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쎈돌 이세돌] 2편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지난 1편에서
이세돌은 첫 세계 대회 결승전이었던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에 진출했다

사실 이 LG배는 이세돌에게 여러가지 의미로 뜻깊은 대회야

 

96년 입단 직후 LG배 창설기념 조훈현 九단과의 기념대국 장면
정선(백에게 덤이 없는 일종의 접바둑)으로 조훈현과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당시 바둑팬들이 가장 기다렸던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던 이창호와 32연승을 달리던 
'무패소년' '리틀 조훈현' 
이세돌의 첫 세계 타이틀 전
 

 

LG배 결승 5번기 제 1국

이세돌은 이 대결 직전까지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이고 있었어
결승전에 올라오기 까지 
중국의 창하오, 루이나이웨이, 저우허양을 연달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며
"내 적수는 이창호 사범님 밖에는 없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더 센것 같다."라며
당시 신예 바둑기사로서는 파격적인 도발을 하며 
바둑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

하지만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돌한 신예의 패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 이창호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스승 조훈현의 시대를 종식시키며
92년도 부터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올랐어
수 많은 타이틀을 따냈고 
2000년
세계 최강의 등용문, 응씨배 마저 거머쥐며 
이창호가 패도를 걷고 있던 시절
그의 앞길은 어떤 문으로도 가로막혀 있지 않아 보였다 

당시
이세돌은 '뛰어난 유망주'
이창호는 '최강의 일인자'
승부는 뻔해보였어
누가봐도 이창호의 압승이 유력한 상황
이세돌은 첫 세계대회 결승전에 진출한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지

하지만 이세돌은 그 정도에 만족하는 기사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우러러보던 이창호라는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어

 

 

매서운 눈빛의 이세돌 당시 三단


위 사진처럼 이세돌은 대국 중에 자주 상대를 매섭게 쏘아보곤 해
바둑이 안 풀릴 때나 상대가 알 수 없는 묘한 수를 두었을 때
그는 상대를 매섭게 관찰해
상대가 반상의 어느 곳을 응시하는지
나의 어느 약점을 파고들 것인지
상대의 약점이 어느 곳인지
어느 곳에 두어야 가장 고통스러워할지
표정을 보면 어느정도 느껴진다고 해
천성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알아채는 재능을 가진 이세돌이었어

바둑계에서는
바둑을
'수담 手談을 나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바둑은 곧 '손으로 나누는 이야기'라는 것

반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몇시간 씩 바둑을 두다보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노리는지 서로의 손 끝에서 느껴지기 마련이지

 

이창호와 이세돌

하지만 이창호는 당시 '石佛 돌부처'로 불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기사
전성기 시절 이창호는 100수 앞까지도 수읽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100수 앞을 내다보고 두는 100수 전의 수
보통의 기사라면 그 수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었을거야
이 무렵에는 해설가들 조차 이창호의 한 수 한 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설해내지 못 할 때가 많았어
'방금 저 수는 무슨 수죠?'

또한
이창호는 대국 중에 절대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해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에 맞춰두는 이세돌과는 달리
상대에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의 바둑을 두어가는 이창호
무엇이 맞다고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이세돌과 이창호는 작은 부분에서도 큰 부분에서도 차이점을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상극의 대결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국은
 

이창호와 이세돌

하지만 이창호는 당시 '石佛 돌부처'로 불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기사
전성기 시절 이창호는 100수 앞까지도 수읽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100수 앞을 내다보고 두는 100수 전의 수
보통의 기사라면 그 수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었을거야
이 무렵에는 해설가들 조차 이창호의 한 수 한 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설해내지 못 할 때가 많았어
'방금 저 수는 무슨 수죠?'

또한
이창호는 대국 중에 절대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해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에 맞춰두는 이세돌과는 달리
상대에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의 바둑을 두어가는 이창호
무엇이 맞다고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이세돌과 이창호는 작은 부분에서도 큰 부분에서도 차이점을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상극의 대결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국은

 

제 5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제 2국 

그러나 다음날 이어진 제 2국의 결과 또한 이창호의 완패

이 5번기에서 이세돌의 승리를 예측했던 사람은 없었어
모든 이가 최강자 이창호의 승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황에 나온
이창호의 2연패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말았지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충격적인 연패를 당한 이창호 본인 이었을거야
승리 후에도 언제나 시종일관 표정을 짓지 않던 석불이
2연패 후 찡그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에 당혹스러움이 역력해 보였다

2001년 LG배 2연승 후 월간바둑의 표지를 장식한 이세돌 당시 三단 


신선한 충격을 받은 바둑계는 새로운 천재의 탄생이라며 이세돌을 추켜세웠고
이창호를 '뚫린 방패'라고 표현하며 위기론이 대두되었어


3국은 약 두 달 뒤에 속개되었다
당시 LG배는 결승 5번기를 1차로 1,2국을 진행하고 중간에 시간을 가진 뒤
2차로 나머지 대국을 마무리했어
 까마득한 후배에게 2연타를 얻어맞은 이창호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반면 2연승을 거두고 있었던 이세돌은
내친김에 3연승으로 끝내버리기 위해 
"3국은 제게 있어 결승국입니다. 이곳에서 끝을 내겠습니다."
라며 승부욕에 불을 지폈지

