던 것이 바로 유창혁이었어
팀의 맏형이기도 했고 이당시 기력 또한 이창호 못지 않았거든

 

 

 

 

왼쪽부터 유창혁 9단, 안달훈 6단, 한종진 5단

 

하지만 기쁨도 잠시
최철한은 바로 다음 주자인 일본의 조치훈 9단을 만나 
흑 불계패를 당한다 

 

 

 

이런 조치훈도 곧바로 중국의 뤄시허 9단을 만나 패배하고 마는데

한국 언론들은 처음으로 농심배를
타국에 넘겨줄 위기에 쳐했다고 보도하게 된다
반대로 중국과 일본은 드디어
한국을 꺾고 세계 단체전에서 우승을 거둘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그 의지를 불태우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중국에는
왕시 5단,왕레이 8단,뤄시허 9단이 남아있었고
일본은
장쉬 9단과 왕밍완 9단이 남아 이창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은 오직
이창호 한 명 만이 살아남은 상황

우승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이창호가 다섯명을 연달아 모두 꺾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이창호가 강하다고 해도
상대는 각국의 최강자들
다섯명을 연달아 굴복시키는 일은 불가능처럼 보였다
 

 

 

사실 이 당시에 언론에서도
아무리 이창호라도 우승은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거의 반포기 상태였고 이창호가 몇명이나 
이길 수 있을까가 관심사였는데

일단 부산에서 이창호는 조치훈을 꺾고 올라온 뤄시허를 상대로 승리하고
이창호는 결전의 땅 
상하이로 향하게 된다


물론 부산에서 기분 좋은 1승을 챙기고 온 이창호였지만
대회 일정 또한 이창호에게 불리하게 맞춰져 있었다
이창호는 나머지 4국을 모두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4국이 매일 연달아 있어서
하루도 쉴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바둑 또한 엄청난 정신적 체력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인데
사실 이런 큰 대회에서는
한 판만 두어도
왠만한 기사들은 체력이 바닥나서 나가 떨어져 버리곤 하니까




그렇게
상하이에서 펼쳐진 첫 번째 대국은
대만계 일본기원 소속의 장쉬 9단과의 승부
결과는 흑을 쥔 이창호의 245수만의 불계승
접전이었지만 결국 이창호가 승리를 따냈다
장쉬 9단은 당시 일본의 최강자로서 일본팀에서 가장 믿고있던 카드였어

 

 

 

 

(좌)이창호 9단 (우)장쉬 9단


다음날 이어진 중국의 왕레이 8단과의 대국
왕레이는 초반부터 승기를 잃는 듯 무너지며 쉽게 승리를 내주고 만다
결과는 이창호의 백 불계승
대국 후에 왕레이 8단은 패인에 대해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실력차 때문"이라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이창호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준비해서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했어

복기 중인 이창호와 왕레이


이로써 부산에서의 1승과 상하이에서의 2승
다섯명 중 벌써 세명을 꺾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는 혹시 이창호가 기적같은 
역전 우승을 이뤄내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해

하지만
남아있는 중국의 왕시 5단은
당시 중국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분류되고 있었고
왕레이는 패배 후에
"하지만 나는 이창호가 더 승리할 수 있을거라 보지 않는다. 내 뒤에는 왕시가 있다"라고
말 할 정도로 왕시에 대한 팀원들의 믿음은 두터웠어

일본의 왕밍완 9단 또한 이때까지
이창호에 대한 상대전적이 2승1패로 앞서고 있을 정도로
이창호에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이창호의 역전 우승은 아직도 힘들어 보였다


다음날 벌어진 제 4국은
일본의 최종장 왕밍완 9단과의 결전
승부는 초반부터 치열했다

결과는

 

패배 후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 왕밍완 9단(좌)

 

왕밍완과의 대국 후 이창호의 승리가 보도된 중국신문
이창호의 별명 '석불(돌부처)'이 눈에 띈다


204수 만에 백 불계승으로 이창호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제는
역전 우승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대전적으로 밀리고 있던 왕밍완 9단에게서 거둔 갚진 1승으로

마지막
중국의 왕시 5단만을 남겨두고 파죽의 4연승을 내달리는 이창호였다




그리고 다음날
2005년 2월 26일 상하이 왕바오허 호텔에서
한국의 이창호 9단과 중국의 왕시 5단의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
5연승을 거두며 한국의 통쾌한 역전우승이냐
이창호를 저지하며 세계 최강 자리를 탈환하느냐
전 세계 바둑팬들의 이목이 이 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대국 당일 분주해 보이는 한국 검토실

대국이 진행되면 검토실은 동료 기사들이 대국을 지켜보며 분석하고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기도 하는 장소로 활용돼

남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당시 인터넷 해설을 맡았던 
김성룡 9단 이창호 9단과는 동갑내기 프로기사로
친한 친구사이야
입담이 좋아서 현역시절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해설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돼
얼마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일전 때도 해설을 맡은 적이 있지

 

 

대국장으로 입장하고 있는 중국 선수단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

 

 

 

단신으로 대국장에 향하는 이창호 9단의 모습

 

 

 

위 사진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인용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사진이야
단신으로 중국과 맞서는 이창호의 고독함을 여실히 보여주지

이에 맞서는 왕시 5단은
떠오르는 중국의 기대주였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만큼 
중국인들은 왕시가 이창호를 이겨주길 기대하고 있었지

 

 

 

왕시 5단(2006년 9단 승단)

사실 왕시는 왕레이의 차례에 자신이 먼저 출전하길 원했어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거지
패기 넘치는 신예기사였던 왕시는 당시 중국킬러 이창호를 상대로
복수를 나서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거든

 

 

대국장에 먼저 도착해 이창호를 기다리고 있는 왕시 5단

 

 

대국장에 들어서는 이창호 9단
 

 

대국장에 몰린 취재진

사실 어떤 대회든 마찬가지겠지만 결승전에는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몰려
더군다나 역전 우승에 온갖 관심이 쏠린 이 대회에는 취재 열기가 더 했지
그 인파 속에서 두 대국자는 대결을 벌이는거야
카메라 셔터도 연신 터지고
집중이 잘 될 수 없는 환경이야 일반인에게는
이런 곳 에서도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프로기사들이 대단한 부분이지
물론 취재진은 초반 몇수까지 사진 촬영시간이 끝나면 자리를 비워줘야 해
이런 환경에서 끝까지 대국을 진행할 수는 없지 

 

 

 

자리에 착석하는 이창호 9단

 


한 중 양국의 명운이 걸린 대국이
그렇게 시작되었어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39)

사실 이 글은 바알못 게이들을 위한 글이라
기보(대국의 수순을 정리해 놓은 것)를 넣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제 어떤 게이가 기보를 좀 보고 싶다고
너 바알못아니냐고 하길래...
워낙 유명한 대국이기도 하고
스토리 상 클라이막스 부분이기에
특별히 기보를 가져와 봤어

이창호는 초반 우상귀 화점과
우하귀 소목으로 시작
왕시는 이에 맞서 양 화점 시작을 해
이창호는 우하귀를 한칸으로 굳히며
상대의 집을 깨러 들어가는 공격보다는 초반 실리(실제 이득, 집)를 취하는
전략을 택하지
이에 왕시는 먼저 우변을 갈라치며 이창호의 확장을 방해하며 싸움이 시작 돼
초반 공방전을 시작한건 왕시쪽이었지

사실 여긴 바알못 게이들이 대부분일텐데
더 쉽게 설명하자면
바둑은 초반에 공격권이 먼저 두기 시작하는 흑에게 있어
하지만 흑을 쥔 이창호는 공격을 하지 않고
먼저 방어 태세를 갖추며 자신의 집을 불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거야
그대로 두면 안되니까
상대인 백은 먼저 공격을 해온 거고
초반양상은 이정도로 봐두면 될 것 같아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56)

왕시는 계속해서 공격일변도로 우변과 우상귀의 흑의 진영을 파고들어
흑의 진영을 무너뜨렸고
이창호는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공격을 타개(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하며
세력을 쌓음과 동시에 우하귀에서 하변으로 이어지는 큰 집을
만들며 왕시의 공격을 계속해서 상쇄하지
왕시는 그럴수록 더 거세게 이창호를 몰아붙였어
하지만 이창호는
거세게 맞받아치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그저 왕시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듯이 판도를 끌고 나간다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77)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바둑판 넓게 보고
돌의 연결을 잘 보면 돼
백은 바둑판의 귀퉁이마다 모양을 갖추긴 했지만 큰 집이 난 형세는 아니야
막상 공격을 주도했던 것은
왕시였지만 공격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 한거지
게다가 왕시의 집이 작은 집 뿐인데 반해 이창호의 흑돌들은 넓게 퍼져서 큰집을
형성하고 있어
오히려 공격을 방어하는 쪽이 계속해서 더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거야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191)

대국이 종반에 까지 치다른 모습이야
노란색으로 표시된 흑의 191수로 백의 7점이 끊어 잡히게 돼
중앙으로 연결되는 흑의 거대한 집이 더 커지게 되고
백은 귀퉁이 마다 겨우 서너집밖에는 없는 모습이야

 

 

 

돌을 던지는 왕시 5단

바둑에서는 항복의 의미로 '돌을 던진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말 돌을 집어서 상대한테 던지지는 않고
상대에게 따낸 상대의 돌을 가만히 반상에 올려둔다던지
상대에게 졌습니다라고 말한다던지
집었던 자신의 돌을 반상에 떨구고 항복의 표시 고개를 숙인다던지
방법이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고 기사들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결국
집 차이를 견디지 못한 왕시는
결국 이후 257수만에 이창호를 상대로 패배를 선언하게 되고

 

 

 

이창호는 혼자 힘으로 
한국의 역사적인 역전우승을 결정짓게 된다

 

 

 

충격에 빠진 중국 취재진들
 

 

 

 

승리를 결정지은 후의 이창호 9단
상당히 피로한 모습이다
 

 

대국 후 왕시에게 몰려드는 취재진들

이창호는 복기 후에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려서
패자인 왕시에게 온 집중이 쏠려버렸다
왕시는 당시 인터뷰에서 자신의 완패를 인정했어
"처음부터 이창호를 흔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는데
모두 먹히지 않았고 이창호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는 소감을 밝혔어

그리고 취재진들은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지

 

 

 

 

 

몰려드는 취재진에 이창호는 몸 둘 바를 모른다


간신히 주위를 수습하고
기자들은 우승자 이창호를 향한 질문을 쏟아낸다
-기적같은 5연승을 거두며 한국팀 6연패를 지켜내셨습니다. 그 우승 소감이 궁금합니다.
-어..기쁘다기 보다는 그동안 무거운 부담감을 내려놓은 듯 해서 마음이 편하다는 쪽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전에 인터뷰에서 왕시 5단과 먼저 두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오늘 왕시 5단과 둔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초반에 백(왕시 5단)쪽에서 실수가 나와서 편하게 뒀는데 중반 이후 형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앙에 큰 집을 짓고 나서는 바둑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 판 중 가장 어려웠던 판은 언제 였습니까?
-심리적으로 볼 때 장쉬전이 가장 부담이 많이 되었는데...나중에 내용적으로는 왕밍완 9단과의 대국이
상당히 위험했었습니다.

