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

 

 

한국전쟁중  중공군이 참전하고나서

 

중공군의 1차공세부터

 

7차공세까지 영토변화와 어떤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볼게요

 

 

6.25전쟁은 사실 3년 내내

 

 전투만 벌어진게 아니고

 

한반도 지형상 거의 대부분의 기간은 특정 고지

 

 장악하기 위한 고지전투였습니다.

 


큰 전투는 1951년 1월~6월

 

 단 6개월 내에 다 몰려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대규모 전투는

 

 휴전 바로 직전에

 

 아주 좁은곳에서 거의 100 만명이

 

붙은 금성전투입니다.

 

<금성전투>


자 그럼 오늘 쓰려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1950년 9월 15일

 

이후의 전투양상입니다.

 

 

중공군 1차 공세

 

 

1950년 10월 25일의 공세

 

1950년 10월 하순에 이르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머지않아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작전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국군과

 

 유엔군은 추수감사절( 11월 23일)까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추수감사절 공세’를 계획했습니다.

 

맥아더 원수는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과 두만강선까지 진격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었습니다.

 

브레이크없이 질주하는 UN군의 북진을

 

적유령산맥에 숨어있던 중공군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공격을 시도합니다.

 

북진하던 UN군은 잠깐 움찔했으나

 

중공이 시위용으로 보낸 1~2개

 

 사단뿐일 거라 오판하게됩니다.

 


접전이 전개될 무렵 국군의

 

선봉부대인 제6사단 제7연대는

 

 그 진출로가 중공군의 공격 경로와 엇갈렸던

 

관계로 26일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했습니다.

 

대부분 공격하던 부대들이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쳐 붕괴되거나

 

 그들의 포위망에 고립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군 제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었고,

 

 미 제1군단의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이게 중공군의 제1차 공세였습니다. 

 
 
 
 
중공군 2차 공세

 

 

중공군의 제1차 공세

 

 의해 철수한 미 제8군이

 

 청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11월 7일 경,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중공군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리게됩니다.

 

 이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가 조성되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 사실을 인정한 맥아더 원수는

 

그들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공세를 계획하게됩니다.

 

 그는“이번 작전이 전쟁의 최종공세가 될 것이며,

 

 10일 이내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24일‘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하게됩니다

 

 

그때 중공군은 제13병단이

 

 적유령산맥 남쪽 일대에서,

 

제9병단이 장진호 및 개마고원 일대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국군 및 유엔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엔군이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바로 그 다음날인 25일,

 

그들의 두 번째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1차공세후 딱 한달후에 날이였습니다.

 

중공군의 제2차공세도 제1차 공세와 같이

 

유엔군에게 기습적이었습니다.


유엔군측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취할 때까지도

 

중공군의 병력은 의용군으로

 

구성된 단지 몇 개 사단에 불과하며,

 

 중국이 주력을 투입해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직적 지휘체제를 갖춘

 

중공군 3 0개 사단 30만여 명이

 

 투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숫자에중공군>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도처에서

 

출현한 중공군과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은 미 제8군의 우측방으로 주공을 지향시켜

 

 청천강 이남으로 진출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하게됩니다.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중공군은

 

엄청난 힘으로 밀어닥쳤습니다..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이 괴멸 되었으며,

 

장진호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포위되어 버리고맙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유엔군사령부는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마치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공세를 중단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중공군의 전술은

 

영원을 거쳐 순천 평양까지 우회하여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섬멸하여

 

전쟁을 바로 끝낼 참이었으나

 

이제 막 참전한 터키군이 

 

덕천에서 중공군을 3일동안 막아냅니다.

 

이때가 사실 6.25 전쟁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전쟁당시 터키군>

 

이 3일을 못버텼으면 연합군 대부분이

 

전멸할 수도있는 위기였습니다.

 

어쨋든 이 전투로 터키군은 참전하자마자

 

절반을 잃었으나
연합군이 후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후퇴는 성공했으나 평양에서 방어선을

 

계획한 연합군은 
항공촬영 결과

 

남하하는 모든 신작로, 대로, 산길, 농로 등에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내려오는걸 확인하고

 

심지어 평양 동측으로 또다시

 

우회하는 중공군 확인하고

 

"38선으로의 후퇴" 말고는 답이 없다며

 

전면 철수를 명령하게됩니다.

 

 

 

 

중공군 3차 공세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공세는 강력했고,

 

아군의 피해가 누적돼 있었습니다.