이 날의 바둑 역시
이세돌이 초반 부터 승기를 잡으며 모든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어
공교롭게도 TV에서는 이창호의 스승 조훈현이 대국을 해설 중이었는데
조훈현은 중반 이후 대국의 상황에 대해 
"이세돌 三단의 우승이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 할 정도 였다

하지만 이창호라는 벽은 그렇게 쉽게 무너져 주지 않았다
대국이 중반에서 끝내기로 넘어갈 때 쯤
이세돌은 초읽기에 몰렸고 연속 두 번 실착(실수)을 하게 돼
이전에도 손이 너무 빠르게 나오는 탓에
가끔 나오는 경솔한 수가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던 이세돌이었어
그런데
하필 그때 실수가 연달아 두번이나 터져 버렸다

이창호는 이런 후배의 실수에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창호는 이세돌의 빈틈을 후벼팠고
이세돌은 초반부터 중반까지 다 잡았던 우승컵을
제 손으로 내동댕이 쳐버렸다
 

3국을 승리한 후 인터뷰 중인 이창호


이 날 인터뷰에서 이창호는 
"전반적으로 바둑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내일은 실수없이 더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도록 하겠다."
라며 승리에 대한 안도감을 밝혔다

거의 손 안에 다 들어왔던 첫 우승컵을 놓쳐버린 이세돌은
망연 자실한 표정으로 대국장을 떠났어

그리고 이틀 뒤 이어진
제 4국에서도 이세돌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초반부터 맹공을 퍼부었으나
이창호 식 타개에 막혀 결국 제 풀에 지쳐 쓰러져 버리고 말지
결국 종합전적 2 대 2로
승부는 균형추를 다시 맞추게 되었어

이어진 제 5국은
나흘 뒤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다

제 5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제 5국

2연승 후 2연패를 당한 이세돌은
이미 그 기세가 꺾여버린 상태였고
오히려 기세는 이창호에게로 넘어와 있었어
이창호는 관록을 뽐내며 이세돌을 압도했고 242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게 된다

패배 후 이세돌은
"이번 결승전은 오랫동안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이 세 번의 패배가 나의 바둑인생에 보약이 될 것 같다."
"역시 이창호 사범님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롭다."라며
승부 전에 자신이 이창호 보다 더 강하다며 도발해오던 모습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됐다

2연패 후 3연승을 거두며
짜릿한 역전 우승을 차지한 이창호
하지만 최강자 이창호를 벼랑 끝 까지 몰아붙이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세돌 또한 값진 경험을 얻게 되었다

제 5회 LG배는
이창호의 국내외 통산 타이틀 100회 차지라는 기록과 
그렇게 풍성한 화제거리를 낳으며 마무리 되었다
약 6개월 뒤 국내기전인 '제 20기 KBS 바둑왕전'에서
다시 만난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결은
이창호의 2:0 승리로 싱겁게 마무리 되고 만다

이후 이세돌은 다음해인 2002년
주요 세계기전 중 하나인 '후지쯔 배'에서 첫 세계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감을 높였다

 

 

제 15회 후지쯔배에서 유창혁 九단을 상대로 우승컵을 거머쥔 이세돌 당시 三단

우승 후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세돌은
"확실히 세계 최강은 접니다."
라며 다시 한 번 이창호를 도발했다
이세돌의 이전까지는 이런 스타일의 기사가 없었어
바둑은 예禮와 도道를 중시하는 스포츠
무엇보다 바둑기사가 갖춰야 할 기본적 소양은 '겸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세돌은 그러한 틀을 깨고
프로에게 있어 쇼맨십이란 무엇인가를 팬들에게 일깨워준 첫번째 기사였다

팬들은 이런 이세돌의 당돌한 모습을 오히려 반겼고
이세돌의 이런 당돌한 모습은 매력 포인트가 되어 그의 개성이 되었어
하지만 후에 이런 모습은 해외팬들로 하여금
이세돌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들어
특히 중국은 아직도 이세돌을 엄청나게 싫어해
이창호 만큼 중국기사들을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고
또 승리를 거둔 후에 중국을 상대로 도발에 망설이지 않았거든 


그리고 이듬해 
2003년
이세돌은 지난 5회 대회에서 자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이창호와 다시 한 번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7회 LG배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이창호와 이세돌

준결승에서 동기 조한승 三단을 꺾고 결승에 먼저 진출한 이세돌

이창호는 당시 주목받던 신예 기사였던 원성진五단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지난 번에는 2연승 후 
뒷심 부족으로 3연패 하며 우승컵을 내준 이세돌이었지만
이미 작년 후지쯔 배에서 유창혁 九단을 꺾고 
첫 세계 대회 우승을 맛본 이세돌은 자신감이 충만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세돌은 자신에게 세계 대회 타이틀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던 이창호를 상대로
확실한 복수극을 펼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1국

그렇게 시작된 1국은
지난 번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결의 양상과 같았어
언제나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이세돌
그리고 그 공격을 막아내며 타개(위기를 해쳐 나가는 것)해 나가는 것은 이창호였지

흔드느냐 막아내느냐
분명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는 비유가 필요한 그들의 대국이었어

초반 승기를 잡은 것은 공격을 주도하던 이세돌이었다
지난 번 패배 이후 초반에 이창호를 흔들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세돌은 매우 거세게 이창호를 흔들었고
이창호는 중반 이후에는 초읽기에 몰려 이미 패색이 짙어져 버렸지

