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전투기싸움에는 가장 중요한

 

파일럿...그중에서도 정말 이름 날렸던

 

유명한 전설의 파일럿들을 알아보려고합니다.

 

 

 

격추기록으로만 따지면 대부분이

 

 독일에 파일럿이기때문에

 

각나라에 에이스

 

전설의 파일럿으로 소개할게요!

 

 

 

윌리엄 에이버리 비숍

 

국적 : 캐나다

 

격추수 : 72

 

 


윌리엄 에이버리 비숍은 이후 설명할

 

파일럿들과는 달리

 

 

1차대전 시절의 에이스에요. 

비숍은 캐나다 왕립 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전쟁 초기에는

 

제 8 소총기병대에 배속되었어요

 

 


캐나다 원정군으로 해외에서 복무하던 비숍은

 

이후 1915년에 영
국 육전항공대로

 

들어가게 되었고,

 

1917년에 조종 자격을 획득합니다. 

 

 

<SE5a>


주 기종은 당시 영국에서

 

생산한 SE5a 복엽기에요. 

사실 비숍이 파일럿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뭐 그저 그런 파일럿이

 

될거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놀랍도록 뛰어난 시력과 피나는 노력 덕분에

 

순식간에 명사수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12일 동안에 25기를 격추시킴으로써

 

공군 수훈 
십자 훈장을 받는걸 시작으로 

1917년에는 단독으로

 

독일군의 소규모 비행장을

 

공격해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을 정
도였습니다

 

 


위에서 말했지만 1917년에

 

비행자격을 획득하고는

 

바로 그 해에 수십대를

 

격추시키고 빅토리아

 

십자 훈장까지 
받았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에이스였는지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비숍은 전쟁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고,

 

수를 누리다 1956년 겨울에 죽었어요.

그가 남긴 비행수칙으로는


"공중전투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사격이다.

 

그 다음은 전투에 돌입하며

 

사용하는 전략이며,

 

마지막이 조종하는 실력이다
."


과연 사격의 달인답게 사격을

 

가장 강조했어요.

 

물론 복엽기를 가지고

 

자유자제로 기동할 정도로

 

뛰어난 비행실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과연 1차대전의 에이스다워요!

 

 

 

 

 

 

 

 

 

 

 

찰스 엘우드 예거

 

 

국적 : 미국

 

격추수 : 11.5

 

 

 
척 예거라고 많이 알려져있어요.

 

2차 대전 당시에 활약했던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의 에이스에요.

 

그런데 격추수가 소수점인게 이상하죠?

뭐 대충 예상하겠지만 다른 동료와

 

공동격추를 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이후에 계속 설명할

 

다른 에이스 
파일럿들에

 

비하면 약 12대라는 기록은

 

초라해보일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는 충분한 파일럿과

 

전투기의 공급 덕분에

 

일정기간 작전을 수행하면 후
방에서

 

후임양성이나 행정업무 등으로 

잠시 휴식기?를 보냈기 때문에

 

격추수를 팍팍 올리기가 어려웠었죠.

 

 


반면에 공세가 밀리기

 

시작한 독일같은 경우에는

 

만성적인 파일럿 부족으로 베테랑들을

 

아주 노예처럼 악착같이 써먹기도 했고, 

상대하던 적의 공군력 수준차이도 있었기

 

때문에 놀라운 격추수가 나올 수 있었어요. 

 

<P-51 머스탱 >


척 예거는 1942년 파일럿 교육에

 

들어갔고 상기했듯이

 

미국 육군항공대에서 P-51 머스탱을

 

주기종으로 활약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기체에는

 

항상 부인의 이름을 따서

 

'Glamorous Glennis'라고 써넣었죠.

 

 


 

예거는 사실 2차대전 전투기 에이스였을뿐

 

아니라 전후에 많은 활동을 했어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 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파일럿'

 

이라는 타이틀이에요. 

1947년에 시험용 기체인 X-1에 탑승하여

 

수평비행을 하며 공식적으로

 

음속을 
돌파했어요. 

이후에는 파일럿 양성에 힘을 쓰기도 했고

 

최종적으로는 준장으로 전역했습니다.

 

사병 출신에서 부사관이

 

되었다
가 위관장교를 거쳐 

장성이 된 흔치 않은 케이스지였죠.

 

그만큼 실력있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정정
하게 살아계십니다

국적 : 프랑스

 

격추수 : 11

 

 


피에르 클로스테르망은

 

1921년 브라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브라질에서

 

근무하던 외교관이셧어요. 