-오늘 대국은 초반부터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특별히 작전을 구상하고 나오셨는지요?
-특별히 작전을 짜온건 아니고 그날 그날 형태에 따라서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왕레이 전 때와 비슷한 모양이 나와서 비교적 속기로 둘 수 있었습니다






이하는 우승 직후 중국인들의 반응

'내 우상은 이창호다! 난 줄곧 그가 이기길 바랄뿐이다.'
'우리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창호는 너무 막강하다. 방법이 없다.'
'이창호는 이미 얼빠진 사람처럼 멍해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석불을 존경한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이창호는 바둑계를 30년간 통치할 것이고, 바둑계에 300년간 영향을 줄것이다.'
'석불의 천하임은 분명합니다.'
 

 

사실 농심배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이창호는 갑작스런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1승5패의 전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이창호에게 5연승은
불가능처럼 보였고
이창호 본인도 많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부담감을 이겨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불멸의 승부사 이창호


 

 


농심배 이후 
2007년 왕위전 12연패(30기~41기)위업 달성
2009년 KBS 바둑왕전 3연패 등
90년대 부터 2000년대는 바야흐로 이창호의 시대였다




그리고 2010년
사이버오로(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이도윤씨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추게 된다

 

 

참고로 신부...11살 연하다


지금은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여전히 프로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2000년대 후반 부터 이세돌에게 최강자 자리를 내어주고
하락세를 보이며
현재는 중견 프로기사로서 프로활동을 이어오는 중이다





한국인들 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더 사랑받고 존경받은 이창호
중요한 순간 마다 대한민국을 구해내며
'신산' '석불' '수문장' '수호신' '철의 승부사' 등
수 많은 별명을 얻었다

누구보다
승부에 강했던 역대 최강의 기사

그의
무표정 뒤에 감춰진
열정을 느끼며
그 때를 추억해 보았다


 

 

여기까지 이창호편의 마무리야

 
끝~







 


 

자 그럼 바로 2편 시작한다!

 

이창호 九



지난 1편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 함께 서울로 올라와

그때 당시 화곡동에 거주하던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이게 되자
연희동의 넓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돼
(참고로 왜 제자를 내제자라고 부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서 
설명해주자면 바둑을 배우기 위해 스승의 집에 머물며 
수학하는 제자를 바둑계에서는 내內제자라고 불러)

당시 조훈현은 노부모를 모시며 살고 있었는데
이창호는 2층의 노부모가 쓰는 방에서 함께 지내게 돼
이창호는 지금의 승부사다운 모습과는 다르게
어린시절부터 겁이 많았다고 해
특히 잘 때는 혼자서 잘 수 없어서
전주에 지낼 때도 늘 부모님과 함께 자거나 형과 잤다고 해
(이창호는 3남 중 둘째)
나중에 중학생이 되어 따로 방을 주었을 때도
항상 불을 켠 뒤 문까지 열어놓고 잠에 들었다고 해

이곳에서 이창호는 약 7년 간 지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독립을 하게 되는데
조훈현의 아내인 정미화씨는
"7년동안 2층으로 올라가는 창호의 발소리가 
울리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그 정도로 이창호는 작은 일에도 조심성이 투철했다는 거야
이는 이창호의 기풍에도 잘 나타나는데 
전투를 할 수 있는 힘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항상 전투를 피하고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자리에도 손이 쉽게 나오는 법이 없어
그래서 이창호는 수읽기는 빠르지만 빠르게 두는 속기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어
수읽기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했지만 늘 장고를 하는 스타일이었지
(하지만 1분 초읽기에 몰리면 빠르게도 정말 잘 둔다)

이창호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에 빗대어
'이창호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돌아서 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야

 

 

 

아무튼
첫 일년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교대로 서울로 올라와 함께 지내며
머리도 감겨주고 외식도 시켜주고 했다고 해
앞서 말했지만 이창호는 혼자있으면 
정말 숨쉬는 것,바둑 두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못하거든
참 다행이었던 건 말도 잘 못했다는 점인데
네 살배기 아들과 갖 태어난 딸을 키우며 노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대국장에 데려갈 땐
운전수 역할도 도맡아 하는 게다가 이제는 남편의 제자까지 키워야 했던
정미화씨는 보채고 귀찮게 않는 과묵한 아이가 참 고맙게 여겨졌을 거야

조훈현은 언제나 바빴기 때문에
이창호는 학교에 다녀오면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어
보통 조훈현이 사활문제(맥점에 착수하여 바둑돌을 살리는 문제)
같은 숙제를 내주고 대국 때문에 외출을 하면
이창호는 스승이 돌아오기 전까지 문제를 다 풀어놓고 하는 식이었어

어찌 보면 참 외로웠을 것 같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테니까 말이야
더구나 매일매일 같은 패턴의 나날들이 반복된다면
아무리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바둑도 과연 언제까지 즐거울 수 있을까
이창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보통 웃고 있는 사진을 찾아보기 힘들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창호가 웃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니야
이창호가 처음 참가했던 어린이바둑대회에서 16강에서 패배를 하고
충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승부욕이 누구보다 뛰어나며 지기 싫어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고 생각해
이창호는 아마도 감정을 잘 못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잘 숨기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싶어
감정 표현이 서투를 뿐이라는 거지

바둑기사로서 감정을 잘 숨긴다는 것은 최고의 재능 중 하나야
반상을 두고 마주보는 상대에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건 약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이건 이창호에 대해
연구하며 여러 정황을 통해 내려본 나의 추측이지만

어쨌든 한 명의 꼬마 아이가 감당해내기 힘든 생활이었음에는 틀림없어
하지만 소년 이창호는 
이러한 고독한 싸움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둑공부에 매진하고 스승이 내주는 
숙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 말아
그리고 스승이 잠든 후에도 밤 늦게 까지 기보(대국의 수순)를 보며
바둑알 놓는 소리에 조훈현의 부인은 자주 놀랐다고 하지

누구보다 성실했던 이창호가 가끔 스승에게
혼이 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건 이창호가 가끔 복기를 틀리는 일이 있어서 였어

복기란 마무리가 된 대국의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며 
패인을 찾아내거나 묘수를 찾아내는 일을 말하는데
일단 복기의 핵심은 대국의 수순을 전부 외우는 거야
그런데 이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보통 아마추어들도 어느정도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면 다 할 수 있는 일이거든
몇 백수나 되는 수순을 어떻게 다 외우냐 하겠지만

바둑은 한 수를 두고 다음 수가 어느정도에 올지 감이 오기 때문에
모든 수가 연결되어있고 그런 감이 생긴 후에는 수순이 금방 외워져
더군다나 프로를 준비하는 바둑 신동이라는 놈이 복기를 틀려서는 안되는 것이었지
그런데 이창호는 이런 기본적인 부분을 틀려서
스승의 핀잔을 샀어
스승 조훈현은 어려서부터 절대 그런 실수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거든
 

 


스승 조훈현이 더 화가 났던건
다른 부분은 또 엄청나게 뛰어난데 이런 말도안되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야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나태하다고 보기 좋은 실수였지

하지만 내 생각엔 이창호는 조훈현을 겁내고 있었던 것 같아
자신이 동경하는 바둑, 그것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스승 조훈현이었으니까
이렇게 이창호는 고독하고 혹독하게 훈련을 거듭해

84년도 4월에 서울에 올라온 이창호는 그해 11월 프로입단대회에 나가는데
결과는 보기좋게 탈락
서울에 올라와서 줄곧 열심히 바둑공부를 했고
전주에서부터 바둑공부는 쉬지 않았지만 역시 프로의 벽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어

이창호의 탈락소식은 한국기원에서도
큰 이슈였지
이창호는 조훈현의 내제자 였으니까

프로기사들 중에는 조훈현과 사이가 좋지않은 기사들이 많았어
그건 조훈현이 대국매너가 좋지 않았던 것도 있고
(담배를 너무 많이 태운다던가 혼잣말을 해서 시끄럽게 한다던가
바둑알을 한웅큼 쥐고 짤그락 댄다던가 하는 안좋은 습관이 많아)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타이틀을 죄다 독식해서 그런지
주위에서 조훈현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

조훈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로기사들은 조훈현이 들으라는듯이
'바둑신동이라더니 별거 아니네'
'눈도 멍하고 뚱뚱해서 바둑을 잘 둘 관상이 아니야'
라며 기다렸다는듯 
스승의 심기를 긁는 소리를 해대지

하지만 그때 이창호의 나이는 겨우 열살 
만으로 아홉살이었다
조훈현 외에 만 아홉살에 프로가 된 사람은 현재까지도 없으니
이창호가 절대 늦은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많은 이들이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를 깎아내리기 바빴을 때
서봉수 9단 만은 라이벌의 제자를 두고 다른 평가를 내렸다고 해
참 의외지 서봉수 9단은 조훈현 9단과 사이가 안좋은 수준이 아니라
서로 원수지간이니까
 

 

서봉수 9단


그럼에도 서봉수 9단은 이창호를 향해
"저 친구 올해 아홉살이라고 했나? 바둑 두는거 보니 
끝내기에서 한집 버는 솜씨가 아주 기가막히네 기가막혀 허허. 대단한 재주야!"
라는 평가를 했다고 해

아무튼 비범한 사람들은 보는 눈이 다르긴 다른가보네
사실 전성기 시절 이창호는 완벽 그 자체였지만 그중에서도
끝내기를 가장 잘하는 기사였으니까
서봉수는 벌써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

그러다 드디어 2년 후인 86년도 8월에
만 11세의 나이로 당당히 프로입단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조훈현의 다음으로 빠른 기록이었다
이창호는 기쁘기도 기뻤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을 거야
주위에서는 조훈현의 제자라는 이유로 색안경부터 끼고 봤으니까
이창호는 프로입단을 결정짓자마자 전주로 내려가

어린 시절부터 둘째 손주 이창호를 끔찍이도 아꼈던 할아버지가
얼마 전 폐암판정을 받고 집에서 요양중이었거든
할아버지는 어린 창호가 프로기사가 되었다는 말에
폐암으로 몸저 누워있으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는 이창호의 말이 기억이 나
이창호의 할아버지는 그해 10월 폐암수술을 받고 11월에 돌아가셨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서울에서 프로 생활을 하고 있던 창호를 꼭 세계제일로 만들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잘하라는 유언을 가족들에게 남겼다고 해

