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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월남전 안케패스 전투는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치룬 전투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이자

 

 당시 구정공세이후 유일하게 연합군이

 

선전하여 전과를 냈던 전투입니다.

그리고 한국군에겐 몇 안되는 북베트남

 

정규군(NVA)과의 전투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습니다.

 

▲베트남산길을 오르는 국군 육공트럭행렬

 

베트남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1번도로에서 갈라져

 

나와 베트남의 항구도시 퀴논에서 캄보디아

 

국경지대까지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19번 도로입니다.

 

19번 도로는 내륙지방의 플레이쿠에 주둔하고있던

 

월남군 제2군단의 유일한 보급로로써 전력적

 

가치가 매우 높았습니다.

 

▲월남군 배치도

 

이곳은 원래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1970년

 

미군들이 철수함에 따라 맹호부대 수도사단

 

기갑연대 예하 1중대가 인수받아 수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였습니다.

 

 

1중대는 638고지 부근의 완반한 구릉에

 

기지를 설치하고 안케패스의 안전통행을 감시하고

 

있었으나 이등른 중대기지보다 높은 638고지에

 

기지를 설치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화근을 불러을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1972년 3월말 월맹군의

 

'춘계 대공세'의  일환으로서 월맹군이 이곳을

 

공격목표로 삼았습니다.

 

 

1972년 4월 11일 새벽 1중대 기지에

 

분대규모의 베트콩들이 출몰하여 습격을

 

가해왔으며 그 날 오전에 플레이쿠로 가던

 

화물트럭 한대가 안케패스 도로상에서 폭파되자

 

1중대가 638고지에 적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그 곳을 수색 매복함으로써 안케패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전투는 중대규모로 벌어진것이였습니다.

 

매복수색이 의외로 강력한 저항을 받아 중도에서

 

돌아오게 되었고 다음날 19번 도로상의

 

교량 및 도로 몇군데가 추가로 차단되었으며

 

중대기지 역시 82mm 박격포와 B-40 적탄통

 

75mm 무반동기관총 공격을 받자 당시 

 

기갑연대장은 적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색중대와 1대대3중대를

 

 안케패스에 투입하였습니다.

 

전투로 쑥밭이 된 안케고지의 19번도로

 

그러나 이들 역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전투는 중대규모에서

 

대대급의 작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지만 하더라도 적의 규모를 불과

 

중대급으로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판하에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을 교유의

 

건제를 유지하지 않고 혼성편성하여 순차적으로

 

적진에 분산투입됨으로써 아군의 피해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심지어 주월 야전사 부사령관과 사단장이 1중대

 

기지를 순시하는 도중에 82mm박격포 공격을

 

받아 부랴부랴 헬리콥터를 타고 사단사령부로

 

돌아가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수도사단 정보처는

 

적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있었는데

 

전투개시 5일동안 포로는 물론이고 적의 시체조차

 

습득하지 못했으므로 적의 규모나 상대의

 

부대소속조차 모르고 있엇다고 합니다.

 

다만 월남군 22사단 47연대가 정보를 입수하여

 

월맹군 제3사단 12연대라는 첩보를 제공하였는데

 

사단이나 연대에서는 이 통보를 과장된

 

허위정보로 치부해버립니다.

 

 

거듭된 공격과 공중폭격,포병사격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케패스 차단으로인해 보급이 차단된 월남군

 

제2군단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마침내 작전은

 

연대급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작전은 강력한 화력지원하에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월맹군의 화력도 만만치

 

않아서 82mm박격포나 75mm무반동총으로 인한

 

아군의 피해도 많았으며 그들의 엄격한

 

사격군기라던지 갈증과 배고픔을 견디며 전투를

 

수행하는 인내심은 주목할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월남전당시 씨레이션 전투식량

 

작전기간내내 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마침내는 사단장이 돌파구를 열지 못하면

 

해당 지휘관을 지휘조치하겠다는

 

경고까지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격전끝에 마침내 아군은 안케패스

 

주변의 주요 고지와 거점을 점령하였고

 

맹호 기갑연대 제3대대가 잔적 소탕을 실시하는

 

가운데 APC 4대가 안케패스를 지나 적의 저항을

 

받지않으면서 연대 전술지휘소가 있는 '빈케'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19번도로 개통을 확인하고

 

16일간에 걸친 맹호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월맹군

 

3사단 12연대 및 지방 베트콩들간에 벌어진

 

안케패스 전투는 끝나게 됩니다.

 

▲안케패스 전투 승리로 월남

 

19번도로를 달리는 아군 육공트럭

 

안케패스 전투는 주월 한국군이 실시하였던

 

모든 단일 전투 가운데 최대의 인명피해를 기록한

 

전투이자 가장 치열한 격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으로서는 병력의 혼합편성,단조로운

 

공격패턴,적규모를 오판하고 병력을 집중운용

 

하지 않은점 등이 있습니다.

 

 

전과 : 적사살705명,개인화기70정,공요화기13문

 

손실 : 전사75명 부상109명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임동춘 대위(당시중위)의

 

업적을 기리어 2008년부터 육군에서는

 

모범소대장들을 대상으로 '동춘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습니다.

 

▲안케고개마루에 세워져있던 전승비

 

여기는 자유의 십자군 대한의 건아들이

피흘려 싸워이긴 영원히 기념해야할 성지다.

1972년 4월 월맹군의 대공세에 의하여

월남 전역이 풍전등화의 위험을 고할 때

주월한국군 예하 맹호사단은 이곳 안케패스에

침공해 온 월맹 정규군 3사단 12연대의 주력을

완전 섬멸시킴으로써 월남전사에 길이 빛날

전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적은 중부고원지대를 점거할 목적으로

군사요충인 안케패스 맹호기갑연대 전술기지에

4월11부터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 전투는 4월26일까지 만15일간 638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피아간 시산혈해의 작전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악전고투는 생지옥을

방물케 하였다.

 

그러나 상승 맹호의 대한건아들은 우방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피 흘려 싸워 이김으로써 편재상 중부월남의

생명선의 19번 공로를 재개통시켰고 불리한

월남 전황가운데 유일의 최초 승리를 거둠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승리의 이면에는 우리 맹호건아들의

고귀한 젊은피가 이 땅에 수없이 뿌려 졌음을

한-월남 양 국민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먼 이역땅에서

평화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산화해 간 여러 전몰

장병들의 충혼을 길피 추모하고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고자 주월 한국군 맹호사단의 이름으로

이곳에 전승비를 세운다.

 

1972년 10월 1일

 

 -전승비에 새겨진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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