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낙동강방어선전투[ 洛東江防禦線戰鬪 ]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습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워커장군>

 

잠시 미8군 초대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에대해 알아보고지나갈게요.

 

워커 장군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여기에 있겠다."

(I will stay here to project Korea until my death.)

 

라고 결의하고 융단폭격 등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대한민국의 최후보루였던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어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여 인천상륙작전,

 

 38선돌파 등 북진의 승기를 잡았기에

 

오늘 이 지구상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도록 한 우리 모두의 은인입니다.

  그는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서 북진 중에

 

있을 때 보좌관(중령)과 함께 중부전선으로

 

 이동 중 서울시 도봉구 도봉1동 596-5 앞

 

도로에서 1950.12.23.10:45 교통사고

 

(가해자 한국군 6사단 2연대 소속 박경래;1924년생)로

 

 운전병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 와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UN군 장병들의 고귀한 짧은 삶을

 

 높이 평가하고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바로 낙동강 1차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전력이 부족한 국군으로는 이 방어선을 지킬 수 없다

 여겨 8월 11일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선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방어했다.

이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

 여긴 국군과 유엔군은 배수진의 각오로 싸웠다>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을하였어요.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습니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전투

 

·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다부동전투[]

워커 미8군사령관은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군부대를

 

왜관 북쪽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워커 장군이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왜관 북쪽

 

미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서부 지역과 국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고리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지역의 국군이 무너지면 미군마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대구 북방 산악지대에서는 국군1사단과

 

북한군 사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난타전이 벌어졌습니다.

 

 1사단의 방어전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는데,

 

북한군이 먼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해 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사전에 주 저항선으로

 

선정됐던 주요 고지군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이 선점해 버린 유학산 등지를 탈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위기의 순간이 많았으나,

 

국군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으로 결국 전선을 지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 백선엽 장군>

 

마침내,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였습니다.

 

 

 

 

제1사단은 주 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피아(彼我)

 

간에 많은 전사자가 났어습니다

 

 국군은 2300명이, 북한군은 5690명이 전사했습니다.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낙동강전선에서 죽은 북한군의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제로 징집한 젊은이들이었다고전해집니다. 

 

<강제로 징집된 의용군>

 

다부동전투는 ‘제자리에서 버티든가, 아니면 죽는

 

’ 식의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이 사실상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남부지역에만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만큼,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 장교 중 일부는 유사시

 

한국 본토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 ‘뉴 코리아(New Korea)’라는

 

이름의 망명 정부 수립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국군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 저항선을 형성하고

,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였습니다.

 

이는 수많은 희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부동전투 과정에서 국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병력 부족으로 인해 학도병도

 

 자원 참전을 하였습니다.

 

<6.25전쟁당시 학도병>

 

남한 국토의 90% 이상이 이미 점령된

 

상태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숨 걸고 싸운 국군과 미군, 학도병들이 아니었다면,

 

<영화 " 포화속으로"中 학도병>

 

한국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다부동전투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

 

진출하려던 적들의 기세를 꺾었고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릴 정도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합니다.

 

 

 

 

 

 

 

영천전투[ ]

 

영천지역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의 9월 공세로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 점령을 기도한 북한군 제15사단을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의 공방전을

 

통해 격퇴하고 영천을 확보한 전투입니다.

 

 

<7사단칠성부대.8사단오뚜기부대마크>

 

북한군은 8월 공세에서 다부동 및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어요.

 

이는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영천에서의 전투는 주로 영천 북쪽과

 

 남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적이 영천을 점령하여 대구로 진출할 경우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위험에 처해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경주로 진출할 경우에는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3개 방면에서 공격을 해왔어요.

 

이에 따라 국군은 방어선이 취약하여

 

분산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제8사단의 방어선이

 

돌파됨에 따라 제8사단의 배속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천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차출해 병력을 운용하였어요.

 

 

 <1사단과 6사단청성부대마크>

 

 2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국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9월 10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였어요.

 

 제8사단과 제7사단을 작전계획에 따라 배치하여

 

 남, 서, 북쪽의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작전으로 국군은 적 제15사단의

 

전차 및 화포 대부분을 파괴하고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3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하던

 

적 제2군단에 맞서 국군은 제8사단과

 

 제7사단 및 추가 연대를 투입해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영천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된 영천지구 전투는

 

북한의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투였습니다.

 

 

 

 

이러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