사실 어떻게 보면
이창호의 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창호가 없을지도 몰라
처음 이창호에게 바둑을 알려준 것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창호가 좋아하는 바둑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선택 덕분이었으니까

프로가 된 후에 이창호는 충암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이건 충암고에 있던 바둑연구실 때문이었다
충암고는 재단 차원에서 당시 바둑연구실을 두어 학교에 다니는 프로기사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대회와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인데
당시에 충암바둑연구실에는 충암고를 졸업한 유창혁이 있었어
유창혁은 이창호보다 9살이 많은데 
집안 사정이 좋지못해 3년 간 바둑을 쉴 수 밖에 없었고
84년도 18살의 나이에 프로입단을 하게 되지
유창혁의 실력을 감안하면 꽤 늦은 입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
 
 

유창혁9단

잠시 유창혁 9단에 대해 설명하자면
유창혁 9단은 후에 조훈현, 서봉수에 이어
제 3회 응씨배를 우승하게 되는 
한국 바둑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야
현역시절 최강공격수,일지매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날카로운 공격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시원시원한 기풍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기사야
오히려 이창호의 기풍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유창혁의 기풍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었지
시종일관 공격하는 그의 기풍은 바둑 보는 재미를 쏠쏠하게 해주었으니까
비록 이창호와 동시대에 활약했기 때문에 우승횟수는 이창호에 비해 훨씬 적지만
93년도 후지쯔배, 96년도 응씨배, 2000년 삼성화재배, 2001년 춘란배, 2002년 LG배를 우승
세계 주요 5대기전에서 모두 우승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등
이창호 못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어
지금도 프로기사 활동과 바둑 해설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며
현재 바둑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있어

어쨌든 이창호가 충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며
둘은 처음 만나게 되었고
어려서 부터 유복하게 자라온 엘리트 이창호와
집안형편 때문에 바둑의 꿈을 접을 수도 있었던 늦깎이 유창혁의 만남은
어찌보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도 볼 수 있어
이렇게 대조적인 인물이 앞으로 우승을 다투며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가게 되니까 말이야

 

 

(좌) 이창호 9단 (우) 유창혁 9단

이 사진은 얼마전 열렸던 '한국바둑의 전설'이라는 이벤트성 대회인데
조훈현,서봉수,조치훈,유창혁,이창호
당대 최고의 바둑 고수들이 모여 대결을 했던 대회였어
사실 이세돌을 제외하고는 저 다섯명의 팬이 
현재 바둑팬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아무튼 이 대회에서 최종우승은 유창혁이 하게 되는데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지
참고로 유창혁은 올해 나이가 쉰이야



 아무튼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창호는 프로가 된 첫 해 86년도에 공식전적 7승3패를 기록하게 돼
승률 70%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어
하지만 이창호는 일곱번 이긴 대국보다
세 번 졌던 대국을 곱씹고 곱씹었어

 

 

그래도 커가면서 젖살이 조금씩 빠져가는 것 같다

프로가 된 후의 생활은 오히려 프로가 
되는 것 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고 해
이제는 진짜 프로들끼리의 싸움만이 남은 거니까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천하의 이창호도 별 수 없었던거지

매일밤 자신의 패배가 납득이 될 때까지 복기를 하다 잠이 들었다고 해
이때 나이가 만으로 열한살...열두살이면 국민학교 5학년이야
참 이창호도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운 프로기사들을 보면
죄다 어린아이 답지 않은 면이 있어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서울 올림픽이 있던
1988년
이창호는 처음으로 타이틀 전 결승전에 오르게 된다
결승전 상대는
최강의 스승 '조훈현'

 
 

 

1988년 24기 최고위전 결승전(운당여관)


사진속의 장소는 운당여관이라는 곳인데 
종로구에 위치한 오래된 여관이야
인간문화재 명창 박귀희 씨가 소유한 곳인데
58년도 부터 89년도 까지는 국수전을 비롯한 명인전,최고위전 등 
국내 주요 기전의 결승전을 이곳에서 진행했어
이곳은 바둑계에 있어 성역이었는데
89년도에 재개발로 건물이 헐려버리면서 더이상
이곳을 사용할 수 없었고 후에는 다른 장소에서 결승전들을 진행하게 되지

 
아무튼
생각보다 빨리 스승의 자리를 넘보았지만
결과는 3-1로 보기 좋게 이창호의 패배

조훈현은 아직 멀었다는듯 무자비하게 제자를 몰아붙였어
아마도 이 어린 핏덩이를 여기까지 올려놓은
중견기사들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을지도 몰라
아직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지

하지만 이창호는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때까지도 이창호도 자신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을 거야
조훈현이라는 존재는 이창호 뿐 아니라 다른 프로기사들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창호는 스승에게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조훈현도 결국은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걸 느끼게 돼

그렇게 2년을 이창호는 또다시 묵묵히 칼을 갈게 된다

2년 뒤 1990년도... 

 

 

1990년 30기 최고위전 결승전

드디어 이창호는 종합전적 3대2로 스승 조훈현을 꺾고 
2년 전 빼앗지 못했던 최고위 타이틀을 빼앗아 온다
아직도 이창호는 바둑을 두며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첫 세계 대회 동양증권배 우승도 농심 신라면배 역전 우승도 아닌
이 날의 최고위전 첫 우승을 꼽는다

이건 그동안 쌓아왔던 을분의 표출이었고 이창호가 보낸 수 년간의 
고독한 훈련이 톡톡한 성과를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며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소중한 우승이었다

 

 

그리고 이창호는 이 해에 국수(國手)전에서도 스승 조훈현을 꺾었다
 


스승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타이틀을 빼앗아 옴과 동시에
'국수(國手)'로서 '대한민국의 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90년대의 이창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어보였다
그 옛날 조훈현이 김인,하찬석,윤기현,서봉수등을 꺾으며 그랬던 것 처럼...
한국 바둑계의 왕좌가 교체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으로 세계 최연소 타이틀획득기록을 시작으로

 

 

 

95년 TV바둑아시아대회 우승

96년 TV바둑아시아대회 2연패,후지쯔배,동양증권배,세계바둑최강전,삼성화재배 우승

97년 삼성화재배2연패,LG배 세계기왕전 우승

나가는 국내,국제대회 마다 우승을 휩쓸게 되고

조훈현은 이창호와 만나는 번번이 패배하며
타이틀을 모두 내주고 만다

 

 

 

 

 

조국수님 표정이 쓸쓸하다
 

2002년도에는 종전까지 스승 조훈현만이 달성했던 프로통산 1000승을 달성과
프로통산 타이틀 100회를 달성하며
더 이상 이창호의 앞에 적수가 없음을 재확인하게 돼

 

 

이제 스승을 넘어 세계최강의 반열에 오른 이창호...

그는 과연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2편끝~

 

 [神算-이창호 편]
시작한다!!

 

 

이창호 九단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사는 조훈현이 아니라 이창호야
처음 바둑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 이창호 때문이었거든

조훈현이 격동의 시기에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이창호는 늘 극적인 승부를 연출해내며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기사라고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바둑 그까짓거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사람을 미화하냐'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 바둑이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없는 퍼포먼스가 부족한 스포츠야

몇시간씩 앉아서 말없이 돌만 놓다보니
사람들이 지루해하기 쉽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싱거워지기 마련이지

바둑에서는 겸손이 가장 큰 미덕이기에
바둑기사들은 보통 
앞에 나서서 자신을 알리려고 하지않아
때문에 대국의 긴장감과 열정이 타인으로 하여금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운동 종목 못지 않게 그 이상으로
바둑기사들은 자신들의 바둑에
큰 열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 열정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 열정을 함께 느끼고 배워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바둑을 보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해

 

 

어린시절 이창호

이창호는 전북 전주 출신의 75년생 올해 나이 마흔 하나가 되는 중견 프로바둑기사야

참 신기한 것이
한국 바둑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거의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이야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안은
故조남철 9단의 생가가 위치한 곳이고
조훈현 9단의 생가 또한 전남 목포에 있어
그리고 이창호 다음 세대의 최강자인
이세돌 또한 전남 신안군의 비금도라는 외딴 섬에서 태어났고...

전라도 사람들이 다른 건 몰라도 바둑 하나는 기막히게 두는 것 같아

아무튼
어린시절 사진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
이창호는 나면서부터 우량아였어
초 우량아

태어났을 때 4.8kg이었다고 하니까
보통 신생아들의 표준 몸무게가 3kg대인 것을 감안하면
다른 아이들 보다 1.5배 정도 더 컸던 셈이지
전북대표 우량아로 뽑혀서 그 해의 우량아를 뽑는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2위까지 올랐다고 해...

 

어렸을 때 부터 가세가 기울어 힘들었던 유년시기를 보낸
조훈현과는 달리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창호는 어려서부터 부족함없이 자랐다고 한다
바둑을 처음 배운 건
국민학교 1학년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였어

이창호의 할아버지는 전주기우회의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창호가 국민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할아버지가 친구분들과 온종일 방 안에서 바둑을 두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던 이창호는
할아버지에게 자신도 바둑을 가르쳐달라고 조르게 돼

할아버지는 네가 좀 더 크면 가르쳐주겠다 하셨지만
어린 시절 고집이 셌다는 이창호는 떼를 쓰며 
할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워내고야 말지

그 이후로 방학 내내 이창호는 집에서 바둑을 뒀다고 해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혼자 바둑판 앞에 앉아 몇시간씩 바둑을 두는데
그 끈기는 어려서부터 대단했던 것 같아


 
 

 

 

달정도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던 어린 시절의 이창호는

제법 실력이 오르자
동네 기원에 가 바둑을 두게 돼
하루종일 기원에 앉아 기원을 찾아오는 수 많은 사람들과 대국을 했다고 해
할아버지,할머니,아저씨,아줌마,학생
너나 할 것 없이 이창호에게는 그들 모두가 스승이었고
친구였어

할아버지는 이러한 손주의 모습이 대견스러웠고
친구들과 만날 때면 늘 둘째 손주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어
조훈현이고 조치훈이고 부럽지가 않았을 거야
가끔은 손주 녀석을 상대해주어 고맙다며 기원 사람들에게 
짜장면을 대접할 때도 있었어

분명 할아버지는 손주 이창호를 바둑 기사로 키울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창호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어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전주의 금은방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 이재룡씨는
사실 이창호가 나중에 의사나 공학도가 되기를 원했다고 해
그때 당시에 바둑이 인기있었던 것은 맞지만
워낙 예체능이라는 것이 미래가 불투명 하기도 하고
이창호가 어린 나이에 바둑을 잘 두긴 하지만 
재능이 그리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거야

괜히 할아버지의 말대로
바둑을 시켰다가 공부도 바둑도 이도저도 아니게 될 까봐
아버지는 늘 노심초사했어

 

 

 


하지만 할아버지의 결심은 굳어져 갔고
날로 성장해가는 어린 손주의 손을 붙들고 기원 순례를 다녀
동네 기원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크게 성장할 수 없는 법
조훈현이고 조치훈이고 부럽지 않았던 손주를
이때부턴 진짜 조훈현 조치훈으로 만들려고 하셨나봐

수 많은 기원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고수들과 붙으며
손주를 더 성장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러다 전주에서 아마 최고수라 불리던
아마 5단 이정옥을 만나게 돼
사실상 이창호의 첫번째 스승이 되는 사람이야
(일반인 아마추어라 그런지 사진이 안나오노...)

