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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육군 소속의 항공부대로 출발한 우리 공군은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인수한 후 육군항공사령부로 개칭하여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 창설이라는 숙원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의 헌금으로 도입한 건국기가 대한민국의 영공으로 날아올랐습니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기관총조차 설치되지 않았던 20여대의 훈련기로는 우리 공군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전쟁-공군T-6 건국기 편대비행)

 

하지만 우리 공군은 우리나라 영공을 포기할 수 없었고 T-6를 개조해 폭탄을 설치하였고 개조가 불가능한 항공기에는 수류탄과 15kg 폭탄을 싣고 날아올라 손으로 직전 적진에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우리 공군의 목숨을 건 작전이었지만 북한군이 몰고 내려온 소련제 Yak-9 전투기와 IL-10 폭격기를 당해낼 수는 없었고 소멸 직전까지 몰리게 됩니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던 우리 공군에게 한번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은 주일 미군 사령부가 즉시 작전이 가능한 미 공군기들을 출격시켰고 미국은 우리의 전투기 원조 요구를 받아들여 전투기를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면서 그 전투기를 책임질 정예요원 양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해 한판승부라는 의미의 바우트 원(Bout One)프로젝트가 가동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 27일 우리나라 공군 최고의 정예군 10명이 일본의 주일 미군기지로 이동하였고 곧바로 F-51D 무스탕기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훈련부대를 이끈 지휘관이 유명한 딘 헤스 대령(당시 소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측은 전투기의 운용능력에 대해서 우리 대한민국 공군의 능력을 매우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투기 원조는 어느 정도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우리나라에 원조될 전투기의 숫자는 10기에 불과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불과 전쟁발발 바로 몇 달 전에 미 공군은 2차 대전의 주력기들을 일선에서 대부분 퇴역시키고 한창 새로운 제트전투기들로 기종 전환을 시행한 후였기 때문에, 주일 미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들 중에 우리공군에 지원 할 마땅한 기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나라 공군에게 최신형 제트전투기를 제공할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미 공군에서 폐기 처리된 F-51D 무스탕 전투기들이 한국공군에게 공여될 기체로 선정되었습니다.

 

(F-51D의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는 공군 파일럿 예비 조종사들)

 

하지만 딘 헤스 소령은 진심으로 바우트 원 프로젝트가 성공해 우리나라 공군이 되살아나기를 원했으며 우리나라 공군 최고의 정예군 10명의 조종사들은 쓰러져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프로젝트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기상악화로 인해 실제 비행 훈련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며 650마력의 T-6 훈련기를 40여일 조종한 것이 전부였던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그 두배가 넘는 출력의 고성능 F-51D 전폭기를 단 일주일 만에 능숙하게 조종하는 것이란 너무 힘든일이었습니다.

 

(서울 상공을 날아다니는 북한군 Yak-9 전투기)

 

그 시각 한반도에서는 서울을 함락하고 기세가 등등해진 북한군이 계속해서 남하하며 국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있었으며 미 지상군 선발대로 파견된 스미스 부대마저 대패하며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미 공군 사령부는 바우트 원 부대의 작전 투입을 지시하게 됩니다. 이는 바우트 원 프로젝트가 가동된 지 겨우 2~3일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령이 떨어졌고 바우트 원 부대의 우리 공군 조종사 10명은 무스탕 10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대구 비행장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영공을 수호할 바우트 원 부대의 F-51D에는 자랑스러운 우리 공군의 마크인 태극마크가 그려졌고 이들은 지체 없이 전장으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북한군 대공포 탄막을 뚫고 과감한 비행을 보였으며 지상의 우리 국군들은 그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적에게 돌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 비행 이후 바우트 원 부대는 크고 작은 위기를 헤쳐나가며 우리의 영공을 수호하였으며 그렇게 우리 공군의 전력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25전쟁 기간 동안 F-51D 무스탕 전투기 133대를 공여받아 총 8,495회 출격이라는 엄청난 기록까지 세웠습니다. 이는 신생국의 공군으로써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이정도의 출격횟수와 전과를 세운 예는 그 어느 나라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북한군의 보급로를 결정적으로 끊어 놓은 승호리 철교 폭격작전과 공중전의 판세를 완전히 결정지은 평양 대폭격 작전 등을 성공시키며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만큼 우리 공군은 절박함속에서도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으로 조국의 하늘을 지켜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