 

 클로스테르망은

 

고작 16살 코흘리개 시절에

 

이미 비행자격을 획득했어요 

물론, 전투기 비행자격이 아니라

 

민간기였지만 그래도 엄청난거죠. 

 


 프랑스가 독일에게 함락된 뒤에

 

영국으로 
건너가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전투기 파일럿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Fw 190 >


첫 격추기록은 1943년인데 첫 격추기록이

 

독일기체
인 Fw 190(포케볼프) 두대에요
 
리고 1944년, 전설의 레전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
행되자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땅에 처음으로 상륙한

 

프랑스인이 
되는 영광도 누렸어요.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에는

 

274 비행대로 이동해서

 

템페스트 전투기를 주력기로 사용했는데,

 

종을 바꾸면서 이틀만에

 

격추기록을 세웠어요. 

 

< 템페스트 전투기 >


그 제물이 된 것은 독일의 Bf-109

 

매셔슈미트 전투기였는데,

 

재밌는건 정
식 전투작전으로 출격한게 아니라 

비행기에 장착한 캐논의 테스트를 위한

 

비행에서 세운 격추기록이라는거에요

 

<Bf-109 매셔슈미트 > 


그렇게 에이스로서의 실적을 착실히

 

쌓아가며 군에서도 활약했고,

 

전후에는 60년대까지 프랑스 정계에도

 

진출했을 뿐 아니라 

후임양성에도 힘쓰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어요.

 

 

 

 

 

 

 

 

 

 

리디아 리트뱌크

 

 

국적 : 소련

 

격추수 : 10대 이상

 

 

 

 

사실 그냥 에이스라고 해도 쟁쟁한 사람들인데

 

트뱌크는 무려 전 세계에서 단 두명뿐인

 

2차대전 여성 에이스에요

 


그녀의 별칭은

 

스탈린 그라드의 하얀 장미였어요. 

 

 


온통 남자뿐인 칙칙한 파일럿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녀에
겐 딱었다고 생각이들어요 

리트뱌크 역시 에이스 답게

 

어린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어요. 

 

리트뱌크는 그녀가 살던 지역의 비행클럽에서

 

고작 14살에! 반 공식 허가를 받고 가입했어요. 

그리고 역시 미래의 에이스답게 테스트를

 

통과하고 15살에 첫 비행을 했어요.

군에선 보기 드문 여성파일럿이었기에

 

동료 파일럿과의 로맨스가

 

있던건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어요. 


 

알렉세이 프롤로비치 솔로마틴은

 

그녀와 함께 편대를 편성하고

 

작전에 나가는 일이 많았어요. 

알렉세이 프롤로비치 솔로마틴

 

역시 39대라는

 

격수추를 가진 어마어
마한 에이스였죠.

 

하지만 솔로마틴은 기종변환을 하면서

 

시험비행을 하던 중에 

그만 안타깝게도 추락사고에 휘말리고 말아요. 

 

 


전장에서 이어진 인연은 상대의 죽음으로 인해

 

언제 끊겨도 이상할게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슬픈건 슬픈거죠. 

리트뱌크는 솔로마틴의 죽음 이후에

 

큰 충격을 받았음에 틀림없었어요. 

리트뱌크의 기체를 담당하던 정비사는

 

그녀가 솔로마틴이 죽고난 이후에 오로지

 

비행작전에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싸우고 또 싸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연인일지, 아니면 전우일지 모르겠지만,

 

소중한 사람이었던 솔로마틴의 죽음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거겠죠.

 

 


그녀의 마지막 비행은 1943년 8월 1일이었고,

 

그 이후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어요.

심지어 추락한 기체나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은 그녀가 포로가 되어

 

잡혀갔가도 판단하고 

그 엄청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리트뱌크는

 

훈장을 받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명예를 위해

 

무려 36년이나 수색을

 

계속해오던 사람들도 있었고,

 

결국에는 1979년에 추락한 
그녀의 애기와

인근 마을에 그녀의 시신이 매장된 무덤을

 

발견하게 되며 리트뱌크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음모론은 언제나 존재해요.

 

그녀는 사실 추락 순간에 죽지 않았으며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는 주장도 있고

치료를 받은 후에 신분을 숨기고 결혼을 하여

 

조용히 살아갔다는 주장도 나오는 등,

보기 드물었던 여성 에이스답게 마지막까지도

 

수 많은 가십거리를 남기고 떠났어요.

 

 

 

 

 

 

 

 

 

 

 

프랑코 루키니

 

국적 : 이탈리아

 

격추수 : 약 26

 

 

프랑코 루키니는 이탈리아 최고의 에이스였어요.