아무튼 이정옥을 만나게 된 이창호는
매일같이 이정옥을 만나 수백판을 두었다고 해
이정옥은 그당시의 이창호를 회상하며
'묘한 아이'였다고 말해

물어보면 따로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수를 기가 막히게 찾고 또 수를 봤는데 거기다 두지 않고 다른 곳에 두고
묘한 생각을 가진 아이였다는 거야

얼마 후 어린 이창호는 인생을 바꿀 만남을 갖게 되는데

바로 故전영선 7단과의 만남이야
 

 

좌측이 전영선 7단

전영선 7단은 후에 조훈현 9단에게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이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이야
전북 전주 출신의 프로기사로서 
2002년에 안타깝게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분이 이창호의 두번째 스승이야
이창호에게 바둑 기본기를 가르쳐 준 실질적인 스승 중의 한 명이지

전영선은 바둑계의 기인으로 통했는데
바지 뒷춤에 항상 소주병을 두병씩 꽂고 다녀 '쌍권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어

기풍은 엄청나게 호전적인 전투형의 바둑이라
적당히 타협하며 집을 짓고 이겨서는 바둑이 아니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어
바둑 기사의 겸손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1967년 한국바둑선수권전 우승 당시의 故전영선 7단의 모습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기사이지
사실 프로7단을 고스톱 쳐서 단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야
사실 전영선은 당시 프로기사였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잠시 고향에 내려와 기원에 들렀다가 어린 이창호를 만나게 돼
지도대국을 둬보고는 기재에 감탄을 하지
이창호 할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전영선은 
한 달에 한 번씩 전주에 내려와 이창호를 지도해주기로 해

처음에는 6점을 놓고 시작해서
이창호가 전영선과 정선(덤이 없이 하수가 흑으로 먼저 두는 것)을 
둘 수 있게 될 때 까지 함께 두었다니까
꽤 오랜시간을 함께 보냈던 것 같아
어린 이창호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던 것이지

위에서도 말했듯이 호전적 기풍의 전영선은
이창호에게 싸움을 가르쳐
'바둑은 전투이며 투쟁이다, 끊지 않을거면 두지도 마라'
그 만의 투박한 방식이었지만
이창호는 늘 싸움을 피해가는 길을 선택하고
스승에게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어

한 인터뷰에서 이창호는 과거 스승이었던 
전영선 사범에게 수를 내지않는다고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안다는 질문에
'수를 내지않았던 것이 아니라 싸움은 복잡하고 자신이 없어 싫었다'고 대답을 해

사실 이러한 이창호의 어릴 적 기풍은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이
나타나는데 이 부분이 참 신기하지
스승이었던 전영선도 조훈현도 모두 전투에 능한 기사들이었는데
정작 이창호는 전투를 극도로 기피하는 기풍을 지니게 되니 말이야

 이 점 때문에 처음에 전영선 7단은 반신반의 했다고 해
바둑에 깊이는 있으나 자신감이 부족하고
힘은 있으나 싸우려 하지 않으니
과연 이 아이가 대성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해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국민학교 2학년 시절 
처음으로 어린이바둑대회에 나가게 돼
예선은 단숨에 통과했지만
아쉽게도 16강에서 당시 6학년 이었던 류시훈을 만나 패배하고 말아

말 수도 적고 감정표현도 서툴었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어 
그 날의 패배가 어린 이창호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

전주 동네에서는 어딜가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른들에게 칭찬만 받으며 지냈는데
막상 대회에 나가보니 자신보다 훨씬 더 잘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던 거야

그날이후로
어린 이창호는 밤늦게 까지 기보를 보며 연습에 더욱 매진했어
명절날 친척어른들이 모두 모여
집안이 시끌벅적 할 때도
이창호는 방안에 박혀 바둑만을 두었다고 해

이듬해 84년 1월
육영재단에서 주최한 어깨동무 어린이바둑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되고
전영선 7단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는 결승에 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하필 결승전의 상대가 작년에 이창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긴 류시훈이었어
헌데 이번에는 이창호가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류시훈을 꺾어버리고 우승을 차지하게 돼

이 류시훈도 사실 나중에 프로기사가 되는데

 

 

류시훈 9단

 

프로기사로 입단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7대기전 중 하나인 
천원타이틀 3연패를 이루는 등
프로기사로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게 돼





그리고 석달 후 84년 4월에

또다른 커다란 운명을 만나게 되지

바로

 

 

조훈현 9단

바둑인생 최대의 스승, 조훈현 9단을 찾아가게 돼
프로기사였던 전영선 7단은 이창호의 기재를 꽃 피우기 위해선
반드시 조훈현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해
결국 조훈현을 찾아가게 되고 내제자로 들일 것을 부탁해

하지만 당시 조훈현은
국내 기전을 모조리 휩쓸며
한국 바둑의 최정상을 달리던 1인자였어
조훈현은 전영선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고 말지

 

 

당시 조훈현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아홉점을 접어줄 정도로 클라스있는 분이었어...

한창 바둑기사로서 왕성히 활동해야 할 30대에
제자를 들인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그건 조훈현에게도 이창호에게도 독이 될 수 있는 선택이었으니까
조훈현은 너무 바빴고 이창호를 돌볼 겨를이 없을 것 같았어

얼마 후 전영선에 이끌려
조훈현은 전주로 내려가게 돼
이창호를 다시 보기 위해서 였지
전주 이창호의 집에서 다시 한 번 석점 지도대국을 두었는데
여기서 조훈현이 지고말아
서울에서 처음만났을 때는 조훈현이 석점으로 이겼었거든

며칠만에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어
조훈현, 최강중의 최강 조훈현을 상대로
석점으로 지던
국민학생이 석점 접바둑을 이기게 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을 수 밖에


 

 

 

당시 조훈현이 회상하는 이창호의 첫 인상은
확실히 '천재'는 아니었어
날렵함을 중시하는 조훈현에게 있어
외모적으로나 기풍으로나 이창호는 날렵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묵직함이 있었어
오히려 프로기사인 자신보다 더한 묵직함을
어린 국민학생으로 부터 느낄 수 있었다고 해

결국 고민끝에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고

 

 

 

 

이창호는 조훈현의 손을 잡는다






이창호는 조훈현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게 돼















 

 


자 여기까지가 1편이야

 

그럼 2편 시작한다!!

1편 마지막 부분에서 한국으로 떠났던 조훈현은
막상 한국에 돌아와보니 바로 입대를 할 수는 없는 처지였어
영장은 나왔지만 대기기간이 1년이상 돼서
72년도에는 바로 입대를 하지 못해

워낙 어려서 일본으로 떠나서인지 어느새 한국어도 서툴어져 버렸고
오히려 조훈현에게 한국은 낯선 환경이 되어버렸어
일본기원에서 5단까지 승단하고 돌아온 것을
인정받아 한국기원에서도 5단으로 인정해주지

그당시 70년대 한국에서는 이제 막 바둑이 널리 보급되어 
프로바둑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절이었기에
조훈현은 국내기전에도 참가하게 되는데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못하고 번번히 탈락하는 수모를 당해
일본에서는 승승장구였지만 정작 한국에 와서는 유학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자
조훈현을 예의주시하던 한국바둑계에서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되지

아마도 갑작스런 스승의 죽음과 낯선 환경, 주위의 큰 기대 때문에
조훈현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을 거야
결국 조훈현은 그러한 1년간의 힘든 시기를 보내다
이듬해 73년 8월 조훈현은 공군에 자원입대를 하게 돼

기다렸다 육군에 입대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병역을 해결하고 싶었던 조훈현은 자원입대를 신청한거야

자대에 배치된 후 차민수 初단과 만나게 되는데
차민수는 예전에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이야
이병헌이 주인공이었던 드라마였지
드라마에서는 아마 바둑에 대한 이야기가 안나왔던 것 같은데
차민수는 사실 국내바둑 프로기사였어

어쨌든 같은 프로기사를 만나게 되었으니 조훈현과 차민수는 친한 친구가 되었지
그렇게 군대에 적응을 하게 되고 어느새 짬이 찬 조훈현은 국내기전에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는데

 

 

 

1976년 국내 최고 타이틀전인 국수(國手)전에서 하찬석 9단을 상대로
타이틀을 빼앗아오게 돼
(국수전은 현재에도 최고 최대의 한국 전통의 타이틀전으로서 국내기전 중 가장 높은 명예를 상징해)

사실 하찬석 9단 또한 15세때 일본 기타니 도장에 들어가 7년간 수학하고 돌아온
바둑천재였어 그런데 그러한 한국 바둑의 최정상을 군인 조훈현이 꺾어버린거지

바야흐로 조훈현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어
입대전 까지 한국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던 조훈현이
군인 신분으로 참가한 국수전에서 당당히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니
한국 바둑계는 술렁일 수 밖에 없었지

다들 조훈현은 끝났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얼마뒤 76년 왕위전에서는 숙명의 동갑내기 라이벌 서봉수 9단을 처음으로 만나게 돼
왕위전의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서봉수9단을 상대로 승리하며 왕위전 마저 가져오게 되지
 

 

서봉수 9단

조훈현 9단을 이야기 하면서 서봉수 9단을 빼놓을 수는 없어
조훈현 9단과 동갑내기 인데다
유학파인 조훈현과는 다르게 스승도 없이 혼자 독학으로 바둑을 배워
바둑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조훈현과 대조점을 이루지
때문에 별명으로는 '야전사령관' '된장바둑' '잡초바둑' 등
최초의 한국 정통의 바둑 고수라는 인식이 강해

어찌보면 조훈현보다도 더 대단한 천재라고 할 수 있지만
조훈현에 가려 빛을 많이 못 본 케이스야
스승도 없이 혼자 힘으로 9단의 경지에 이른건 정말 대단한 거지