하지만 이창호는 쉽게 돌을 던지지 않고 바둑을 끝내기까지 끌고갔고
지켜보던 이들은 이창호가 돌을 너무 늦게 던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어
이에 이창호는
"중반 이후 초읽기에 너무 빨리 몰려서 정확한 형세판단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는데
누구보다 형세판단에 능한 기사였던 이창호로서는
말이 안되는 변명이었다
분명 이창호도 이 대국이 자신의 패색이 짙어졌다는 것은 느꼈을 테지만
과연 이세돌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가늠해 보고자 했을 터였다
아마도 이창호는 이번 결승전 또한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절감했을거야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2국

이어진 2국에서는 이창호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세돌이 무섭게 성장하며 이창호의 턱 밑에 칼을 들이밀 때 까지
정상을 지키던 이창호 또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이세돌의 공격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두어가며 이세돌의 실수를 이끌어내 
반격에 성공했다

그렇게 1차 라운도 1,2국을 1대1의 스코어로 마무리한 이세돌과 이창호는
약 한달 후 2차 라운드를 치르게 돼

 

제 7회 LG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3국

3국은 종반의 종반을 거듭하며
치열한 끝내기 승부로 가게된다
패싸움을 거듭하며 서로 초읽기에 몰렸던 이 대국은
265수 만에 이세돌의 흑 불계승으로 끝이 나게 돼
(보통 180~200수를 넘어가면 끝내기에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2국에서 반격에 성공했던 이창호로서는 맥이 확 빠지는 순간이었어
게다가 이창호는 '끝내기의 승부사'
미세한 승부에서 누구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창호였어
미세한 끝내기 승부에서 이세돌에게 패했다는 것에
이창호는 패배의 아픔이 곱절로 다가왔을거야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4국

이세돌이 종합전적 2승 1패로 앞서가며 맞게 된 4국
3국과 마찬가지로 대국은 접전에 접전을 거듭했어
여기서 패배하면 그대로 우승을 내주게 되는 
이창호 또한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고
반드시 이곳에서 우승을 결정지어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이세돌 또한 물러설 곳은 없었다


결국 4국의 승자는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시상식
우승 이세돌 三단 
준우승 이창호 九단


이세돌이 승리를 거두며
처음으로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따내는 순간이었다
이세돌은 이 대회에서 몇가지 기록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때까지 이창호는 제 1회 LG 배를 시작으로
1,3,5회를 우승하여 홀수 회차 대회를 모두 우승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창호의 기록을 깨버렸고
이창호의 후배 기사중에서는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 결승전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기사로 기록되었다

 

 

상금과 상패를 받고있는 이세돌과 이창호



우승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이세돌은
"이창호 사범님이 역시 최강이다."라며 
오히려 또다시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어

이하는 우승 직후 인터뷰 내용 발췌
(월간바둑 구기호 기자 - 2003년 월간바둑 5월호)

- 이번 결승전만 놓고 보면 영락없이 세력바둑으로 오인받기 십상인데...
자신이 추구하는 기풍의 진짜 색깔은? 
[PS.닉네임 '리틀조'가 말해주듯 이세돌 6단(우승후 3단 승단)의 기풍은 
전신(戰神)으로 통하는 조훈현 9단과 매우 흡사하다. 엷은 듯 하지만 타개가 탁월하고 치고 빠지기에 능하며 
때론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여 단박에 승부를 결정짓는 등 탁월한 몸싸움 실력을 겸비했다. 
이번 결승전에서도 네판 모두 이창호 9단의 대마를 잡는 괴력을 선보였다.]
"실리와 세력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바둑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실리바둑으로 갈 건지 아니면 세력바둑으로 가든지 결정할 뿐이다. 
이번 결승에선 판을 짜다 보니까 두텁게 두었을 뿐이다."

-형세가 유리하면 적당히 타협해 판을 닦아 나가기 마련인데... 
평소 바둑을 보면 형세가 유리해 굳이 수를 내러가지 않을 상황에서도 돌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PS. 끈임없이 최선의 수를 찾는 노력은 어쩌면 프로, 전문기사들의 사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기사도 사람인지라 유리하면 '부자 몸조심'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평소 이세돌의 모습은 달랐다.]
"수가 보이면 손이 근질근질해 참지를 못한다.(대부분 그것으로 승부가 끝나지만) 
그래서 역전패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

-후배기사와의 대국때 부담을 많이 느끼는가?
(결승전 대국에서 조훈현,이창호,유창혁,이창호 9단은 가장 큰 부담으로 하나 같이 후배기사와의 대국을 꼽았다. 
선배기사와 두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데,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아니면 제자등 어린기사와 둘 때면 심리적으로 편치 않다고 고백했었다.)
"나보다 어린 상대가 꽤 있지만 어려봐야 세살 정도 차이다. 큰 부담을 못 느낀다."

- 이번 결승전 준비는 어떻게 했고, 앞으로 목표는?
[큰 대국을 앞두면 누구든 스케줄 관리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이번 결승전에 대비해 두 기사는 나름대로 스케줄을 관리했을 텐데... 
대국일정으로만 보면 이창호가 좀 더 빡빡했다.]
"2년전 LG배 세계기왕전 기보를 반복 검토하며 이번 결승전에 임했다. 
올해 목표였던 LG배 우승을 이뤄 기쁘다. 다른대회에서도 잘해 볼 생각이다.


