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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무런 연줄 없이 능력만으로 미 육군 항공대와 미 공군 장군까지 지냈던 전설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중 도쿄 대공습을 지휘해 일본을 초토화시킨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 장군입니다. 그는 1906년 11월 5일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육군 ROTC를 거쳤으며 1940년에 대위, 1941년에 소령까지 빠르게 진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이 진주만 공습으로 폭격을 당하게 되면서 미국은 즉시 일본과 추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당시 르메이는 육군항공대 중령으로서 제8공군 지휘관이었습니다. 르메이는 전투를 위해 영국에 도착하여 첫번째 출격을 하였는데 자신이 지휘하는 B-17 폭격기들에게 목표에 도달하면 폭격이 끝나기 전까지 회피 기동을 포기하고 대형에 맞춰 직선으로 비행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가장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습니다.

 

 

사실 말도 안되는 너무 위험한 명령이었지만 르메이는 독일군 88mm 대공포의 예상 격추율을 계산해본 결과 비행단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탄착률이 종전의 2배로 늘어나고 목표 상공에서 7분간 직선 비행을 하면서도 대공 사격에 폭격기 한 대도 잃지 않는 성공을 거두면서 르메이 중령은 고속 승진을 이어갔고 1943년 말 준장으로 진급해 장군이 되었고, 1944년에 37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 그 당시 전략 폭격의 당대 최고 전문가였던 르메이는 일본 본토 폭격의 최적임자로 제21폭격기사령관이 됩니다. 부임 직후 르메이는 기존의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분석한 결과 저고도 폭격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고고도 정밀 폭격이 아닌 저고도 폭격을 해야 했던 이유는 당시 일본 상공에서 정밀 폭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좋은날이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리 맑은 날에 최신예 정밀폭격용 관측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밀폭격의 명중률은 저고도 폭격보다 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으려면 공장 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전쟁 수행원까지 제거해야 하는데 고고도 정밀 폭격은 주요 전략타겟 몇 개만 부수고 끝날거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비싼 가격의 고고도 폭격기를 투입해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미 공군 전력은 육군과 해군에 계속 종속되어 영원히 독립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저고도 폭격을 결심합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당시 르메이는 일본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이었고 독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르메이 의견대로 도쿄 대공습을 저고도 폭격으로 야간에 실시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팜탄을 도쿄 시가지에 투하했습니다. 당시 공습으로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르메이는 일본이 정신차리고 방공망을 재조정하기 전에 타격하기 위해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으며 3월 13~14일에는 오사카, 3월 16~17일은 고베, 3월 18~19일은 다시 나고야를 폭격하였습니다. 불과 10일만에 일본의 주요도시 4개를 완전히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 도시가 미공군의 다음 공격 목표입니다. 오른쪽 사진에 찍힌 도장은 공습예고가 뿌려진 도시

 

그렇게 대규모 공습 이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폭격 경고문을 뿌렸습니다. 당시 폭격 경고문이 일본 민간인들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르메이는 폭격 경고문에 적혀진 도시를 꾸준히 폭격을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5월 23~25일에 걸친 대공습에서 500기가 넘는 B-29 폭격기가 도쿄를 융단폭격하였으며 5월 29일에는 519기의 B-29 폭격기가 요코하마를 폭격하였습니다. (당시 전투기 P-51 머스탱이 100기 이상 동행하면서 폭격기들을 호위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6월 초가 되면서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폭격할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폭격이 끝났다는 것이 아니였고 대도시는 끝났으니 중소도시를 폭격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날아갔습니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 정도...) 이후 B-29에 의해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습니다.

 

*1963년 자신이 폭격했던 도쿄를 다시 찾은 르메이 장군

 

*미군 전략사령부(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 : USSTRATCOM) 사령부 복도에 걸려져 있는 르메이 초상화

 

지금 그를 히틀러도 울고 갈 전쟁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르메이는 냉전 시대 미 공군의 기틀을 세워 지금 미 공군이 미군 전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데 큰 공적을 세운 명장입니다.

 

*르메이의 별명이 Big Cigar로 불리는 이유는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자주 사진에 찍혀서 입니다.

 

오랜시간 일본은 르메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만 그는 사실 엄청난 애처가이자 딸바보였다고 합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