사실 현재까지 조훈현 9단과의 상대전적은 많이 밀리지만 
중요한 대회 마다 연승가도를 달리던 조훈현 9단의 발목을 붙잡으며
고배를 마시게 했던 천적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야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은 한국 바둑계의 양대 산맥인데
사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
지금도 시니어 기전에서 만나면 대국후에 복기를 하지 않을 정도거든
아무리 작은 대회의 예선 대국이라도 심지어 연습대국에서도 
프로들은 대국후에 복기를 하며 서로서로 바둑에 대해
토의를 하게 되어있어
바둑이란 한 번의 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구를 하며 더 좋은 수와 또 더 좋은 수를 찾아가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마저도 하지 않아
얼마전 '한국 바둑의 전설'이라는 이벤트 성 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조훈현과 서봉수는 대국 후에 복기를 하지 않고 곧장 대국장을 떠나며
많은 바둑 팬들에게 아쉬움을 줬어

사실 후배 기사들과 팬들의 입장에서 이런 한국 바둑계의 거목 둘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보기 좋지 않아

어쨌든 본문으로 돌아와서
조훈현은 군 전역 후
76년부터 77년까지 조훈현은 44승 1무 7패로
7개의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31연승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한국 바둑계를 평정하게 된다

1978년 조훈현은 한국 바둑계를 평정하고 다시 일본땅으로 건너가
스승 세고에 겐사쿠 9단의 7주기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어
일본 바둑계에서는 조훈현이 아주 반가운 인물이었지
그는 한국기원 소속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본기원 소속의 5단이었으니까

일본기원의 프로기사 5단이 한국 바둑계를 평정해버린건 일본 바둑계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높이는 일이었기에 일본 바둑계는 돌아온 조훈현을 위해
기념대국 자리를 마련해
당시 기성전 타이틀 보유자인 스승 후지사와 슈코 9단과의 기념대국 이었어

조훈현은 흔쾌히 승낙했고
결과는 조훈현의 불계승(계산하지 않고 승리한다,상대가 항복을 선언한 것)
친선대국이었지만 일본바둑계는 어느정도 위협을 느꼈던 것 같아
얼마 뒤 일본기원은 고바야시 당시 8단과의 친선대국도
주선했는데 여기서도 조훈현이 불계승을 거두게 돼

 

(좌)고바야시 고이치 9단 (우) 조치훈 9단
둘은 일본 바둑 계의 숙명의 라이벌이야

당시 후지사와 슈코와 고바야시 당시 8단은 일본의 최정상이었거든
그런데 이 둘이 모두 조훈현에게 무너져 버린거야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여기서 조훈현에게 군 전역 후에 
왜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이야기를 해
그도 그럴것이 이정도 실력이라면 조훈현은 일본에서도 대성을 거두었을 거야
당시에는 3살 아래였던 조치훈이 타이틀을 거머쥐기 시작하며 
일본 바둑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시기였으니까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못마땅했던거야

 

 

날카로운 눈매가 반상을 뚫을듯 아주 매섭다

그러나 다시 한국에 돌아온 조훈현은 79년도에 서봉수 9단이 가지고 있던
명인 타이틀을 제외한 모든 타이틀을 휩쓸었고
최우수기사상,최다연승상,최다승기록상,승률상 등 받을 수 있는 모든 상도 다 받아버려..ㄷㄷ

한국 바둑계는 최강자의 등장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
누군가 대적할 만한 상대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최정상이라 군림하던 기사들이 전부 상대도 되지 않고
조훈현 앞에서 맥을 못췄으니까

다만 희망은 명인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서봉수 뿐이었어
서봉수만이 조훈현으로부터 유일하게 타이틀을 지켜냈거든

그리고 1980년 조훈현은 미국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당초 본인은 잠시 휴식을 위해 여행을 계획했으나 
결국 미국에 가서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둑 관련 행사에 줄곧 참석하며 바둑 홍보만 줄창하게 돼

당시 미국에서는 바둑이라는 동양의 보드게임이 한창 붐을 일었는데
주로 체스를 두던 서양인들에게 바둑은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 것 같아
그러다 한국의 바둑 챔피언이 미국에 왔다는 것이 미국신문에 보도 되면서
미국 아마추어 16인과 동시에 두는 다면기(한명의 고수가 여러 하수들을 상대로 동시에 바둑을 두는것)도 두고
결과는 15승 1패로 약간 자존심을 구겼다..ㅋㅋ이런건 다 이겨야 본전인데

그리고 유명한 일화가 여기서 탄생하게 되는데
어느날 미국의 체스클럽에 방문하게 된 조훈현에게
클럽관계자가 미국 체스 챔피언과의 체스대결을 권했어
조훈현은 미국에 가기 전까지 체스라는 게임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그 날 처음 체스를 보게 되었다고 해
룰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미국 챔피언이 두는 것을 옆에서 몇번 지켜본 뒤
두 판을 두었는데
첫 판은 깔끔하게 조훈현이 패배한다
하지만 곧바로 조훈현은 한 판 더 두자고 제안하고
두번째 판에서 통렬히 미국의 체스 챔피언을 꺾어 버려
 

 

여기서 미국인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어
동양에서 온 바둑 챔피언이 갑자기 미국 최고수를 꺾어버렸으니까
당시를 회상하던 조훈현은 
'그저 구경하면서 수를 몇가지 생각해뒀는데 상대가 그대로 두어줘서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밝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81년도에도 여전히 그 실력을 과시하는데 그전보다는 승률이 약간 떨어져
그전까지는 80%대를 유지하던 승률이 81년도에는 72%까지 떨어진거지
물론 이것이 나쁜 승률은 아니지만 조훈현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야
이건 조훈현의 문제가 아니라
라이벌 서봉수의 약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그때부터는 늘 국내기전의 타이틀전은 조훈현과 서봉수의 차지였으니까

81년도에는 전두환의 제 5공화국이 출범했던 시기인데
정치계 인사들은 당시 일본 최대기전인 명인타이틀을 거머쥐며 일본바둑의 최정상으로
올라선 조치훈과 한국 최고 조훈현의 친선매치를 주선하고자 해
한국에 있었던 조훈현은 정치권의 압력을 이겨낼 수 없었지만
일본에 지내던 조치훈은 정치적인 압력으로 바둑을 둘 수는 없다며
친선경기를 거부하고 말아 그래서 결국 둘의 조우는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 조훈현은 한국바둑계의 최강자로 우뚝섰고
1984년 
다시 한 번 운명적인 만남이 조훈현을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내제자 '이창호'와의 첫만남이었어

 

 

이창호 9단

이창호 9단 역시 조훈현 9단의 인생을 이야기 하는데
빠질 수 없는 인물 중에 한명이야
조훈현이 키워낸 유일한 제자이면서 세계 최강 조훈현의 자리를 이어받은
한국 바둑계의 가장 위대한 프로기사이니까
나는 사실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세계 최강의 명맥을 잇는
기사들 중에 이창호가 최고라고 생각해

조훈현과 이세돌은 스타일이 어느정도 비슷한데
전투를 통해 난전을 즐기면서도 빠르게 두고 행마또한 경쾌하고 빠르지
하지만 이창호는 정반대야 두텁게 두고 오래 생각하며 싸움을 즐기지 않아
물론 싸움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쪽을 택해
상성상 이창호의 스타일은 조훈현과 이세돌의 스타일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어
전성기 시절 임팩트도 그렇고 전성기의 조훈현을 내리막으로 걷게 만든 것도 이창호였고
이세돌의 무서운 성장을 늦추며 꿋꿋이 정상을 지켜왔던 것도 이창호였기 때문이야

무려 15년 동안이나 세계 최고 자리를 지켜냈으니
이정도면 조훈현이 제자 하나는 기똥차게 키워냈다고 할 수 있지
조훈현의 최대업적이 이창호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으니까

 

 

어렸을 적 이창호는 소문난 우량아였다
우량아 선발대회에서도 우승한 경력이 있다고 하네


어쨌든 84년 당시 
초등학교 3학년(10세)이었던 이창호를 만나게 된 조훈현은
두점 접바둑을 두게 되는데
전영선 당시 7단을 통해 전주에서 금은방을 하던 이창호의 아버지 이재룡씨가 조훈현 9단에게
아들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게 돼
하지만 조훈현은 그당시 제자를 받아들일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어

보통 제자를 들인다는 것은 어느정도 일가를 이룬 뒤에
본인의 입신양명 보다는 후학의 양성에 매진하는 황혼기에나 할법한 일이니까
최정상 바둑기사로서 바쁜 삶을 살아가던 조훈현에게는 무리였던 것이지

하지만 전영선 7단은 조훈현 9단에게 정말 간곡히 부탁을 해
자신이 기본은 가르쳤으나 이 아이의 기재를 모두 감당해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반드시 조훈현 9단이어야 한다고 제발 받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거야

조훈현은 이창호와의 지도대국에서
이창호의 기재를 어느정도 파악했기 때문에 이말에 수긍을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창호는 조훈현과 같은 이른 시기부터 빛을 발한
천재형의 기사는 아니었다고 해
분명 소년의 바둑에서는 힘이 느껴졌지만 뛰어난 총기가 느껴지진 않았어

대신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진중함과 무게감이 느껴졌다고 해
그리고 당시 조훈현의 아내인 정미화씨는 이창호를 들이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신혼집에 서로 간에 아이도 없는 마당에 초등학생 아이를 맡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젊은 새댁 입장에서 큰 부담이었을테고
남편의 일에 방해가 될까 우려가 컸을테지

나중에 이창호가 성장해서 스승인 조훈현의 타이틀을 죄다 빼앗아 갈때마다
조훈현의 아내는 이창호가 죽일듯이 미웠다고 해
대국이 있는 날이면 이창호를 차로 태워 대국장까지 직접 바래다 주었는데
자기 손으로 키운 자식 같은 아이가 자기 남편의 앞날을 번번히 가로 막는 걸 보고
가슴이 찢어 졌다네
어느정도 그 마음이 이해는 갈 것 같아

결국 고심끝에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아마도 조훈현은
이창호의 아버지 이재룡과 전영선의 모습에서
과거 조훈현을 의탁하던 아버지 조규상의 모습을 보았고
이창호를 보며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싶어
결국 자신도 무일푼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세고에 겐사쿠 9단과 후지사와 슈코9단을 만나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으니 그 재능을 이제는
나누어야 겠다고 생각했을 거야

이 결정은 곧 한국 바둑계의 큰 이슈가 된다
지금으로 따지면 메시가 제자를 들인 느낌이랄까..?ㅋㅋ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했어 도대체 왜
그것도 이 타이밍에 제자를 들였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할 시기인데 제자를 들이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어

그무렵
조훈현은 화곡동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알다시피 조훈현은 흙수저 출신이었기에 자신이 상금으로 벌어온 돈 말고는
집에 돈이 있을리 만무했고 화곡동의 국민주택에 살고있었어
조훈현의 부모님 두분을 모시며 아내 그리고 제자로 들어온 
이창호까지 함께 살기엔 너무 집이 좁아
큰 맘 먹고 연희동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연희동은 그당시 돈 깨나 쓴다는 부자들이 사는 부자동네 였거든
때문에 조훈현이 상금으로 많은 돈을 번 것은 사실이지만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과 맞물려
이창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어
전주 부호의 아들이다
조훈현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제자로 들어갔다
정치권의 줄이 있다 등등
안좋은 소문이 무성했지
하지만 어린 나이의 이창호는 이런 소문들을 알리가 없었고
조훈현의 집에서 수학하며 바둑 실력을 쌓아가게 된다