같은 해 이세돌은
당시 송태곤4단을 결승에서 꺾고 후지쯔배 2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2002년 제 15회 우승에 이어
2003년 제 16회 후지쯔 배 우승을 차지하는 이세돌

이무렵 이세돌은 
계속해서 승단대회에 참가를 거부하고
三단에 머물러 있었는데
대회 일정도 바쁜 와중에 불필요한 승단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한국기원의 참가 명령을 거부했어

이때까지 프로기사들은 단수를 올리려면
매년 열리는 승단대회에 참가해 
다른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승단을 해야했다
사실 승단대회의 존재이유에 대한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현역 프로기사가 직접 한국기원을 상대로
거부의사를 밝힌 것은 이세돌이 처음이었다

세계 대회에서 저단자가 연이어 고단자들을 꺾어 나가니
언론은 더욱더 승단대회의 불필요성을 제기했고
한국기원 입장에서도 난처한 상황이 계속되었어

결국 2003년 한국기원은 승단규칙에 
'세계대회 우승시 三단 승단, 준우승 시 一단 승단의 특별승단을 인정한다.'
라는 조항을 추가했고
후지쯔 배의 우승을 통해 이세돌은 
三단에서 七단으로 승단한 뒤
이후 최단 시간 내에 九단까지 승단하게 된다

이 조항은 후에 '이세돌 법'으로 불리며
한국기원은 아예 승단대회 자체를 폐지하고
국내외 주요 기전의 예선 및 본선 성적을 기준으로 승단심사를 진행하여
자동으로 승단이 될 수 있게끔 조항을 고치게 된다

이때부터
프로기사들은 승단대회의 부담을 덜고 대회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프로기사 중 九단의 숫자가 대폭 늘어나게 된다
이세돌의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 부분이야

그리고 이세돌은
후지쯔 배 2연패 이후
이세돌은 최정상급의 궤도에 오른듯 타이틀 수집을 시작하게 된다
다음 해인 2004년에는 왕시 5단을 상대로 2대0 승리를 거둬
세계 기전인 삼성화재배에서 우승을 거두고
2005년 창하오 九단을 상대로 도요타 덴소 배에서 우승
2005년 국내기전 맥심 입신최강전에서 우승



이세돌은 곧
이창호의 패도에 거대한 문이 되어
이창호의 시대를 위협하는 무서운 다크호스로 거듭나게 돼

 

반면
2004년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내며
중국에서 '상하이 대첩'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낸
6회 농심신라면 배를 한국의 역전 우승으로 이끈 이창호

아직은 선배 이창호가 위용을 떨치고 있던 2000년대 중반
이세돌은 언제쯤 이창호를 누르고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2편 끝

 

그럼
대한민국 바둑기사 
세계 최정상 계보의 마지막 승부사
이세돌


[쎈돌 이세돌] 1편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이세돌은 전남 신안군 비금도라는 섬에서 자란 
83년생 올해 나이 34살을 맞는 프로 바둑기사야
태어나기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고
이세돌이 두살배기 시절 비금도로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 돼
사실상 고향은 비금도인 셈이지

이세돌(李世乭)

그 이름을 보면 바둑기사라는 직업과 
묘하게도 잘 어울리지
이건 그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세돌의 목 뒤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점이 세 개가 있다고 해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는 '둘째 차돌', '셋째 세돌' 이렇게 지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러가지로 의미로 들어 맞았던 거지
이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돌'이라는 글자는 사실 본래 중국 한자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자야
'돌 석石'자에 '새 을乙'자를 받침 처럼 넣어 만든 우리나라식 한자거든
그래서 이세돌이 과거에 중국 기전에 나갔을 때는  石자로 바꾸어 표기 했었어
요즘은 돌을 그대로 표기 해주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大李', 이세돌을 '小李'라고 부르기도 해

大李未走 小李又至 (대리미주 소리우지)
큰 이씨가 아직 가지 않았는데, 작은 이씨가 또 나타났다.
ㅡ 중국 체육주보(중국의 신문사)에 나온 표제

이창호 때문에 공한증에 시달리고 있던
2000년대 초
중국으로서는 이세돌이라는 또다른 괴물이 또 나타났다며
이세돌의 성장을 보도하기도 했어

가끔 이 자를 이세돌의 아버지가 이세돌의 이름을 짓기 위해 
새로 만든 한자라고 잘못 알고있는 바둑팬들이 더러 있는데
이건 이세돌의 아버지가 만든 한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써오던 한자야
조선 말 의병장인 신돌석(申乭石) 또한 이름에 같은 한자를 써





그리고
어린 시절 이세돌이 자란
이 비금도라는 섬은 목포에서도 쾌속선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더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야

 

비금도 전경 


아름답지않나?
하트모양 해안으로 유명한 섬이야
갯바위 올라가서 낚시도 하고 바둑도 두며 
노년에 유유자적하면 딱 좋겠다
사실 비금도는 그전까지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는데 
이세돌 덕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지
알파고 전 이후에는 그 관심이 더 늘어나서 요즘 관광객도 많이 찾아온다고 해
요즘 이세돌의 어머니가 기분이 아주 좋으시단다
어머니는 현재도 비금도에 지내고 계셔