 

역시나 에이스답게 16세의 나이에 이미

 

글라이더 조종자격을 획득했어요. 

하도 괴물같은 에이스들만

 

소개해서 이젠 십대 시절에

 

비행 자격을 얻었다는 얘기는 식상할 정도네요. 

1935년에 이탈리아 공군에 입대했고

 

37년에 스페인 내전에 지원해서 총 5대를

 

격추하며 2차대전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에이스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어요. 

 

 


2차대전 발발 이후에는 제 4비행단

 

10비행대대에 배속되었고,

 

2차대전 이전부터 절친한 전우였던

 

3
명의 파일럿들과 

함께 작전에 참여하여 영국 비행정을 격추시키고

 

승무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공을 세우게 되었죠.

리고 이날의 격추가 바로 2차대전에서

 

이탈리아 공군의 첫 격추기록이기도 해요.

 

역시 에이스는 달라도 뭔가 달랐었죠.

 

스페인 내전에서 탑승기 CR.32와 차트를 점검 중인 프랑코 루키니 소위 


후에도 그는 공중에서

 

아주 호전적인 전투스타일로

 

격추수를 착실하게 늘려가며

 

1942년 10월 즈음에는 

총 25대를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탑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굳혔어요. 

하지만 폭격기를 공격하는 중에 반격을 받아

 

기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는 추락하고말아요. 

그래도 역시 이탈리아의 수퍼 에이스답게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했고,

 

성공적으로 비상착륙을 
함으로써

 

목숨을 건지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어요. 

이듬해에 완쾌된 루키니는

 

다시 작전에 투입되었고

 

폭격기 편대를 공격
하는 작전에서

 

3대에 치명타를 입히고

 

1대를 격추하며 에이스의 실력을 뽐냈으나 

이번에도 안타깝게 적의 반격을 받고 추락하고 말아요.

 

시실리 섬에서 주둔할 당시의

프랑코 루키니(左)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그를

 

외면했는지 결국 살아남을 수 없었어요.

이후에 공적을 인정받아 이탈리아는 루키니에게

 

금성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2차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독일도 2급 철
십자 훈장을 수여했어요. 

그리고, 그가 소속되었던

 

제 4비행단은 당시의 마크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신형기가 도입
되면

 

첫번째로 지급받는 최우수 부대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무토 카네요시

국적 : 일본

 

격추수 : 30

 

 

 


역시 거만해.. 일본은 쓰기가 좀 싫지만 

 

 그래도 2차대전 당시의 각국의 에이스들을

 

골고루 소개하
기로 했으니

 

일본을 빼놓을 순 없죠. 

카네요시는 거창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어요.

 

무려 '하늘의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이
름이었죠. 

 

 


무사시는 일본의 이름난 검호에요.

 

각종 게임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골소재죠 

그가 쓴 병법서인 오륜서는

 

현대까지도 인정받는 교본이에요.

 

 


런 무사시의 이름을 이어받을 정도로

 

무토 카네요시가 뛰어난 에이스

 

 
파일럿이었다는 얘기겠죠. 

사실 일본 파일럿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가

 

어려워서 재미난 내용을 담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 비행에 대해서만 알아볼게요.

일본의 패색이 점점 짙어지던 1945년 7월,

 

일본의 군항을 미국 함재기 편대가

 

 
습격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요격임무를 받고 출동한 카네요시는

 

그 요격임무 도중에 통신두절을

 

끝으로 돌아오지 못
했어요. 

결국 카네요시의 비행기의 잔해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처리 되었다가 이후에 전사처리가

 

되었고 중위로 올라갔습니다
.

 

 

 

사카이 사부로

국적 : 일본

 

격추수 : 약 64기

 

 


사카리 사부로는

 

일본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사람이었어요. 

일본을 위해 싸우던 군인이긴 하지만

 

당시 상부의 정신나간 작전과 명령에 반감을 가지고

 

적에게도 최소한의 예우를

 

보이던 파일럿이었어요 

열악한 일본군에서 에이스 파일럿으로

 

떠오른 만큼 사부로는 격동적인 삶을

 

보내야 했어요. 

보급과 온갖 지원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사부로는 에리스 파일럿으로서

 

그 전과를 착실히 쌓아갔어요. 

 

 


한 번은 죽음의 위기에 근접한 적도 있었는데요. 

전쟁에 참여한 파일럿이 죽음에 근접하지 않은

 

순간이 있긴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번은 정말 엄청난 위기였어요. 

 

<F4F 전투기 >


미군의 F4F 전투기를 발견하고 후방으로

 

날아가 공격을 시도했는데

 

하필 그 전투기는 후방에도 기관총이

 

달려있는 어벤저였던거죠.

