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대한민국 최초 전투 파병부대 '해병대 청룡부대'
월남전 파병부대를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백마부대, 맹호부대를 많이 떠올리십니다. 청룡부대는 해병대 제2사단으로 월남전을 위해 1965년 9월 20일에 여단으로 창설되어 같은 해 10월 9일부터 1972년 2월 24일까지 참전하였습니다. 1981년 4월 16일 사단으로 증편하였습니다. 1987년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됨과 동시에 해군 제2해병사단에서 해병대 제2사단으로 공식 개명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초석을 다지게 해주었던 파병부대 중 하나인 청룡부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파병 일화
미국의 요청으로 파병이 결정되고 박정희 前대통령은 육.해.공 3군 참모총장과 특전사(공수부대)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 놓고 파병을 위해 어느정도에 준비 시간이 필요하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은 '저희는 출전 준비 및 전투태세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3달이면 충분합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뒤에 있던 특전사 사령관은 '저희는 한달 안으로 출전준비를 완료하겠습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해병대 제6대 사령관 공정식 사령관은 아무말 없이 가만히 서있었는데 박정희 前대통령은 '해병대는 얼마나 걸리겠는가?'라고 물었고 공정식 사령관은 '내일 바로 출전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박정희 前대통령은 크게 기뻐하였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전투 파병부대로 청룡부대가 선정이 됩니다 (청룡부대 이전에 비둘기 부대가 파병되었지만 비둘기 부대는 공병과 의무병 중심의 전투부대가 아닌 지원 부대였습니다.) 그렇게 청룡부대는 해병대 제2사단으로 월남전을 위해 1965년 9월 20일에 여단으로 창설되어 자유 월남을 수호하기 위해 떠나게 됩니다.
▣ 청룡부대 용맹함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3일 한국군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부산을 출항하여 10월 9일 베트남의 캄란만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는 캄란과 동바틴 지역을 회복하고 같은해 12월 최초의 여단급 작전인 청룡 1호 작전을 전개하면서 투이호아 지구로 이동, 베트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개척하고 월남의 3대 곡창의 하나인 투이 호아 평야를 확보하여 주민들의 식량 난을 해결해주었습니다.
▲월남에서 격투술 시범중인 해병대 청룡부대
이 외에도 수 많은 작전에 참여하며 혁혁한 전과를 세우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 부터 12년간 점령하지 못 했던 고지를 단 2시간 만에 점령 해버려서 1967년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 르몽드지는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쏟아 붓고 수 천명의 전사자가 나왔는 데도 점령 못한 공산군 요새를 한국 해병대는 2시간만에 점령했다. 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라며 한국 해병대의 용맹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는 본부에 단 3번의 교신을 날리는데 첫번째가 '적 발견 전투 돌입' 두번째가 '고지 점령' 세번째가 '상황 종료 노획 밑 포로 후송, 철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3번의 교신은 월남에서 철수 때 해병대의 슬로건으로 쓰이게 되는데 바로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입니다.
▣ 전설로 남은 전투
한국 해병대, 월남 전에 빠질 수 없는 전투가 바로 짜빈동 전투입니다. 1967년 2월 15일 새벽, 청룡 제 11중대는 월맹 정규군 2개 연대와 지방게릴라 1개 대대의 인해전술에 의한 야간 기습 공격을 받게 되지만 4시간의 사투 끝에 적을 저지, 섬멸 시켰고 당시 외신 기자들이 '신화를 남긴 해병'으로 대서특필하여 극찬합니다. 이 전투의 놀라운 점은 적 2개 연대를 한국 해병대 1개 중대로 궤멸 시켰다는 점인데 더 놀라운 점은 항공지원 없이 한국 해병대의 포병 지원만을 받고 싸웠다는 점입니다.
▲이 유명한 사진은 해병대 청룡부대의 통신병 청룡 (사진의 주인공은 청룡 2여단 1대대의 박명수 하사로 철모 외피의 저 글씨들은 당시 한국군의 복장 군기로 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사진인데 실제로 저격당하여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이후 부대장이 특별히 허가해 준 것이라고 합니다. 철모에 적힌 다만 보고 싶은 울산 큰애기 순이씨는 귀국했더니 이미 다른 데로 시집가 버렸고 그 뒤에 다른 분을 만나 백년해로 중이시라고 합니다. 2017년 현재 생존해 계시며 사진의 철모도 보관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화염방사기 3문, 대전차포 6문, 경기관총 2문, 4.2인치 중박격포 1문, 75mm 무반동총 7정, 수류탄 350발, 아군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전공을 올렸으며 이에 따라 제 11중대는 미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수상하고 제 11중대 사병 전원 1계급 특진에 당시 중대장과 제 1소대장은 태극 무공훈장을 수상하게 됩니다.
청룡부대는 1965년 부터 1972년까지 7년간 여단급 작전 55회, 포로 715명, 귀순 590명, 용의자 체포 2669명, 개인화기 4055정, 공용화기 노획 239문등의 전과를 올리며 귀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귀국 후 월남전의 실전경험과 전술교리를 바탕으로 서부전선의 전략 요충지인 김포, 서해 5도 해상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을 요청하거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
- 미국 하원의 증언록에 실려있는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 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 미국 에반스빌 저널, 196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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