 

38선까지 후퇴한 아군은 그나마 피해가

 

 적었던 부대를 배치합니다.

 

 미 1군단, 25사단과 국군 1사단은 임진강에 배치됐고

 

미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과 미 24사단은 각기

 

 동두천과 포천에 배치하게됩니다.

 

 

 

 

 

 

춘천일대에는 새로 창설된

 

국군 3군단, 2, 5, 8사단이 배치됐고

 

9사단이 동해안에 배치됐습니다.

큰 피해를 입었던 부대는 후방에 배치됩니다.

 

 미 1 해병사단은 마산에, 2사단은 원주에,

 

 기병사단은 의정부에,

 

 3사단은 평택에, 7사단은 대구에 배치됐습니다.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국군 7사단은 원주에 배치됩니다.

 



문제는... 개전 초기 38선과 같았습니다.

 

 

그냥 일자로 쭉 그은 선이니만큼 각 부대가 맡아야

 

 할 공간이 너무 넓었습니다.


그 때 아군이 바란 것은 북진 때

 

김일성이 바란 것과 같았습니다.

 

중공군이 38선은 넘지 않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북진 때 그랬듯 산산조각 납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는 순간 예정된 건

 

방어가 아닌 후퇴였습니다.

UN군이 38선을 점령하고 재정비를 하는 동안

 

 중공군도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차기 공세를 언제 할 것이냐였습니다.

 

팽덕회는 12월 중후반으로

 

 

생각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38선 이북에 UN군이 남아 있을 때였고,

 

38선을 넘는 공세는 2~3월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기에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 후,

1~2개월 정도의 휴식시간을 부여한다."

모택동은 이를 거부합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UN군에

 

유리해질 뿐이라는 거였죠.


3차 공세, 혹은 정월 공세의 시작은

12월 31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사전공작이 시작됩니다.

 

북한군 2군단이었죠.

 

길원팔 유격대와 10사단을 중부전선의

 

 후방으로 침투시킨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빨치산과 함께 이들의 침투는 성공리에 끝났고,

 

인제-현리는 물론 홍천까지 침투에 성공합니다.

미 공식 전사에서는 이를

 

 "군사적 묘기이며, 북한군 2군단은 걸어다니느 공수군단"

 

이라고 평했습니다.

목표는 개전 때와 비슷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전선에서

 

아군을 격파하고 배후로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1차 공세부터 계획한 그대로였습니다.

 

약한 국군을 뚫고 아군 전체를 쌈싸먹는 것이었죠.

"저녁 무렵이 되자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특유의 피리와 꽹과리 소리가 난 뒤에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이 시작됐고,

 이어 적들이 나타났다.

 엄청난 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이 들이닥치면서 전면에 있던

 12연대가 뚫리기 시작했다.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물밀 듯이 전진하는,

전형적인 중공군식 인해전술이었다.

우리 1사단과 인접 국군 6사단 사이의

경계인 전투지경선이 먼저 밀렸다.

 우리 쪽에서는 12연대가 나가 있던 곳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15연대를 예비진지에 투입한 뒤

 전황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앞에 나가 있던

 부대와는 통신도 끊겼다.

11연대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으나

 12연대와 15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나는

공병대와 통신대 병력까지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선전과 평양 1호 입성 등

 1사단이 쌓았던 전공이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역전의 1사단도 무너지다니…."

 

백선엽장군에 회고록입니다.



이 상황은 6사단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예 공격받지 않은 1사단 옆의 미 25사단과 달리

 

 6사단과 같이 있던 미 24사단은 같이 공격받았죠.

 

중공군은 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언제나 최소 3배의 적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겨울이라서 땅이 굳었고, 강도 얼어서 방어선을

 

제대로 짤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공세 3일째인 1월 2일,

 

리지웨이는 직접 의정부로 달려가

 

국군 6사단과 같이 공격받은

 

미 24사단의 후퇴를 목격합니다.

 

 이어 바로 철수명령을 내리죠.

 

서울을 포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딱히 서울의 정치적인 의미를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군의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1월 4일 오후 1시에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하고
오후 3시에 중앙청에

 

4개월만에 또다시 인공기가 걸리게됩니다.

 

 

 

이렇게 1.4 후퇴가 시작됩니다.