서해안의 섬 답게
주민들은 어업과 염업(천일염 생산)
농업(비금도는 소금과 시금치가 특산물)을 
생업으로 삼고있어
이세돌의 부모님도 귀향 후에 이곳에서 시금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해

 

이세돌의 가족사진
어머니 앞에 안겨있는 꼬마가 이세돌


이세돌은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어
사진에는 없지만 위로 큰 누나가 한 명 더 있어
바둑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 故이수오 씨가 
어린 시절부터 자식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서
이세돌의 가족들은 어머니 박양례 씨를 빼고 모두 바둑 실력이 수준급이야
(어머니는 바둑이 하도 재미가 없어보여서 한 번도 배우질 않으셨대)

사진의 우측 상단에 서 있는 큰 형은 이세돌과 같은 프로 바둑기사야

이상훈 九단

젊은 시절
프로기사로서의 성적은 평범했지만
그래도 프로 9단 이라는 것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은퇴할 때 까지
9단까지 못 올라가고 끝나는 프로기사도 엄청 많거든
프로 9단을 '입入신神'이라고도 부르는데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야
그정도로 이르기 힘들다는 거지
 
현재는 선수생활은 하지 않고 
바둑 프로리그 '신안 천일염'팀의 감독직을 맡고 있어
참고로 이세돌은 현재 신안 천일염 팀 소속의 에이스야
 

 

 

이세나 
월간바둑 편집장

그리고 작은 누나 이세나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큰 누나 이상희 씨 또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어)
현재 바둑 관련 매체인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맡고 있어
기력은 아마 6단 정도 된다고 해
(참고로 아마추어 단급은 7단까지 있다)

 

큰 누나 이상희 씨 또한 아마 5단급 실력에 
작은 형 이차돌 씨도 아마 5단급 실력이라고 알려져 있어
아마 5단이 어느 정도 급 이냐면
보통 바둑을 중계하는 여성 캐스터들이 아마 5~7단 정도 기력을 보이는데
남성 프로바둑기사 해설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바둑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인 거지
가끔은 옆에서 남자 프로해설들이 보지 못한 수를 찾아내곤 해

그래서
여성 캐스터들 중에는 프로기사의 바로 전 단계인 연구생 출신들이 많아
프로기사를 준비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 
캐스터나 바둑 매체 관련직 쪽으로 전향하는 여류기사들이 많거든
(일게이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 캐스터에 대한 내용은 글 마지막에 따로 정리하도록 할게)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이수오 씨와 바둑을 두고있는 삼형제


작은 형인 이차돌 씨는 사실 어려서 이상훈, 이세돌과 함께
프로기사를 꿈꿨는데
바둑책 한 번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마 5단급 실력에 도달했다고 해
그런데 동생 이세돌은 바둑을 배운지 2년만에 형 이차돌의 실력을 앞질러버리고
3년만에 호선(백에게 덤을 주고 흑백이 대등하게 싸우는 것)으로 
아버지를 이기는 수준까지 이르지
이런 동생을 보고 작은 형은 마음 속으로 프로기사의 꿈을 접었다고 해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가 
"차돌아 너는 아무리 봐도 머리가 나빠서 바둑은 안되겠다"라며 
목포 고등학교에 진학시켜버렸어
후에 아버지가 머리가 나쁘니 공부나 하라고 한 이차돌 씨는 
고등학교 진학 후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을 한다
참고로 이세돌은 바둑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했어
(형제 중에 머리가 나쁜 편이었던 작은 형이 서울대 컴공이라...)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가 
이렇게 수준급의 바둑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지
한 집안에 프로기사가 한 명 나오는 일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프로 바둑기사가 둘 씩이나 나오고
또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명문대에 진학했으니
이세돌의 집안이 보통 머리는 아닌 것 같아

이러한
알토란 같은 자식들을 키워낸 장본인인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는
비금도로 귀농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목포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교직에 몸 담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돌연 교편을 내려놓고 비금도로 가족들과 함께 귀농을 결정해
주위에서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 빚을 내서 서울로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교직까지 그만두고 섬으로 들어간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거듭 만류했다고 해

하지만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걸 보면 
이수오 씨가 비범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
다른 직업도 아니고 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이 아닌 서해의 외딴 섬을 아이들의 교육 장소로
택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지
 

소년 조훈현

 

소년 이창호


조훈현의 아버지가 그랬고 이창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언제나 미래의 위업에는 과거의 보이지 않는 결단이 뒤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특별한 성공을 거두는 이들은
늘 남들은 택하지 않는 특별한 길을 걷기 마련이지
이세돌 또한 그랬어

 

 

소년 이세돌

이세돌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처음 아버지로 부터 바둑을 배우게 돼
아버지는 매일 같이 어린 이세돌에게 사활문제를 숙제로 내주며
농사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숙제를 확인하고 
함께 바둑을 두며 이세돌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해
그러다 숙제를 틀리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내려졌고
어린 나이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울면서도
끝까지 손에서 바둑알은 놓지 않았다고 해

작은 누나 이세나 씨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이세돌은
또래 친구들이 해변가에서 뛰어놀 때도
늘 혼자 방 안에 앉아 바둑판 앞에서 사활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다고 해
누나는 그런 막내 동생을 보며 늘 안쓰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냉철한 훈련과
포기하지 않는 그의 끈기덕에
지금의 이세돌이 있을 수 있었을거야

프로기사가 되고 난 후
이세돌은
비록 자신이 중학교를 중퇴하고
학교에서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라고 
말했어





이세돌이 일곱살이 되던 해인 
1989년도
그 무렵 서울은 
중국에서 돌아온 국민적 영웅을 맞으며 한 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어

 

 

 

제 1회 잉창치 배 세계 바둑 선수권 우승 자축 카퍼레이드

어린 이세돌은 TV에 나오는 
조훈현의 세계 대회 우승 카퍼레이드 모습에 매료되었어
'멋있다. 정말 멋지다. 나도 꼭 저 사람처럼 되고싶다.'