알다시피 이창호는 어린시절 바둑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할줄을 몰랐다고 해
심지어 혼자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비누거품을 묻혀 그냥 나오기 일쑤였고
초등학생인데도 신발끈도 제대로 묶을 줄을 몰라 매일 끈이 있는 신발은 끈을 밟아
끈이 전부 해져버렸다고 해
그래서 결국 조훈현의 아내는 끈이있는 운동화는 사주지 않고
늘 찍찍이가 달린 운동화만을 신겼다고 하지ㅋㅋㅋ
공부도 그냥 평범했고 오직 바둑만 두고 바둑만 좋아하는 과묵한 아이였다고 한다

연희동 입성 2년 차에 이창호는 만 11세의 나이로 입단대회를 통과하게 돼
스승보다는 느리지만 11세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야
본격적으로 프로무대에 발을 담게 된 것이지
과연 조훈현은 이때 이창호가 지금처럼 크게 성장할 것을 예측했을까?
아마 못 했겠지 이창호는 총명하고 튀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또다른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후 1985년 조훈현은 다시 한번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중국의 최강자 였던 불세출의 바둑천재 녜웨이핑과의 일전을 위해서 였다
 

 

 

녜웨이핑 9단
 

생긴건 이래뵈도 중국에서는 아직도 역대 최강자 하면 이름이 빠지지 않는
최고수 중의 고수다
조훈현과는 동시대에 활약했고 후에 언급할 
조훈현의 일생 최대 도전이었던 '제 1회 응씨배'결승전의 상대이다

어쨌든 85년도 까지는 바둑은 국가별로 프로기사 제도를 운영할 뿐 서로
만날 수 있는 국제기전은 전무했다
물론 친선경기로서 경기가 열린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세계대회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바둑팬들은 서로 제 나라의 최강자가 세계최강이라고 변론하기 바빴다

아무튼 미국에서 만난 조훈현과 녜웨이핑은
첫 날 조훈현이 백을 들고 시원한 불계승을 거두며 기세를 세웠지만
다음날 흑 불계패를 당하며 승부는 1승1패로 균형이 맞았다

조훈현은 2판의 대국 후에
'녜웨이핑의 완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히며
녜웨이핑을 인정해주었어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또한 엿보였지

이 친선경기 후에 곧바로 85년도 부터 중일슈퍼대항전이라는 교류전이 생겨난다
이 곳에서 녜웨이핑은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본의 고수를 홀로 연파해
1회 대회 부터 3회로 이어지기 까지 11연승을 거두며 단 한판도 지지 않고 일본의 대표 기사들을
모조리 꺾어버린다
중국에서는 드디어  중국바둑이 일본을 넘어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섰다고
대서특필을 하게 되지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가 얼마나 저평가 되어있었는지는 교류전에
우리나라가 애초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한,중,일 중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조훈현 말고는 별볼일 없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팽배해 있었거든

때문에 이를 지켜보며 조훈현과 한국 바둑계의 자존심이 많은 상처를 입게 돼

 

 

 

 

그리고 1988년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이 때
이창호가 프로입단 뒤 처음으로 스승 조훈현의 최고위 타이틀전 도전자로 올라서게 된다
조훈현은 제자의 빠른 성장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른 중견기사들이 이창호에게 맥을 못추고 무너졌다는 것에 씁쓸하기도 했을 거야
한국 바둑의 선수층이 이만큼 얇다는 반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이창호는 조훈현을 넘어서진 못했어
이창호는 조훈현에게 패배하게 되지
 

 

 

그리고 바둑을 사랑했던 대만출신 중국의 성공적인 사업가 잉창치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바둑대회를 이듬해 개최할 것을 공표했고
이건 첫 세계 바둑대회가 탄생하게 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물론 잉창치의 발표를 보고 위기를 느낀 일본이 다른 나라에 첫 세계대회의 타이틀을 빼앗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하여 88년도에 급조하듯 만든 대회가 바로 후지쯔배)




그리고 대망의 1989년

중국 북경의 샹그리라 호텔에서 열린
우승상금 40만 달러, 총액 100만달러 규모의 바둑 올림픽!
'잉창치 배 세계 바둑 선수권대회'(이하 응씨배)가 열리게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출전 시드가 한 장이 배정이 돼

일본과 중국은 대여섯명씩 출전한 것에 비하면
한국을 대놓고 무시한 처사라 할 수 있지
이에 한국기원 측은 주최측에 엄청난 항의를 했지만
주최측은 꼬우면 불참하세요 하면서 그냥 씹어버렸다;;
결국 한국 대표로 조훈현은 이 제 1회 응씨배에 출전하게 되고
조치훈 또한 출전하지만 일본기원 소속이었기에 공식적으로는 일본대표이다 
조치훈은 8강에서 중국의 강호 녜웨이핑을 만나 패배하고 말아
그리고 녜웨이핑은 4강에서 조훈현의 스승인 후지사와 슈코를 연달아 제압하고 결승에 오르는데

 
 

 

반면 조훈현은 
16강에서 중국의 왕밍완, 8강에선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4강에서 일본의 린 하이펑 등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올랐어

그리고 결국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망의 결승전

중국의 최강자와 한국의 최강자가 다시 한번 맞붙게 되었지
지금까지 상대전적은 미국에서의 친선 경기 1승1패로
누구의 우위도 점할 수 없는 호각이었어
하지만 외신들은 녜웨이핑의 압승을 예상했지

그동안 최강으로 군림했던 일본바둑계를 단신으로 제압한 녜웨이핑이었고
중국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이니만큼 홈그라운드의 이점또한 있었으니까
당연히 녜웨이핑의 우승이 예상됐어
조훈현은 예상을 깨고 결승전에 올랐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무시하기 바빴지

이러한 악조건 속에 조훈현 9단은 결승전 제 1국에 나서게 된다
 

 

 

조훈현 담배피는 모습


90년 이전에는
대국중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조훈현은 지금은 담배를 끊었지만 10년전까지만 해도 소문난 애연가였고 대국중에 늘 담배를 태웠어
젊었을 때는 하루에 세갑씩 폈다니까 ㄷㄷ하노...
이창호가 어린시절을 회상할 때 스승님의 모습은 기다란 언제나 기다란 장미담배를
들고 담배를 피우시는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네
연희동 자택의 지하에는 장미 담배 수백보루가 쌓여있었다고 해ㅋㅋㅋㅋ


아무튼 제 1국은
중국의 항저우에서 열렸다
그전까지의 대국은 모두 북경의 샹그리라 호텔에서 열렸지만
결승전부터는 대국 장소를 옮긴다는 것이었다
첫 세계대회였던지라 준비도 미흡했고 결승전을 어느나라에서 둘것이냐를 두고도
한국기원과 주최측과 마찰이 있었고 아무튼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1국에서 백을 잡은 조훈현은 특유의 빠른 행마로 상대를 어지럽게 했다
하지만 녜웨이핑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으므로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
조훈현이 특유의 행마로 난전을 유도했으나 녜웨이핑은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두어갔다
접전의 접전끝에 결과는


'조훈현의 3집 승'

첫 대결을 기분좋게 승리로 시작한 조훈현은
타국에서 큰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한편 큰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던 녜웨이핑은 어이없이 첫판을 내주자
망연자실한 모습이 역력했고
녜웨이핑의 압도적 승리를 점치던 외신들의 분위기도 싸늘해졌다

한국을 무시하던 중국을 상대로 보기좋게 한방을 먹이고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제 2국

2국도 쉽게 끝나진 않았다 하지만
전 날의 패배에 절치부심한 녜웨이핑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조훈현이 패배하고 말았다
이로써 승부는 1:1 다시 원점
또다시 승부는 예측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제 3국은 3일을 휴식한 뒤 이어졌다

5판 3선승 제의 5번기에서
1승1패로 동률을 이룬 상황
조훈현과 녜웨이핑 서로 물러날 수 없는 승부였다
승부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있는 3국에서 조훈현은 3집 패배를 당한다
1국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던 한국의 기자들은 어찌할 줄 몰랐고
조훈현 또한 승부의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된 상황에 괴로웠다




그리고 4국이 벌어지기 전 전야제에서 녜웨이핑은

 

 

 

'중국인이 주최한 세계 최대의 대회에서 중국인이 우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목표는 우승컵이다'
라는 당찬 소감을 밝혔고

 

 

 

'비록 열세에 몰렸지만 한국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5국까지 갈 수 있도록 두겠다'
라며 각오를 불태웠어


그리고 이어진 제 4국

 

 

 

흑번을 쥔 조훈현은 2국의 초반 양상과 똑같은 포석을 두었다
2국은 조훈현이 패배했던 대국...
지켜보던 사람들은 패배한 바둑을 다시 들고 나왔다며 조훈현의 행동을
의아해 했지만 조훈현은 묵묵히 자신의 바둑에 집중했다
15수째 까지는 2국과 똑같이 두어갔지만
먼저 바둑을 비튼 것은 조훈현이었어
진 바둑을 똑같이 가지고 나올리가 없었던 거지
하지만 녜웨이핑은 강했고 바둑 내내 반상을 주도했던 것은 녜웨이핑...
결국 바둑은 다시한번 계가까지 가서야 끝이 났는데
흑의 한집 승...

결과는

'조훈현의 한집승'이었다!!

승부는 다시 2:2로 원점으로 돌아갔고 조훈현의
각오대로 결승국까지 가게 되었다

오히려 기세로 수세에 몰린 것은 녜웨이핑 쪽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까지 자신을 몰아붙일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녜웨이핑은 당황하고 있었다

결국 대망의 제 5국...
 