그것도 수 대가 뭉쳐있는 편대였어요!

 

쿠킹호일같은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는

 

그 공격을 버틸 수 없었고, 

 

 


기체가 송송송뚫리며 사부로

 

역시 기관총에 두둘겨맞아요

게다가 오른쪽 시력마저 잃게 되었고

 

더 이상 희망이 없었어요.

 

동료들은 그가 죽은줄 알고서 돌아가버렸고, 

부로 자신도 이미 틀렸다고

 

생각해서 바다에 추락할까

 

했지만 결국 사경을 헤메이는 순간에도 근성과

 

노력으로 버티고 버텨서 기지에 무사귀환했어요. 

물론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서 일본군은 사부로를

 

더 이상 파일럿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작전에서 제외시켰어요.

하지만, 패색이 짙어졌던 1945년에 일본은

 

카미카제까지 해가며 저항했고,

 

파일럿이 부족해지자

 

사부로는 다시 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역시 카미카제 명령을 받았고.

 

60여대를 격추시킨 일본의 수퍼에이스를

 

1회용 자살폭탄으로 쓰려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미국에 저항하다 패전을 맞이했어요. 

 

 


전후에는 전범국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수 많은

 

공적(일본 입장)에도 불구하고 궁핍한 삶을

 

이어가다가 자신의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

'대공의 사무라이'라는 책을 쓰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어요. 

 


그는 당시 일본 군부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하던

 

사람 중 하나였고 그의 책에도,

 

이후의 인터뷰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피력했어요.

 

국적 : 핀란드 

 

격추수 : 94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은

 

핀란드 최고의 에이스 파일럿이에요 

2차대전에서 핀란드라는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게

 

아니라서 핀란드의 전쟁영웅들은

 

그리 유명하지가 않죠

격추수로 정렬을 하면 괴물같은 독일을

 

제외한 순위에서는 유틸라이넨이 1등이에요. 

앞서 설명한 에이스들과는 달리 유틸라이넨은

 

무전병으로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비행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역시 노력과 근성으로 실력있는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던거죠.

재미있는 점은 유틸라이넨은 단순히

 

격추수만 많은 파일럿이 아니었다는겁니다 

유틸라이넨은 단 한번도 적기에게

 

피탄당한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그와 함께한 윙맨들 역시 한 명도

 

격추당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거의 아군의

 

수호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그렇기 때문에 유틸라이넨

 

역시 자신의 격추기록보다도

 

피탄경험 전무+동료기 전원 생존이라는 부분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게다가 하늘의 신사인

 

파일럿답게 전투불능에 빠진

 

적기는 그대로 돌려보내는 관대함까지 지니고 있어

 

적국에서도 존경을 받는 파일럿이었어요. 

 

 

 

 

 

 

볼프 디트리히 뷜케
국적 : 독일

 

격추수 : 162

 

 



역시 독일의 에이스에요.

 

격추수에 자비가 없죠... 뷜케는 프랑코 루키니처럼

 

스페인 내전시절부터 활약한 파일럿이었어요. 

1934년에 육군 카발리 연대에 입대했다가

 

조종자격을 획득하고 1939년에

 

스페인 내전에 파견됐어요. 

하지만 루키니와 달리 뷜케는

 

여기서 격추기록을 쌓지는 못했죠.

 

 

 

그리고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제 53 비행단에 배속되어

 

첫 격추기록을 세우게 되죠 

이후 1940년에 프랑스 공군에 의해 격추당하고

 

포로가 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알다시피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풀려나서

 

다시 복귀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에이스로서의

 

두각을 보이고 착실히 격추수를 늘려갔어요.

 

 


하지만 도버해협 상공에서

 

또 한번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고,

 

이번에도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어 곧 복귀할 수 있었죠. 

독소전이 벌어지던 동부전선에서도 수십대를

 

격추하며 에이스로 활약했고,

 

42년경에는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이동하여 

다시 수십대를 격추하는등

 

에이스의 위용을 뽐냈어요. 

하지만 뷜케는 파일럿으로서의 재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지휘관으로서도 매우 유능했어요. 

때문에 전쟁 말에 극심한

 

고급인력난을 겪던 독일 입장에서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아 출격금지 명령을 내리고

 

지휘관 활동에 집중하도록 했을정도였죠. 