 

 그래도 개전 때에 비해서 미리 서울을 포기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갈 수 있었고,

 

한강이 얼면서 피난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 혹독했던 추위만 빼면요...

 

이 때 남쪽으로 피난간 게

 

서울시민과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포함해

 

22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중공군 4차 공세  

 

 

 

중공군 4차공세는 1950년 2월 11일부터

 

일주일 간의 전투입니다.

 

중서부 전선의 연합군을 섬멸할 목적으로 

 

수십만 중공군 대군이 또 다시 남하합니다.

 

이 때 중공군의 남하 돌파구는

 

양평의 "지평리"였습니다.

 

여기서 지평리전투가 벌어지게됩니다.

 

 

  

이 지평리만 접수하면 중공군으로써는

 

4차공세마저 성공시키게 되는거였죠

 

그리하여 중공군은 지평리의 후방인

 

 

곡수리까지 차단하여

 

후방지원을 막은 후 약 4개 사단으로 포위한 다음

 

야간에 공격명령을 내립니다.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

(Regiment Combat Team,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

 

 3일간 벌인 격전이었습니다.

 

중국4개사단을 불과 1개연대와 1개대대로

 

전부 다 막아내게됩니다.

 

보급은 이제 막 발명된 "헬리콥터"가

 

그 위력을 떨치게되고

 

 보급품 수송과 부상자 후송 등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헬리콥터의 역사는 지평리 전투에서 시작되었다"

 

 


무려 3일 밤낮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급기야 미군 특공대가 후방의 곡수리를 돌파하여

 

연합군과 지평리가 다시 연결됩니다.

 

이 때 참여한 중공군은 그 피해가 너무도 막대하여

 

이후 전투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할 정도 였으며

 

지금까지 1~4차 공세 중 유일하게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가 됩니다.

이후 서울까지 탈환하게됩니다.

 

 

 

 

 

중공군 5차 공세   

 

 

4월 22일, 공사군의 5차 공세, 춘계 공세,

혹은 4월 공세가 시작됩니다.

 


 UN군 대 공산군의 힘과 힘의 대결이었습니다.

 

개전 이후 최고 규모의 충돌이었고,

 

이것이 전쟁의 향방을 가를 것이었습니다.

 

 


"서울을 빼앗아 모 주석께 노동절 선물로 바치겠다."

중공군 33개 사단과 북한군 12개 사단이

 

 참가한 4차 공세가 시작됩니다.

 

"공격간에 적들은 남쪽으로 10-50 km 격퇴되었고,

중공군 및 북한군의 평균 공격속도는

 서부전선에서 1일 6-7 km였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및 북한군은 부여된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다.

 공중 우세권과 큰 기동성을 이용,

적은 격멸되는 것을 피해 38선 남쪽의

사전 준비된 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상호 협동조직과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부대의

부분적인 정지는 큰 승리를 쟁취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 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

 

서울 북방의 사창리에서는 국군 6사단이

 

붕괴직전까지 가는 대참사를 겪었지만

 

설마리에서는 영국군이 최대의 혈투를 벌이는 등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과 보급능력이

 

서서히 제능력을 발휘하여

 

최종적으로 공세를 전부 다 막아내게됩니다.

 

중공군은 참전이후 최악의 피해를 입게됩니다.


4월 26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공세의 실패를

 

보고하고 29일까지 조기 종결합니다.

진격은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의 후퇴는 패배가

 

 아닌 계획된 철수였고,

 

이런 상황에서 너무 큰 피해가 나버린 것이죠.


하지만 그가 공세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차기 공세를 빨리 하기 위해

 

이번 공세를 미리 끝낸 것이었죠.

 

이렇게 5차공세도 연합군 승리고 끝납니다.

 

 

 

 

 

 

 

중공군 6차 공세   

 

 

 

중공군5차 공세(1차 춘계공세)

 

좌절되었음에도 마오쩌둥은

 

6차공세(2차 춘계공세) 이미 명령합니다.

 

"5월 첫 주, 미군 정찰기는 중공군 후방에서

 

4,000대 이상의 차량 이동을 관측하였고,

 

그 가운데 반 이상이 남으로

 

향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5월 10일, 밴 플리트의 정보 참모 타켄트는 중공군의

 

"서울에 대한 전면 공격이 임박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밴 플리트는 8군의 공격작전을 취소하였어요

 

그리고 리지웨이에게 9개 중공군 사단과 3~4개

 

 북한군 사단이 72시간 내지 96시간 안에

 

공격해 올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10개 중공 및 북한군 사단이 주공을

 

도와서 견제 공격을 할 것임도 예상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서울이 아닌

 

적부대 격멸로 목표를 바꿉니다.