 

 

조훈현은 한번 더 2국과 4국의 포석과 같은 포석을 들고 나왔다 
초반 전략은 귀의 실리를 단단히 챙겨나가는 것
한번은 승리를 했고 한번은 패배를 했던 작전을 한 번 더 들고나온다는것은
사실 생각하기 힘든 수였지만 녜웨이핑은 이정도에 당황할 상대가 아니었고
승부는 오히려 녜웨이핑에 기우는듯 했다

조훈현이 초읽기에 먼저 몰려버린 거야
바둑은 각자에게 몇시간씩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생각시간을 주고
그다음 초읽기를 주게 되어있는데
앞에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쓰게되면 초읽기가 시작이 되고 이 초안에
다음 수를 두지 못하면 지게 되는거야

한마디로 조훈현이 먼저 시간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는거지
이건 전적으로 녜웨이핑의 전략이었어
녜웨이핑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묘한 수들을 들고 나왔고 조훈현이 오랫동안 생각할 수 밖에
없게끔 판을 이끌어 나갔거든

하지만 조훈현은 속기라면 자신이 있었지
초읽기에 먼저 몰렸지만 조훈현은 흔들림이 없었어
오히려 상대를 매섭게 몰아붙였고 열세로 보이던 판도가 다시 조훈현에게로 돌아서는 듯 했다
두텁게 두어가며 흑을 몰아붙이던 녜웨이핑의 백은
어느새 자신의 대마가 흑에 봉쇄당하며 대마가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고

결국 145수 만에 패배를 시인하며
녜웨이핑은 무릎을 꿇고 만다
조훈현은 5국을 흑 불계승으로 마무리하게 돼

그리고
 

 

 

 

 

제 1회 세계 최대 규모의 바둑 선수권 대회를
당당히 우승하고 돌아온 조훈현은 당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나 가능했던
카퍼레이드를 받으며 금의환향하게 돼
정말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수준이었다고 해
이때는 바둑 인기가 엄청날 때 였으니까 말이야

끝~

 

오늘은 전 세계 사람들의 스포츠, 바둑

그 중에서도 한국 바둑의 영웅 조훈현에 대해 아라보자


쓰고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1편 2편으로 나눠 보려고해...

한번에 쓰고 싶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면 여러분들이 읽기에도 부담될 것 같고

쓰는 나도 힘이 들어서..ㅋㅋ

어쨌든 시작한다!!


 

 

젊은시절  여자 깨나 울렸겠다


조훈현은 전남 목포 출신의 53년 생으로 올해 나이 64세를 맞은 노장 바둑기사야


조훈현의 어린시절부터 거슬러 올라 가보자면


조훈현의 아버지 조규상씨는

바둑을 즐겨두던 사람이었어 그리 잘 두는 편은 아니었다고해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7~8급 수준이었다고 하니까


당시 조훈현의 집은 2층집이었는데 

2층은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가 있었어

아버지는 조카사위와 바둑을 두며 담소를 즐겼는데

서너살 무렵부터 조훈현은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걸 옆에서 지켜보며 바둑을 배웠다고 해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한 번도 제대로 바둑을 가르쳐 준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와 조카사위가 바둑을 두는데

4살배기 조훈현이 아버지에게 거기에 두면 안된다고 훈수를 둔거야

아버지는 그말을 무시한 채 그냥 두려고 했던 곳에 두었고

나중에 바둑이 끝난 후 복기(바둑이 끝나면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며 패인을 찾아 연구하는 것)

를 하며 아까 어린 조훈현이 훈수를 두었던 곳이 큰 패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


어깨 너머로 배운 4살배기 놈이 그정도 수읽기를 했다는 것에 아버지와 조카사위 모두 놀랐지


그날 이후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에게 정식으로 바둑을 가르쳐주었고

바둑판 앞에서 만큼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바둑을 재밌어하는 아들을 보며 대견해했어 


어느새 비록 접바둑이지만 아버지를 이길 정도가 된 조훈현은

자신을 기원에 데려가 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댔고

조훈현의 사촌매형인 서울대출신 고등학교 수학교사 박승곤이라는 사람이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아버지, 사촌매형과 함께 어린 조훈현은

당시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유달기원'을 찾아가지


아버지가 어린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기 싫어했던 이유는

당시 기원은 내기바둑꾼들이 우글대는 담배연기 자욱한

시장바닥보다 더한 질 안 좋은 곳이었거든...

아마도 아버지는 조훈현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어쨌든 5살배기 조훈현은 그자리에서

유달기원의 원장과 9점 접바둑을 이겼고

원장은 조훈현에게 특별입장을 허락해 주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기원은 어른들이나 들락날락하는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어린 조훈현도 언제든 기원에 와서 

바둑을 둘 수 있게끔 특별하게 허락을 해 준거지


그러던 중 갑자기 조훈현의 집안의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가 살던 큰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가세가 이렇다보니 아버지 조규상은 바둑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던

막내 조훈현을 반드시 바둑으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에 

시장에 나가 아내와 함께 야채장사를 하며

장사가 끝나면 아들을 데리고 매일같이 당시 서울의 최대기원이었던

명동의 '송항기원'에 출퇴근을 시키게 돼

이때는 아직 한국기원이 만들어지기도 전이라

故조남철 9단이 운영하던 송항기원이 서울에서는 가장 유명한 기원이었어

 

 

 

 

故조남철 9단


잠시 故조남철 9단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조훈현이 한국바둑의 세계적 입지를 넓혔다면

조남철은 한국바둑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초대 국수(國手)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기사이자 일본 최초의 한국인 프로기사야

한국전쟁 후의 혼란했던 한국에 바둑보급을 위해 힘썼던 분이야

한국전쟁에도 참전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 자신이 운영하던

기원이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나기도 했어

오늘날 한국기원을 설립하기도 한 분이고 

한국에 프로기사 제도와 바둑용어 정립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훈현과 같은 시대의 

프로기사인 김인, 하찬석, 윤기현 또한 

모두 조남철의 문하를 거쳤어

한국 바둑계에서 이룬 업적으로만 따지자면 

조훈현, 이창호도 그 누구도 조남철의 발끝도 못 쫓아가지

아무튼 대단한 분이야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그런 한국 바둑의 최강자 조남철에게

조훈현의 지도대국(접바둑으로서 고수가 하수의 기력을 알아보고 지도를 해주는 것)을 부탁하고

목포에서 올라온 바둑신동이 있다는 말에 조남철은 흔쾌히 지도대국을 승낙하지


조남철은 한 눈에 조훈현의 탁월한 기재(바둑을 두는 재능)를 알아보았고

그때부터 기원에 다니며 조남철의 밑에서 바둑을 배우게 돼


그러다 조훈현은 9세의 나이에 

제 16회 한국 바둑 프로입단대회를 통과하고

한국 프로기사로 당당히 입단을 하게 된다

이 기록은 세계 최연소 프로입단 기록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어

보통 프로바둑계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설이 있는데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대성을 하고

2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평범한 기사로 남는다는 거야


이 말은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는 것이

엄청난 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엄청 빠른거지만 조훈현은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프로기사의 레벨에 오른거야

 

결국 조남철은 조훈현의 아버지에게 일본유학을 권유하게 돼

당시 50~60년대 한국은 전쟁 후의 격동의 시기였고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반이 전무했어

조남철 본인도 일본에서 바둑을 배운 뒤 

일본에서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조훈현 정도의 기재를 가졌다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필수라며 조훈현의 아버지를 설득하지


조남철과 같은 선구자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조훈현도 유학을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 불세출의 영웅 

조훈현도 조훈현의 내제자인 이창호도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지..

물론 이건 가정이니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어ㅋㅋ

어쨌든 여기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을 일본으로 보내는 결단을 내리게 돼


그리고 조훈현은 혈혈단신 10세의 나이로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조훈현의 부모는 한국에서 일을 하며 

조훈현의 유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에 함께

이민을 갈 수가 없었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조훈현의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거든

그래서인지 조훈현의 일본유학이 결정되자 조선일보에서는

흔쾌히 조훈현의 항공료를 전액 지원해준다


조훈현은 당초 조남철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기타니9단의 가문의

내제자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일본 바둑계에서 기타니9단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세고에 겐사쿠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게 돼


故세고에 겐사쿠 9단


세고에 겐사쿠9단은 생전에 단 3명의 제자만을 거뒀어

세고에 겐사쿠 문하의 또다른 유명 기사로는 오청원9단과 하시모토9단이 있는데

이 둘은 일본 바둑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설들이야

그 중에서도 오청원 9단은

약 20년 간 일본 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엄청난 사람이야

당시 일본은 한,중,일 중 그 상대가 없을 정도로 바둑 강국이었으니

여기서 20년간 최강자라면 역대급 바둑 기사인거지

결국 세고에 겐사쿠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최강자를

모두 키워낸 인물이 돼


아무튼 조훈현이 일본에 갔을 때 

세고에 겐사쿠는 이미 70세를 넘긴 노인이었는데

제자로 받아달라는 조남철의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조훈현과 시험삼아 지도대국을 두어 본 뒤 기재를 보고 깜짝놀랐다고 해

그 당시 세고에9단은 나이가 너무 많아 은퇴한 뒤

제자를 두지 않고 휴식기를 취하는 중이었던 터라

조훈현을 거둘 생각이 없었으나

조훈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거지


같은 시기 당초 조훈현이 들어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기타니 도장에는

세 살 아래의 조치훈이 바둑을 공부하고 있었어

일본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부터 사실은 일본 최고 최대의 도장인 기타니 도장에

들어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조훈현이 만약 세고에를 만나지 못하고

기타니 도장에 들어갔다면 조훈현과 조치훈, 

쌍조의 만남이 좀 더 빨리 이루어 졌을지도 몰라

조훈현과 조치훈은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젊은 시절 한국의 최강자와 일본의 최강자로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거든


세고에9단은 

한국에서 온 어린 조훈현을 거둬 바둑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친아들처럼 키워

정말 자식처럼 키웠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세고에는 후에 조훈현이 병역문제로 한국으로

떠난 뒤 자택에서 목을 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의 유서에

조훈현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기뻤다고 밝혀...


이게 무슨 뜻이냐면

바둑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걸 일본에 전파해준 것이 그 옛날 백제 사람들 이었거든

천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어쨌든 세고에는 이것이 일본이 한국에

은혜를 입었다고 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어떤 면으로는 침략으로 인해

한국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준 일본의 국민으로서

마음의 빚 또한 지고 있었다고 봐


어쨌든 그렇게 세고에 문하에서 온갖 허드렛일과

바둑공부,학업에 매진하여 일본 유학 3년만에 일본기원의 프로입단대회 또한

통과하고 당시 일본 최연소 입단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돼

당시 나이는 13세...

