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고요한 하늘을 찢는 포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북한의 기습 남침,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서울은 단 사흘 만에 함락됐고, 수도 한복판엔 불길과 연기만이 남았습니다.

“이 나라는 끝난 걸까?”
정부는 대전으로, 다시 대구로 피난을 가며 남하했고,
전 국민은 공포에 휩싸여 살던 도시를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전선은 무너졌고, 무기와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군 내부조차 혼란과 불신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포기하려 할 때, 그 속에서도 버텨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도, 대한민국이란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대한민국 육군의A 사단들.
그들은 불가능 속에서도 싸웠고, 패배가 일상이던 전장에서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기록은 단순한 전투의 역사가 아닙니다.
나라를 구한 의지와 투혼의 기록이며,
전쟁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뿌리입니다.

✅ 1. 6사단 – 춘천 전투의 영웅

서울이 함락된 1950년 6월 28일, 강원도 춘천에선 기적 같은 저항이 시작됩니다.
북한군 제2군단, 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춘천을 거쳐 남하하던 길목.
그 길목을 가로막은 유일한 부대가 6사단이었습니다.

병력은 상대의 절반, 중화기는 턱없이 부족.
하지만 6사단은 산악지형을 철저히 활용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작전 계획을 뛰어넘는 지연전을 성공시킵니다.

"단 하루만 버텨라."
그 명령에, 6사단은 무려 사흘을 버팁니다.
그 사흘 동안 남쪽에선 낙동강 방어선이 재편되고,
UN군이 개입할 시간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 이후 북한군은 계획보다 며칠 늦게 남하했고,
그 지연이 대한민국 전체 전쟁 양상을 바꾸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합니다.

군사 전문가들은 지금도 말합니다.
“6사단이 하루를 벌었고, 그 하루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 2. 1사단 – 낙동강의 철벽

서울과 대전이 무너진 뒤,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는 낙동강 방어선이었습니다.
그 선봉에 섰던 부대가 1사단이었습니다.

경북 김천, 안동, 구미 일대를 지키며,
1사단은 끊임없이 몰려오는 북한군 정예 병력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습니다.
포화 속에서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전차와 보병, 야간 공격을 모두 방어해냈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부산도 없다.”
그 절박함은 병사 하나하나의 사기가 되었고,
죽음을 각오한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안동 일대에선 10일 넘는 격전이 이어졌습니다.
야전과 매복, 기습과 역습을 반복하며
그들은 낙동강을 한 치도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 방어선 덕분에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은 반격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1사단은 그 이름대로, 육군의 첫 번째 전통이자
국가 최후의 방패였습니다.

✅ 3. 7사단 – 백두산 탈환 작전

1950년 말, 전세는 뒤집히고 대한민국 국군은 북진을 시작합니다.
그 끝은 바로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북한조차 병력을 정규적으로 투입하지 못했던 험준한 장진군.
그곳을 돌파해 백두산 자락까지 진격한 부대가 7사단입니다.

혹한과 눈보라, 해발 2,000m 가까운 산악을 돌파한 그 작전은
한국군 최초의 대규모 고산 전투이자, 독자 작전 수행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백두산 기슭에 태극기를 꽂았고,
그 장면은 라디오를 통해 전 국민에게 전해졌습니다.

“한국군이 백두산을 점령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점령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중심에 대한 복원,
전쟁 속에서도 잊지 않은 정체성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7사단은 ‘백두산의 사단’이라 불리게 되었고,
지금도 국군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진격의 주역으로 기록됩니다.

✅ 4. 3사단 (백골부대) – 화천지구 전투

강원도 화천지구는 한국전쟁 중부 전선의 심장과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북한군은 화천댐을 장악해 수력발전과 전략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고,
이를 막기 위해 투입된 부대가 3사단, 백골부대였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한 백골부대.
그 별명은 이 작전에서 처음 붙여졌습니다.

3사단은 끈질긴 추격과 매복, 전투를 반복하며
화천댐을 사수했고, 이어진 반격으로 지역 전체를 탈환합니다.

북한군은 말했습니다.
“백골처럼 따라붙는다.”

그 무시무시한 끈질김과 투지는
오늘날까지 백골부대의 정신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작전으로 인해 강원도 북부 전선은 안정됐고,
중부 지역 방어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냈습니다.

✅ 5. 9사단 (백마부대) – 지리산 공비토벌전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진짜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지리산, 덕유산, 팔공산 일대에는 북한 공비들이 숨어들었고,
이들은 민간인을 공격하며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소탕한 부대가 9사단, 백마부대입니다.

백마부대는 전쟁 후에도 무려 3년 가까이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이어갔고,
낮엔 정찰, 밤엔 매복과 추격 작전을 반복하며
하나씩 공비를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들의 피로 대한민국 내륙은 다시 안정됐고,
휴전 이후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은 백마부대는
군의 사명감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가 됩니다.

✅ 6. 11사단 – 유령처럼 싸운 전사들

11사단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정예병력이었습니다.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던 북한군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정찰과 정보전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특수작전이 주 임무였습니다.

정면으로 싸우기보단, 매복과 유인, 심리전과 기습으로 상대를 제압.
‘유령 부대’라 불릴 정도로 조용하고 정확하게 적을 소멸시켰습니다.

11사단의 존재는 북한군에게 공포였고,
지역 주민에게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전후 후방 안정화에 핵심적 기여를 한 11사단은
오늘날에도 정보전, 산악전 특화 부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 7. 수도사단 – 서울을 되찾은 선봉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가장 앞장선 부대는 수도사단, 즉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정예부대였습니다.

시가전이라는 최악의 조건, 수복보다 피해를 줄이는 것이 우선인 작전에서
수도사단은 훈련된 병력과 빠른 기동으로
서울 중심부를 재탈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시청, 광화문, 남대문 일대를 하나씩 회복해가는 과정은
전 국민에게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서울을 지키기 위해, 서울로 들어간 사단.
수도사단의 투혼은 전후에도 국군의 자존심으로 남아있습니다.

✅ 8. 15사단 – 38선 사수의 방패

정전협정 직후,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대치하던 시기.
경기 북부와 강원 접경을 지키던 부대가 15사단입니다.

휴전선이 확정되기 전까지,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고
15사단은 수도권 북방 방어의 핵심이자,
북한의 도발을 직접 저지하는 최전선의 벽이었습니다.

냉전 초기, 심리전과 위협이 가득한 휴전선 지역에서
2사단은 철통 같은 경계와 고지 방어 능력을 증명해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 그 이름,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

이들 사단의 이름은 단순한 군사 명칭이 아닙니다.
그건 역사의 상징이자,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기반입니다.

누군가는 총을 들고,
누군가는 진흙 속에 쓰러져가며,
그날의 대한민국을 지켜냈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투지를 기억하는 것,
그건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이유.
바로, 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대한민국을 지킨 전설의 사단들.
그 이름에 경례를 보냅니다.

“그들이 있어, 우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