이세돌은 이때 처음으로 프로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해

이렇게 보면
세계 바둑 최강의 계보를 잇는
조훈현과 이창호, 이세돌이 
참 묘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아버지 이수오 씨와 어린 시절 이세돌
1991년 KBS 바둑 큰 잔치에 참가한 모습


1991년도
아버지는 국민학교 2학년에 올라간 이세돌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 오게 돼
더 이상 작은 섬에서는 이세돌이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거야

 

 

서울에서 생활 중이던 소년 이세돌
 

당시 형 이상훈은 먼저 서울에 올라와
90년도
15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하여 프로기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형 이상훈과 함께 이세돌은 이때부터 서울에서 지내며
'권갑용 바둑도장'에서 
권갑용 사범의 밑에서 바둑을 수학하게 돼

 

 

권갑용 8단
이세돌의 바둑 스승이야
후진양성에 힘써 93년도에 한국기원 으로부터 
'바둑문화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훈현의 시대에는
바둑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이 불가피했고
이창호의 시대에는
프로기사의 내제자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 무렵에는 한국에도 바둑도장들이 생겨나게 돼
이세돌이 수학한 권갑용 바둑도장 출신의 다른 유명 프로기사로는
 

 

 
최철한 9단
 

 

원성진 9단
최철한, 박영훈과 함께 일명 '송아지 삼총사'로 불리며
(세 명 모두 85년생 소 띠)
신예 기사 때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박정환 9단
현재 국내 바둑기사 랭킹 1위를 달리며
28개월 연속 랭킹 1위를 기록하고있다
(국내 신기록)
하지만 세계 대회에서는 번번이 탈락하며 '국내용' 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지석, 백홍석, 이영구, 윤준상, 강동윤 9단 등
수 많은 프로기사 및 우승자를 배출하며 
현재 한국 프로기사 랭킹
상위 열 명 중 여섯 명이 권갑용 사범 도장 출신일 정도로
우리나라 3대 명문 바둑 도장 중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야
2003년에는 국내 최초로 도장 출신 프로기사 총합 단수가 100단을 돌파했어
현재도 계속해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내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
참고로 나머지 두 곳은 '허장회 바둑도장'과 '김원 바둑도장'이야


아무튼
이세돌은 권갑용 사범의 밑에서 3년 간 바둑을 공부하며
92년도 부터 4번째 도전만에 
95년도
만 12세의 나이로 프로기사로 입단하게 돼
(역대 최연소 5위의 기록)

이세돌 9단의 입단 동기로는 조한승 9단이 있는데
조한승이 이세돌 보다 한 살이 많아
어렸을 적 부터 붙어 다녀서 지금도 둘은 매우 친해
 

 

조한승 9단

조한승 9단은 동기인 이세돌 9단에 비해
우승 횟수가 적어서 최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기사라고 볼 수는 없어
하지만 유연하고 쉽게쉽게 두는 자신만의 확고한 색깔이 있는 것은 큰 장점이지
때문에 '유연한 승부사' '반상위의 신사'등의 별명으로 불렸어 

우승 성적은 많지 않지만
그의 성품 만큼은 누구 못지 않은 대인배야

2008년 주요 세계 기전 중 하나인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동기 이세돌 9단과 만나 아쉽게 패했는데
이세돌 9단 과 조한승 9단은 우승,준우승 상금 전액을
쓰촨성 지진피해 복구에 쓰일 수 있도록 전달하였고
2010년에는 군복무 중 출전했던 GS 칼텍스배의 준우승 상금 1200만원을
천안함 유족들에 전달했어
그리고 2012년에는 
국수전 우승상금 4500만원을 전액 유니세프 
봉사단체에 기부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단체전 부문 금메달을 획득
27사단 이기자 부대 수색대대 복무 중(상병)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된 조한승
좌측의 인물은 일베에서도 유명한 전인범 전 27사단장
현재는 중장 진급 후 육군 제 1 야전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 중이야
 

2012년 여러 기부활동으로 사회에 모범이 되어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는 조한승 9단
 

프로입단 동기인 이세돌과 조한승

이세돌과 함께 지내며 동생의 바둑을 봐주던 형 이상훈은
마침내 동생이 프로 입단을 결정짓게 되자 이틀 후
곧 바로 군 입대를 하게 돼
때문에 이세돌은 입단 후 곧바로 혼자 지내게 되었지

이세돌은
어려서 부터 집에만 있어서 주위에 연락할 만한 친구도 없었어 
더군다나 섬에서 자라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오다 보니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입단 동기인 조한승 9단이 이세돌 9단을 친동생 처럼 많이 챙겨줬다고 해
이세돌 9단은 그런 조한승 9단을 많이 따랐지