정말 엄청난 재능이지

그리고 매해 승단대회를 통해 단수를 올려가게 돼




그렇게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실력을 키워가던 중 

조훈현의 바둑 인생 두번째 스승인 '후지사와 슈코9단'을 만나게 된다

세고에 9단이 어린 조훈현에게 진정한 바둑의 의미와 정신적 자세를 가르쳤다면

조훈현에게 바둑의 기술과 실전싸움을 가르친 것이 바로

이 후지사와 슈코 9단이야

 

 

故후지사와 슈코 9단


정상급 바둑기사들은 보통 한두개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후지사와 슈코는 '괴물' '괴물 슈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정상급 기사였어

마르고 날렵한 외모와는 다르게 바둑에서는 엄청난 힘을 구사하며

빠른 계산과 전투로 상대를 압살해버리는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지


우연찮게 슈코의 연구실에 들렀던 조훈현은

후지사와 슈코를 만나게 되고 한국에서 유학온 조훈현의 기재를 본

후지사와 슈코는 빠르고 정확한 조훈현의 솜씨에 감탄하게 돼

슈코는 원래부터 속기를 강조한 '속기파'였거든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늘 속기에 대해 강조를 했다고 해

빠르게 두어야 바둑에 대한 감이 날카로워 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어


그런데 조훈현은 빠르게 두면서도 정확하게 두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

조훈현은 이후로도 후지사와의 연구실에서

바둑을 공부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돼


한 번은 조훈현이 후지사와의 연구실에 찾아간 날

연구실의 멤버였던 아베 요시테루 당시 6단과 만나

당시 조훈현은 2단이었는데 이때가 아베와 명인전 예선에서 만나 이긴 후 였어

조훈현에게 패한 아베가 먼저 내기바둑을 청한 거야

그냥 두면 재미없으니 돈을 걸자는 거였어

하지만 조훈현은 내기바둑을 뒀다간 세고에 스승님께 혼난다며

내기바둑을 거절해

재밌는 건 이 내기바둑을  옆에서 종용한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 슈코라는 거야

슈코는 옆에서 조훈현에게

'선생님이 아실리 없으니 걱정말고 둬라'라는 식으로

조훈현의 등을 떠밀어

조훈현의 바둑에 매료되어 있던 후지사와는 

그런 장난으로 조훈현의 실력을 더 보고 싶었던 거지


마지못해 조훈현은 아베와 백엔짜리 내기바둑을 두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6판을 내리 발라버려

당시 프로 6단이었던 아베는 2단밖에 되지않는 조훈현에게

치욕적인 6연패를 당하고 6백엔을 주게 돼

그런데 결국 이게 세고에 스승의 귀에 들어가게 된거야

6연패를 당한 아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

조훈현이 엄청나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거지


첫번째 스승인 세고에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후지사와는 괴짜에다 털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세고에는 진노했고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조훈현을 집에서 내쫓아버려

그따위 정신상태로는 성공할 수 없으니 한국으로 꺼져버리라는 거야

조훈현은 울고불고 빌어봤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

도쿄거리를 전전하던 조훈현은

한국식당에 들어가 설거지든 뭐든 할테니 받아달라며 부탁을 해


그렇게 접시닦이로 2주일 간 식당에서 일을 하던 조훈현은

주위 바둑계 인사들이 세고에 9단을 거듭 찾아가 조훈현의 입장을 대변해주며

내기바둑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결국 세고에 스승은 의지를 꺾고 조훈현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여


그 내기바둑 6판으로 큰 교훈을 얻게 된

조훈현은 살면서 다시는 내기바둑을 두지 않았다고 해

그 이후로 조훈현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일본 바둑계의 신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지


하지만 스승 세고에 9단에겐 근심이 있었어

그건 조훈현의 군대문제였지

일본과 달리 징병제였던 한국의 사정상

조훈현의 입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어

물론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막 실력이 만개하고 있는 제자를

3년씩이나 군대에 보내는 것은

제자의 실력을 썩힐 수 있다는 걱정때문이었지

스승 세고에 9단은 입대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결과는 헛수고였고 결국 1972년 군입대 문제로

조훈현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세고에 9단은 이때문에 식욕까지 잃고 몸저 눕게 돼

얼마나 조훈현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결국 조훈현의 입대 후 4개월 만에 스승 세고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두가지를 당부하는데

첫번째는 늙은 몸으로 더이상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아 떠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어...


그리고 위에서 말했다시피

조훈현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고 밝혔지


세고에 9단의 정확한 자살 원인은 오직 본인만이 알겠지만

애제자의 군입대와 그의 진정한 성공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








자 여기까지가 1편이야

 


 


 

 

지난 토요일 현지 시각 18:58시 (그리니치시 23:28시) 진도 7.8의 강지진이 남아메리카의 에콰도르의 태평양 연안을 강타했다.

에콰도르 당국은 초기 피해예상으로 77명의 사상자와 600명의 부상자를 예상했으나 현재까지 총 235명의 사상자와 약 15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피해증가의 이유는 부족한 정보와 불정확한 통신때문이라고 정부 당국은 발표했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피해민이 오열하고있다. 출처: 알 자지라 통신)


이 지진은 지난 1979년 이후의 가장 큰 지진이며 특히 서쪽지역및 해안가의 마을들은 심각한 수준의 피해를 입혔고

특히 아름다운 해변과 낚시 명소로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Perdernales 지역과 Portoviejo 지역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진후 Portoviejo시의 사진, 출처: Ecuador Times)


현 에콰도르의 대통령 Rafael Correa는 "현재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자 구출" 이라고 이탈리아에서의 회항도중 트위터로 발표했고

에콰도르의 부통령 Jorge Glas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고있고 구조를 시작합니다" 라고 발표했으며

Perdenales시의 시장 Gabriel Aleivar는 마을들은 충격적이며 절망적이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지역 라디오에서 발표했다.


 

 

 

(Pedernales지역의 현 도로상황. 출처: Ecuador Times)


미국 지질 연구 조사단은 "지진 발생 근원지는 Muisne시의 남동쪽 27 Km 반경" 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태평양 쓰나미 경보 센터는 위협적인 쓰나미가 지진의 후폭풍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에콰도르 정부는 쓰나미 경보 발령을 아직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 에콰도르 당국은 10,000여명의 군병력과 4,600여명의 경찰인력을 피해복구에 총동원하고있다.



 


출처:


알 자지라 통신

http://www.aljazeera.com/news/2016/04/ecuador-earthquake-160417155941087.html


에콰도르 타임즈

http://www.ecuadortimes.net/2016/04/17/portoviejo-and-pedernales-cities-most-affected-by-the-earthquake-in-ecuador/

http://www.ecuadortimes.net/2016/04/17/10000-military-and-4600-police-mobilized-to-areas-affected-by-earthquake-in-ecuador/


BBC

http://www.bbc.co.uk/news/world-latin-america-36065551


 

 

 

 

 

전직 러시아 요원이었던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한 후 푸틴 정권을 강력하게 비난하며 책도 집필하는 등 반정부활동을 하고 있었다. 



 

 

 

2006년 11월 그는 영국을 들린 옛 동료들을 만났고 그들과 짧은 만남을 가진후 헤어진다.



 

 

 그들이 떠난후 리트비넨코는 몸상태가 심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게 된 그는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문제는 리트비넨코를 죽인 어떤 물질의 정체였는데 영국 검찰은 리트비넨코의 소변에서 의문의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다.


 

 

 

그 방사선 물질은 폴로늄210이었다. 검찰은 리트비넨코가 방사성 물질에 의해 독살당했고 판단, 그의 집을 수색하던 도중 의문의 홍차를 발견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홍차에서도 폴로늄210이 검출되었다.


 

 

 폴로늄 210은 굉장히 유니크한 원소. 연간 생산량이 100g도 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물질이다. 이게 대체 왜 영국의 일반 가정집에서...?



 

 

앞서 말했듯이 리트비넨코는 러시아에서 영국으로 망명가 푸틴을 맹렬히 비난했던 러시아의 반정부인사.


 

 

 

 

영국하면 티-타임이지.






당연히 푸틴의 눈엔 리트비넨코가 곱게 보일리가 없고 푸틴은 그를 고통스럽게 죽일 계획을 세운다. 

폴로늄을 첨가시킨 홍차가 영국으로 파견한 자객(?)들에 의해 리트비넨코의 손에 들어가게 한후...

 

 

 

폴로늄의 독성은 매우 흉악하여 희생자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버린다. 리트비넨코 역시 그렇게 죽었을 것이다.

1000만 분의 1그램만 체내에 들어와도 DNA가 훼손 될 수 있으며 100분의 1그램만 체내에 들어와도 2주 내에 죽는다

 

 

폴로늄 210은 매우 강력한 알파선을 뿜어내는데 알파선은 크기 때문에 투과력이 약해 인체에 해를 끼치기가 힘들다. 감마선이 수십 cm 단위의 납을 뚫는데 비해 알파선은 종이 한 장에도 정리 되는 수준이라...


 

 

 

대신 크기 때문에 에너지는 다른 녀석들보다 훨신 강하다. 내부 피폭으로 인체 내에 들어가주면 다른 방사선처럼 세포를 변질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개박살내버린다.


 

 

방사선에 피폭되면 체내의 DNA 결합이 끊기거나 돌연변화되어 암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짐.


 

 

 

인간은 맹독 청산가리에도 쉽게 죽는다. 어차피 죽이는 건 똑같은데, 폴로늄은 다른 맹독에 비해 엄청나게 비싸다. 


 

 

 

애초에 구하기도 매우 힘들어 부르는게 값인 수준. 

참고로 폴로늄의 독성은 청산가리의 수 천억배


 

 

 현대에는 재래식 독의 해독법이 널리 퍼져있어서 잘 대처할 경우 대상자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폴로늄같은 방사능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생명의 설계도인 염색체가 개판이 되어 버리고 몸의 세포란 세포는 다 아작이 나서 어떻게 해야 살지? 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덜 고통스럽게 죽지?가 된다.



 

 

염색체가 조금만 이상하게 태어나도 기형아로 태어나는데 이런식으로 되어버린다면...



 

 

리트비넨코의 시신은 앞으로 수십년간 관을 열 수 없도록 단단히 밀봉되었다고 한다. 죽어서까지 고통받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1867~1934)


 

 

1898년, 퀴리 부부는 우라늄보다도 훨씬 강한 방사선을 방출하는 물질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물질에는 퀴리 부인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이라 이름지어졌다.


 

이런 맹독성 방사능들을 하루종일 만지며 연구하는 그들의 건강 상태가 좋을 리가 없겠지?

 

 

스트레스와 더불어 만병의 근원인 담배에도 폴로늄210이 존재한다. 

폴로늄은 폐암 발병의 1등 공신. 담배안의 폴로늄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만 명 정도가 폐암에 걸린다고 한다.


 

 


 

「아무튼 다시는 내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

 


 

 

 

원소 No.84 폴로늄의 자연에서의 존재량은 극미량이고 반감기(138.401일)도 짧은 편이라 다행히 일상엔 위협이 되지 않는다


 

 

매우 위험하고 독성이 강하고 비싼 만큼 쓰임도 많은데


 

 

 1그람의 폴로늄은 알파 붕괴를 일으키며 500도의 열이 발생한다.

 

때문에 폴로늄은 인공위성의 전지로 이용되며


 

 

원자력 전지의 재료가 되어 많은 원자력 관련 기기들에 사용되고 있다.


 

여담으로 폴로늄을 발견한 퀴리는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조국 폴란드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조국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고 지었는데


 

 

그 폴로늄은 자신의 조국을 지배했던 러시아가 용이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뭔가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