그래도 기어이 뷜케는 명령을

 

어기고 몰래몰래 비행을

 

나가며 추가로 6대를 더 격추시켰어요.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전선은 밀려밀려 뷜케가

 

출격 금지 명령을 어겨가며 분전했지만

 

뒤바뀐 공세를 바꿀 순 없었고, 

결국 미국의 P-51머스탱기와의

 

교전 끝에 한대를 격추시키고

 

또 다른 머스탱에세 격추당해 사망하고 말아요.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국적 : 독일

 

격추수 : 301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은 전세계에서

 

공식 격추수 300을 넘긴 

 

 단 두명의 파일럿 중 한명이이에요. 

하지만 나머지 한명이 너무나도

 

유명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진 감이 있죠. 

어쨌든 바르크호른은 1937년 18세의

 

나이로 독일 공군에 입대했고,

 

2차대전이 발발하자 소위의 계급으로

 

전투파일럿이 되어 참전했어요. 

사실 바르크호른은 전쟁 초기에 개인 격추기록을

 

거의 올리지 못했어요. 

무려 120여 차례의 출격 이후에

 

최초의 1kill을 달성할 정도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노력덕분인지 전쟁 중기에는 비약적으로

 

기록을 쌓아가기 시작합니다

43년에는 격추기록 105기를 기록하고서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았어요. 

그리고 계속 격수기록을 쌓으며

 

제2비행대 사령관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그래도 지속적으로

 

비행소티(이륙-착륙 1세트가 1소티)를 늘려가며

전쟁 말에는 출격횟수 1000회를 돌파했어요. 

 

 


아무리 뛰어나도 1000여회나 비행했으면

 

사고를 피해가긴 어려웠을거에요. 

결국 44년 5월에 격추당하고 다행스럽게도

 

목숨은 건진채로 5개월간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무사히 재활에 성공한 바르크호른은 

다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산 격추수 300을 넘기게 되버렷지만. 

하지만 그 시점에서 독일은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록을 세우지는

 

못하고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바르크호른은 근접난전 스타일의 도그파이팅으로

 

301대의 기록을 세웠기 때문에 조종술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는걸 알 수 있어요.

 

 

 

 

에리히 하르트만

 

국적 : 독일

 

격추수 : 352

 

 

 



드디어 나왔어요!

 

2차대전에 관심이 있는 남자들이라면

 

왜 이 인간이 안나오나 했을거에요. 

독일 뿐 아니라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리고 유사이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격추기록을 가지고 있는,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운

독일의 울트라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이에요

 

 

 

 

무려 352대에요....

 

2차대전 당시엔 비행기가 쏟아져나왔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350여대면

 

일국의 공군전력이죠. 

그만한 전력을 하르트만 혼자서 날려먹은거에요. 

때문에 소련군이 붙여준 별명은

 

'우크라이나의 검은악마'. 

그의 기체에 검은 튤립을 그려넣었고,

 

적국의 파일럿들이 검은튤립이 그려진 기체만 보면

 

슬금슬금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울트라 에이스 파일럿도

 

그 시작은 초라했어요.

다른 에이스들이 십대시절에 이미 비행을 시작하고서

 

승승장구하던 것과는 달리 하르트만은

 

그야말로 짐짝이었어요. 

격추는 커녕 적기를 피하려다가 대열에서 이탈하여

 

길을 잃기도 했고,

 

자신을 발견하고 접근하는 편대장을 적기로

 

오인하고 도망치기도 했었죠.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되돌아보고 자기 반성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하르트만이 무슨 신묘한 기술이나

 

초능력을 사용한건 아니에요. 

하르트만은 놀랍도록 단순하고

 

기본적인 전술을 고수했어요.

 

아군의 엄호를 받으며 적기에게 접근하여

 

일격필살 공격을 먹이고 바로 탈출하는거였죠. 

 


모든 파일럿들이 알고있는 방법이었지만

 

하르트만은 괴물같이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공격하고, 

일격을 날린 뒤에는 욕심부리지 않고서

 

바로 탈출하여 다시 기회를 노렸어요. 

 

 


적의 포화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아군기의 엄호를 믿으며

 

목표물을 확실하게 공격하고,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서

 

바로 이탈하는 놀라운 침착함이 

그를 세계 1위의 격추수를 가진

 

파일럿으로 만들어준거에요 

 

 

 

추가로 하르트만 역시 유틸라이넨처럼 같은 편대의

 

윙맨을 단 한번도 잃지 않았고,

격추기록보다도 이쪽을

 

더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적을 죽이는 것보다도 전우를 챙기는 것에

 

더 신경쓰던 하르트의 그 실력과 인품은 비록

 

독일의 파일럿이었지만 존경해도 좋다고 생각되요.

 

 

쓰다보니 생각보다 오래걸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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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자료 : 구글 .리그베다위키.영문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