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브라질 월드컵이 개막하고 세계인들은 모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같은시각 북한군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작전명과 함께 38선을 넘으면서 남침하였습니다. 6.25전쟁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와 함께 약 4개월이 흐른 1950년 10월 25일, 운산 북쪽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치르던 국군 1사단 15연대가 상부에 적군의 전투 모습이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 같다는 보고를 하게 됩니다.

 

   중공군 1차 공세

그리고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잡히면서 중국의 참전이 확인되었습니다. 알고보니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지휘관 팽덕회는 제13병단 26만여 명의 병력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이미 북한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6.25전쟁은 사실상 중공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바뀌었고 전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중공군은 10월 25일 UN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1차 공세(1950.10.25 ~ 11.7)를 개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대부대를 투입하여 UN군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하여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우리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제6사단 선두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서부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대규모 공격을 통해 북쪽으로 진격하던 UN군의 작전계획을 무산시키며, 청천강선으로 밀어냈습니다. 이때 국군2군단 6개 연대 중 4개 연대가 재편성을 해야 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많은 지휘관들이 실종·전사했습니다. 
 

   중공군 2차 공세

11월 6일 중공군이 갑가지 사라진 이후 24일까지 18일 동안 청천강 일대의 전선에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중공군이 아직 압록강 남쪽에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중공군 대부대의 뚜렷한 움직임은 식별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 사령부는 중공군이 갑자기 물러난 것은 싸울 만한 의지도 전력도 없기 때문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공세를 계획하게됩니다. 맥아더는 “이번 작전이 전쟁의 최종공세가 될 것이며, 10일 이내에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며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그렇게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24일‘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하게됩니다.


하지만 미군과 국군의 대공세는 첫날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곳곳에서 중공군의 움직임이 식별됐고 진격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특히 평안북도 일대의 울창한 삼림지대 속에서 작전하던 미9군단과 국군2군단은 평안북도의 높은 산 깊은 계곡 사이에 펼쳐진 끝없는 숲속으로 진격하는 것에 서서히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유엔군의 전면 공세 재개 하루 만인 11월 25일 역으로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눈앞의 현실이 됐습니다. 중공군 38군은 이날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국군에 비해 3~4배나 되는 병력을 투입해 국군2군단 예하의 국군7사단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바위처럼 버티며 중공군 38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던 7사단도 병력 열세 속에 포위망에 빠지자 대응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시간 국군7사단 오동쪽 영원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2군단 예하 8사단도 역시 3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 42군의 포위망에 빠졌습니다. 미군 주력부대 역시 위기상황이었습니다.11월 24일부터 시작한 크리스마스 공세는 처음부터 중공군이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져든 완전히 실패한 작전이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마치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공세를 중단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중공군의 전술은 영원을 거쳐 순천 평양까지 우회하여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섬멸하여 전쟁을 바로 끝낼 참이었으나 이제 막 참전한 터키군이 덕천에서 중공군을 3일동안 막아냅니다.

 

 

이때가 사실 6.25 전쟁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몇 안되는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만약 이 3일을 터키군이 못버텼으면 연합군 대부분이 전멸할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이 전투로 터키군은 참전하자마자 절반을 잃었으나 연합군이 후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중공군 3차 공세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38도선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잇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삼고, 김포반도에서 포천·김화에 이르는 지역에는 미 제1·9군단을, 중부 산악지역에는 국군 제2·3군단을, 동해안 지역에는 국군 제1군단을 배치했습니다.

 

▲팽덕회와 마오쩌둥

12월 중순,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극도로 지친 병력으론 미군 추격이 불가능하다며 마오쩌둥에게 전군의 휴식과 부대정비를 건의했습니다. 2~3개월간 휴식·정비를 한 뒤 이듬해 봄쯤 38도선을 돌파, 서울을 점령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즉각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팽덕회는 1950년 12월 31일 제3차 공세를 개시했습니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이 공세는 새해 첫날을 앞두고 실시됐다고 해서 '신정공세'라고 불렸으며, 중·북연합군 9개 군단 총 30만여명이 투입됐습니다. (이때 북한군도 김일성이 지휘권을 중공군사령관에게 넘겨줬기 때문에 중공군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서부전선의 5개 군단과 중부전선의 4개 군단이 문산 우측의 국군 제1사단과 동두천의 국군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1951년 1월 2일, 국군 1사단과 6사단 주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중부전선의 국군 3사단도 집중공격을 받았습니다. 서울 동측방이 무너지자 서울지역 아군 10여만명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처했고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즉각 서울을 포기했습니다.

 

 

1월 4일 밤, 서울은 중공군 제39군단 예하 1개 사단, 제50군단과 북한군 제1군단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렇게 또 다시 수십만명의 피란민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1월 7~8일 수원과 인천까지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미군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1월 8일을 기해 대략 37도선에서 추격을 멈췄습니다.