입단 직후 초初단 시절에는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해

이때까지 승단은 매해 치뤄지는 한국기원 자체적으로 치뤄지는
승단대회를 거쳐서 합격해야
승단이 됐거든

3년 후인 1998년도에
이세돌은 2단으로 승단을 하게 돼

그리고 그 해 3월 2일 이세돌의 생일날
비금도에서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가 세상을 떠나게 돼
서울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던 이세돌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이무렵 실어증에 걸리게 된다
함께 지내던 형 조차도 군에 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세돌은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어
그 후유증으로 이세돌은 지금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처음 이세돌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여자 목소리 같은
얇은 목소리에 놀라기도 해

이세돌은 처음엔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목소리 덕에 사람들이 자신을 더 많이 기억해줘서
그의 얇은 목소리가 맘에 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세돌은 거기서 무너지지 않고 
이듬해 곧바로 3단 승단

2000년도 부터 비로소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파죽의 32연승을 달리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무패소년' '리틀 조훈현' 등의 별명을 이때 얻게 돼
지금도 그렇지만
신인 시절에는 지금 보다 더한 공격형 기사였거든
속기파 공격형 기사였던 이세돌은 
조훈현의 젊은 시절 장기인 쾌속의 수법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어

이세돌은 신인시절 부터 이창호와 자주 비교가 됐어
"이창호가 흑도黑道라면 이세돌은 백도白道류의 기사다"
이창호의 바둑은 검고 무거운 느낌이 강한 바둑이거든
그 깊이가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깊다 못해 그의 바둑에서는 음울함 마저 느껴진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어

반면 이세돌의 바둑은
빠르고 날렵한 전광석화 같아서
언제나 환하게 빛나는 순백의 돌과 같았지
사실 이러한 평가는 이창호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신인 시절
공격형 기풍의 스승 조훈현, 유창혁과 비교되며 처음 쓰였었는데
이창호가 1인자에 올라선 후 이세돌이 등장했고
이창호와 이세돌이 비교되며 흑도와 백도의 표현 또한 다시 등장했어
 

신인 시절 이세돌의 모습

이세돌은 사진을 봐도 항상 웃는 표정이 많아
장난끼가 많고 통통튀는 성격은 언제나 주목을 받기에 좋았지
하지만 이창호는 언제나 잘 웃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았어
성격적인 부분에서도 기풍에서도 둘은 극 과 극에 서있었지

사람들은 
언제나 상극의 대결에 열광해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를 좋아하지

'신과 악마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최강의 창이냐 최강의 방패냐'

이창호와 이세돌 또한 그랬어
그래서 이 둘의 첫 대결이 언제쯤 펼쳐질지 늘 귀추가 주목됐지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
이세돌은 무섭게 성장했고
금새 이창호가 서 있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됐지

2001년
'제 5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많은 바둑팬들이 기다리던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결이 펼쳐지게 된다
창이냐 방패냐
수 많은 관심이 이 승부에 집중됐어

 

제 5회 LG배 결승전 제 1국
 

매서운 눈빛의 이세돌



최강의 방패와 최강의 창이 처음으로 맞부딪혔던 순간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어느 쪽일까




1편 끝

 


 

케이팝 조회수가

국적별로 몇%씩 비중을 차지하는지

 

어느나라에서 어느정도씩 보고있는건지 궁금해서 한번 알아보기로했다.

우선 전세계가듣는 본토 아메리칸팝이 어떤지한번 알아보자.

 

 

우선 전세계가아는 대스타 저스틴비버

 

전체뷰를 다 볼수는없고 2014년도부터 뷰를 측정하고있는데

 

약 70억뷰다. 어마어마하다.

상위 10위권까지의 유튜브조회수 비중을보면

 

총 70억에서 미국본토 13%, 중,남미권(브라질 아르헨티나,멕시코) 16%

                      서구권(스페인,캐나다,영국,프랑스) 12%

                      동남아권(태국, 필리핀)7%

상위 10위권이 47% 약 절반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나머지잡다한 국가에서 50%의 비중을 가지고있다.

 

쉽게말하면

 

미국본토에서 자기들꺼 팝 듣는수만큼이나 중남미권,서구권에서 미국팝을 듣고있고 동남아도 적지않고

상위10위 뷰를 다 합한것만큼의 사람들이 더 전세계 곧곧에서 미국팝을 듣고있다.

 

테일러스위프트를 보면


 

약 71억뷰 역시 어마어마하다.

 

총71억뷰에서 미국본토 18%, 중,남미권(브라질 ,멕시코) 12%

                        서구권(캐나다,영국,프랑스) 11%

                        아시아권(인도네시아, 일본)4%

상위 10위권이 45% 약 절반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나머지잡다한 국가에서 55%의 비중을 가지고있다

 

테일러스위프트경우는

저스틴비버만큼은 아니지만(아마 본토팬이 존나많아서일듯) 중남미 서구권에서 비슷하게 들어주고있고 아시아권도 적지않다.

그리고 위의 상위10위 그룹의 팬보다 더많은수의 팬이 전세계에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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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팝스타의 유튜브 뷰 조회수 비중을보니까

대충 분석이되는게

 

미국 현지팬 수가100이라면 서구권(영,프,캐나다,스페인) 다해서 100, 중남미(브라질,아르헨,멕시코) 100 동남아권(태국,필리핀) 50

그리고 남은 모든국가에서 약400정도의 비중이 흩어져있다고보면되겠다...

