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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에 시라소니 이성순이 일본 깡패 40여 명과 단독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로 내려오고 있으며 시라소니 이성순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싸움꾼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시라소니와는 비교도 안되게 용맹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단신으로 권총 2정을 들고 일본 경찰 1000명과 격전을 벌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용맹했던 김상옥 의사입니다.

 

 

김상옥은 1889년 서울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장 및 대장간 생활과 방문 판매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였고 20대 초반 대형 철물공장 사업가가 되었지만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했습니다. 사업가로써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총까지 든 것입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의 말-

 

그리고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김상옥은 총독 암살을 준비했지만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상하이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1923년 1월 서울에 잠입했습니다. 밀입국 과정에서 경비 경관을 사살하기도 했고 세관 검문소 보초병들을 격투 끝에 때려눕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서울에 잠입한 이유는 광화문 뒤편의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조선총독을 처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1923년 1월 12일 밤 10시 10분, 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은신처에 숨었지만 5일 뒤인 1월 17일, 은신처가 발각되면서 김상옥은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김상옥은 놀라운 사격 실력을 발휘하면서 21명의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일본 경찰 1명 사살, 3명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김상욱은 다행히 포위망을 뚫고 왕십리 이모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영화 '밀정'中)

하지만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본 종로경찰서는 김상옥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였고 결국 김상욱은 은신처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김상옥의 놀라운 전투력을 확인했었던 일본은 1000명 이상의 군경을 동원하여 그곳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상옥은 포위망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고 혼자서 일본 군경 1000명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김상옥이 태어나 어릴적을 보낸 곳으로 조그만한 골목길까지 잘 알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하와이피스톨 하정우 모습과 쌍권총의 달인이었던 김상옥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렇게 3시간 35분 동안 김상옥은 쌍권총을 들고 인근의 지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1000 대 1의 총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군경 16명이 쓰러졌습니다. 홀로 1000명 이상을 상대하면서 그중 16명을 쓰러뜨린 것은 그야말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김상옥의 전투력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쏜 총알 11발을 몸에 맞은 김상옥 의사는 탄환이 떨어지자 결국 마지막 남은 총알을 가슴에 겨누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결, 순국했습니다. 그렇게 서른 네살 청년이 고향 땅에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1000명 이상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적의 총에 죽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 전투의 승자는 김상옥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종각역 8번출입구 앞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순국하는 당시에도 일본 경찰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나는데 김상옥은 마지막 총알로 자결 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 경찰은 김상옥이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상옥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