 

UN군의 화력을 잘 쓸 수 없었던 중동부 산악 지대로

 

 전장을 바꾸고 거기 몰려 있는

 

국군을 격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목표가 됐던 것은

 

국군 3군단, 3, 7, 9사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3중 포위망을 준비합니다.

 

여기에 좌측의 국군 5사단과

 

우측의 국군 1군단 소속 수도,

 

 11사단까지 섬멸하는 계획이 준비됩니다.

이를 위해 팽덕회는 38개사단 중 18개를 동원합니다.

 

남은 20개 사단 중 12개 사단은

 

서부지역에서 UN군을 견제,

 

나머지 8개 사단은 다시 가평-춘천 방향으로 기동해

 

서부와 동부를 다시 가를 예정이었습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국군 6사단이

 

여기에 다시 맞서야 했죠.

 

<사진출처 :6사단>

 

 

5월 12일, 중공군 사단들이 공격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5월 16일, "9개 중공군 사단과 4개

 

포병 연대는 (미군 정찰기에)

 

 탐지되지 않고 화천 저수지 동쪽 인제 가까이에 전개하여

 

한국군 5, 7, 9사단에 대한 주공 준비를 마칩니다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후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6차 공세 하루 만인 5월 17일 밤

 

강원도 인제군 현리 일대의 3군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패퇴하였습니다.

 

현리전투라고 칭해지는 약 9일간의 전투는

 

사실상 일방적 패주에 가까웠습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양측의

 

피해가 막심한 상태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내심 휴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후방지원을 해주던 소련 역시 전쟁을 중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51년 6월 24일,

 

 유엔 주재 소련 대사 밀라크가 휴전을 제안합니다


드디어 휴전협상이 시작됩니다.

 

 

 이제 전쟁의 끝이 보이는가 싶었지만,

 

 사실 그것은 더욱 더 처참한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협상은 2년을 넘게 질질 끌었고

 

그 사이 양측은 서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 1년 간보다 더 참혹하고 무의미한 전투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1953년 7월 휴전협상이 조인되었던 때의 전선은

 

1951년 6월 북한군이 침략을 개시했을

 

 때의 전선과 대동소이했다)

 

 

 

 

중공군 7차 공세    

 

 

 

이건 6차공세에서 무려 2년이

 

지난 1953년 5~7월의 전투입니다.

 

그 2년동안은 처음에 얘기했듯 고지전이

 

주류였고 전면 영토변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7차공세는 사실 휴전협정이 이미

 

거의 완료된 상태에서의 기 싸움이었죠

위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의 휴전선과 비슷하긴 하지만

 

중부전선에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어요

 

 

 

그곳이 바로 북한의 금성지역인데

 

사실 6차공세가 끝났을 당시만 해도

 

저렇게 금성지역은 우리 땅이었어요.

 

그런데 7차공세에서 무려

 

5개 군단급의 수십만 대군이

 

금성지역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바람에

 

결국 금성천 북방 지역의 땅을

 

북한군에 내주고 말았어요...

 

만약 끝까지 버텼으면 국군 6사단 8사단은

 

후방 차단되어 전멸했을거에요

 

 

 
사실 이 7차공세에서 중공군은 금성돌출부를

 

공격하여 자기네들 땅으로 만들고

 

금성천까지 건너 내려와 백석산

 

적성산 초입까지 공격했습니다.

 

놀란 국군이 백석산 적성산에 방

 

어선을 쳐 겨우 막아냈고

 

다시 금성천 남단까지 공격하여

 

중공군을 쫓아내버립니다.

연합군은 금성천을 건너 다시

 

돌출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휴전협정 파기를 우려한

 

연합군 지휘부의 명령으로

 

거기서 반격을 멈추는 바람에

 

결국 그대로 휴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백석산 적성상 북쪽에 있는 금성천이

 

바로 DMZ 한가운데 있어요)

 

 

 

 

 다가오는 6월25일...

 

모두 잊지않으셧으면 좋겠습니다..

 

6시간동안쓰느라 힘드네요;

 

공감한번씩부탁드려요^^필승!

 

 

 

 

출처 및 참고자료: 나무위키.나무위키.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