 

 

그렇다면 케이팝은 어떨까

 

엑소를 한번보자.


 

 

16억뷰? 진짜 놀랫다;; 뜨또랑 테일러스위프트가 70억뷰인데

한류스타가 16억뷰면 대단한거같다.

 

케이팝은 20위까지 더 자세히알아보자

 

총16억뷰에서 한국 16%. 일본6% 미국 5.7% , 홍콩+대만7%, 동남아권(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싱가폴) 36%

                         서구권(캐나다,프랑스,영국,러시아,터키) 5%, 중남미(페루,멕시코,브라질) 4%, 사우디1.2%

 

상위 20위권이 80 %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나머지잡다한 국가에서 20%의 비중을 가지고있다

 

 

빅뱅을아라보자


 

 

 

이야 13억뷰나되네.

 

 

총13억뷰에서 한국 13%. 일본12% 미국 6% , 홍콩+대만12%, 동남아권(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태국 싱가폴) 32%

                         서구권(캐나다,프랑스,영국,러시아,터키,호주) 5.5%, 중남미(페루,멕시코,브라질) 5%

 

상위 20위권이 85 %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나머지잡다한 국가에서 15%의 비중을 가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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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의 유튜브 뷰 조회수 비중을보니까

 

한국 현지 팬 수가 100이라면 일본75, 미국 50, 홍콩+대만100, 동남아 250

                                            서구권(캐나다,프랑스,영국,러시아,터키,호주) 40, 중남미(페루 멕시코 브라질) 30 정도

                                            그리고 남은 모든국가에서 120정도의 팬이뿔뿔이 흩어져있다.

 

확실히 한류가 어떻게펴져있는지 한눈에보인다.

아시아권에서는 주류문화로 자리 잡은것같고

서구권이나 중남미의경우 매니아층만있다고하기엔 의외로 수가 좀 많다. 대한민국 팬수의 약 절반이 유럽에, 약 1/3이 중남미에있다.

그리고 나머지 국가에서 한국팬수보다 약간 더 많은수의 팬이 골고루퍼져있음.

 

사실쓰면서 생각한건데

이것보단 좀 더 규모를 크게봐도된다. 한국음악이 중국에서 존나잘나가는데

중국은 유튜브가 막혀있거든. 바이두라는 자기들 동영상보는 사이트가 따로있다.

13억인구가 만약 유튜브를 봤다면 케이팝 조회수는 아마 최소50%에서 두배이상 그냥 늘어나지않을까 생각한다.

 

이상마치겠음


 


 

http://aqicn.org/map/europe/kr/#@g/36.2944/126.427/8z

 


우선 위에좌표가  실시간 전세계 미세먼지현황을 볼수있는 사이트임, 들어가서 원하는 대륙을 위에서 클릭후,

지도를  수동으로 옮겨줘야함.. (자동아니라서 첨에 헤맴)

 

 

글구 아래는 방금전 캡쳐한  한중일    잠시 비교하면서 보자

 

먼저 미세먼지 원흉으로  지적되는 대륙

 대도시는  300~500  ,,  촌지역은  100이하 가 많다   ,    이걸보면  대도시와 연관성이 있다는건  팩트 

 다음은 우리 대한민국

 

 

수도권은 200에 가까운수치,  중국발 미세먼지가 날아오는 경로에 있는 서해안 섬들과 촌지역은   50~60대 이고

같은 경로상에 있는 백령도가 120으로  높은수치를보여주고 있어

백령도가  섬임에도 120이 나온걸보면  분명 중국발이 어느정도 영향을 주는거 맞아,  같은 이유로 중국발이 모두는 아니라고도 할수있고

다음은 옆나라 일본

클린스시국,,, 부럽노,,   도쿄인근이  서울인근보다  절반수준..  

일본은 일단 자연정화작용을 해주는 바다로 둘러쌓여있고,  반도보다  해풍이 많기에  이런덕을 많이봄.

그래도 일본도 분명 어느정도 대륙발이 영향을 미치고있다고 봄

 

그럼 어느정도가 대륙탓이고  어느정도가  우리스스로 탓일까?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이럴경우

 

수도권의 가장큰지역 -   수도권가장작은지역  =>  우리스스로만들어내는 미세먼지 라 추정가능

 

일단 중국에서 오는건 전방위적으로  엄습하기에   대도시 농촌  똑같이 융단폭격하니깐.

 

예컨데 서울:180,   인근촌지역이 90정도 나오니.    180-90 = 90  이  우리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지는부분이라고 볼수있지

나머지 90이  중국발이거나  아님 한반도 자체의 기저미세먼지라 볼수있어(중국발+한반도자체기본 발생량). 

 

근데 여기서  한가지 짚어줘야할게   90과  180은    단순히 2배차이로 보면안됨..   인체에 해를주는 Trade off가  60이라고

가정한다면   (90-60)  vs (180-60)  로  4배의 해를 준다고 해석될수있어..

 

 

즉  중국이 수치상으로 30~40%만  가산시킨다 해도  , 생명에해를 끼치는 Critical Trade off 점을 기준으로 보며  3~4배의

악영향을 준다고 충분히 해석될수있다는거지.

 

마지막으로 같은시간대  유럽을 보자...


 

 

 

할말이없다....

이상...ㅠㅠ 주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