 

   중공군 4차 공세

중공군 4차공세는 1951년 2월 11일부터 일주일 간의 벌어졌습니다. 중서부 전선의 연합군을 섬멸할 목적으로 수십만 중공군 대군이 또 다시 남하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중공군의 남하 돌파구는 양평의 "지평리"였습니다. 여기서 지평리 전투가 벌어지게됩니다. 이 지평리만 접수하면 중공군으로써는 4차공세도 성공시키게 되는거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공군은 지평리의 후방인 수리까지 차단하여 후방지원을 막은 후 약 4개 사단으로 포위한 다음 야간에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2 보병사단 23연와 프랑스 대대는 1개 연대와 1개 대대의 병력으로 중국 인민해방군 39군(4개 사단)의 공격을 무려 3일 밤낮동안 전부 막아내게 됩니다.

 


급기야 미군 특공대가 후방의 곡수리를 돌파하여 연합군과 지평리가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이 때 참여한 중공군은 그 피해가 너무도 막대하여 이후 전투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할 정도 였으며 지금까지 1~4차 공세 중 유일하게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로 기억되었습니다. 이후 서울까지 탈환하였습니다.

 

   중공군 5차 공세

중공군은 4차 공세가 실패하고 오히려 유엔군의 반격에 북으로 밀려났지만 중공군은 새로운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는 5차 공세에 약 27만명과 북한군 약 3만5천명으로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를 격멸시켜 노동절에 맞추어 서울에 재입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습니다.

 


5차공세는 4월 21일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중공군의 19병단은 임진강 부근에 위치한 미 1군단을 목표로 했고 9병단은 중부전선의 춘천 사창리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 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6사단이 중공군에 의해 돌파를 당하면서 중부전선에 큰 구멍(16km의 공간)이 뚫리게 되었습니다.

 


이 지점을 방어하기 위해서 영연방 27독립여단이 급파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영국군을 주축으로 하여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군이 편제되어 있었습니다. 27독립여단은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이 전투를 가평 전투라 부릅니다. 가평 전투에서 영연방 27독립여단은 3개 대대 병력으로 3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습니다.

 

 

영국군과 호주군은 가평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습니다. 캐나다군은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국군 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였으며 뉴질랜드군은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습니다.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5차 공세에서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되었습니다.

 

 

   중공군 6차 공세

5차 공세가 좌절되었음에도 마오쩌둥은 6차 공세를 이미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5월 12일, 중공군 사단들이 공격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5월 16일, 9개 중공군 사단과 4개 포병 연대는 미군 정찰기에 탐지되지 않고 화천 저수지 동쪽 인제 가까이에서 우리 국군 5, 7, 9사단에 대한 공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얼마 후 중공군은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6차 공세 하루 만인 5월 17일 밤 강원도 인제군 현리 일대의 3군단(5, 7, 9사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패배하고 퇴각하였습니다. 현리전투라고 칭해지는 약 9일간의 전투는 사실상 일방적 패배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3군단 지휘부와 사단 지휘부가 먼저 도주를 시작하면서 전 군단이 패닉에 빠져 일시에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9사단장 최석 등 일부 고위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을 떼고 도주했습니다. 그렇게 3군단은 3일 동안 무려 70km를 도망쳐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됐지만 살아남은 병력은 4만명 중 절반인 2만명 뿐이었습니다.

 

 

 

5월 20일 미 9군단이 반격을 시작하였고 23일에는 미 10군단도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지친 상황이었고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5월 말 유엔은 공산군이 5차, 6차 공세를 시작하기 전의 전선 대부분을 회복하였습니다.

 

 

6차에 걸친 공세를 통해서 중공군은 더 이상 대규모 공세를 치를 능력이 없었고 38선 부근의 대규모의 지하 방어 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양측의 피해가 막심한 상태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내심 휴전을 원하였고 결국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것은 더욱 더 처참한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협상은 2년을 넘게 질질 끌었고 그 사이 양측은 서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 1년 간보다 더 참혹하고 무의미한 전투에 매달렸습니다.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진 것입니다.

 

   중공군 7차 공세

그리고 6차 공세에서 무려 2년이 지난 1953년 7월에 7차 공세가 펼쳐집니다. 휴전협상을 하는 2년동안은 고지전이 주류였고 전면 영토변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7차공세는 사실 휴전협정이 이미 거의 완료된 상태에서의 싸움이었습니다.

 


위 지도를 보시면 지금의 휴전선과 비슷하긴 하지만 중부전선에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북한의 금성지역인데 사실 6차공세가 끝났을 당시만 해도 금성지역은 우리나라 영토였습니다. 그런데 7차공세에서 무려 5개 군단급의 수십만 대군이 금성지역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바람에 결국 금성천 북방 지역의 땅을 북한군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만약 끝까지 버텼으면 국군 6사단과 8사단은 후방 차단되어 전멸했습니다. 당시 이 7차공세에서 중공군은 금성돌출부를 공격하여 자기네들 땅으로 만들고 금성천까지 건너 내려와 백석산 적성산 초입까지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국군이 백석산 적성산에 방어선을 구축해 겨우 막아냈고 다시 금성천 남단까지 공격하여 중공군을 쫓아냈습니다.

 


연합군은 금성천을 건너 다시 돌출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휴전협정 파기를 우려한 연합군 지휘부의 명령으로 거기서 반격을 멈추게 되었고 결국 그대로 휴전선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중국의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참전 결정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3년 이상 장기화되면서 중국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가져왔다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면 후회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한반도에 미래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