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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베게너. 그는 최초로 모든 대륙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이론을 내놓았고, 그의 이론은 현재 지질학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베게너는 현재 가장 무더운 사막이 


 

 

한때는 극지방의 빙관(산 정상이나 고원을 덮은 얼음 덩어리)아래에 있었으며 모든 나라(대륙)들이 지금과는 다르게 분포되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베게너는 움직이는 대륙이 화산, 지진, 산의 형성, 자성을 띠는 극의 움직임 등을 포함해 지구의 모든 대규모 활동을 설명해 주는 원리의 일부분이라 확신했다.


 

알프레드 베게너는 1880년 11월 1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게너는 어린 시절부터 그린란드를 동경했고, 때문에 그는 언젠가 극지방 탐험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스키와 스케이트를 열심히 배웠다.



 

1904년 배를린 대학에 진학,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곧 기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게너는 열기구를 타고 55시간 이상 공중에 머무르며 상층 대기를 연구했는데 이것은 세계 신기록이 되었다.


 

1906년 극지방의 공기 흐름을 연구하기 위해 그린란드 동해안을 탐사, 극지방의 불모지를 연구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어려운 주제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여 학생들의 신망을 받았다.



 

베게너는 일찍이 대륙의 형태에 대해 생각했다. 베개너는 1910년 12월, 약혼녀에게 이렇게 전했다.


 

"마치 한때 서로 붙어 있던 것처럼 남아메리카의 동해안이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지 않아? 앞으로 내가 연구할 게 바로 이거야"


 

1911년 베게너는 대서양 양 끝에서 발견된 동식물 화석을 나열한 논문을 통해 당시 과학자들의 「바다가 한때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구가 냉각하고 수축하면서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는 설을 개소리로 생각하며 수긍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때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 있었고, 그것이 분리되어 조각조각 흩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선사 대륙을 그리스어로 지구 전체라는 뜻으로 '판게아(pangaea)'라고 불렀다.


 

 

베게너는 1912년 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지질학 학회 모임에서 이를 발표했다.

같은 해 그는 대륙 이동에 관한 생각을 발표하고 그린란드로 떠난다


 

그들은 극지방의 빙관에서 겨울을 보낸 최초의 사람들이 되었고 이듬해 봄(이지만 겨울과 다를바 없음...)에 약 1200km의 눈 벌판을 지나 높이 3천 m에 달하는 얼음 봉우리에 올라가 빙상 위에서 길고 힘든 여행을 했다.


 

 

이때 수집한 자료들을 독일로 가져와 베게너는 극지방 기상학과 빙상학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존경받게 된다.


 

 

베게너는 대륙의 땅덩어리가 지구 깊이 박혀 있지 않고 그 위를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2억 년 전에 분리되기 시작했고, 그 조각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움직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의 땅덩어리가 또 다른 땅덩어리와 충돌할 때 암석을 함께 밀어내 위로 접혀 올라가게 함으로써 산맥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대륙이 움직이는 이유, 현대의 판 구조론은 배게너가 주장한 땅덩어리의 움직임을 설명해 준다. 판은 마그마로 이루어진 맨틀의 상부를 떠다니며 지구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움직인다. 

 

지금도 대서양이 실제로 넓어지고 있으며 태평양은 좁아지고 있다. 

북아메리카는 1년에 2.5cm씩 유럽에서 멀어지는 중.


 

 

베개너는 자신의 이론이 널리 수용되려면 많은 이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수백만 년 전의 기후 유형을 잘 보여준 고기후학이었다. 베게너는 자신의 판게아 지도에서 고대 정글, 빙상, 사막을 찾아냈는데 모든 것이 다 들어맞았다.


 

 

2억 9천만년 전 페름-석탄기의 빙하기는 전 세계에 무작위적으로 흩어진 빙상을 보여 주는 듯했고, 그중 일부는 가장 더운 사막에 있었다.

베개너의 지도에서는 그것이 아프리카, 남극 대륙, 호주, 인도가 한때 만났던 남극 주변 한 곳에 몰려 있었다. 


 

 

베게너는 즉시 학회에 자신의 이론을 발표했고

이것이 바로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이다.


 

 

하지만 베게너의 이론을 둘러싼 갑론을박 때문에 그를 교수로 임명하려는 독일의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1924년 그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작은 그라츠 대학은 그를 받아 주었다.

 

그는 그라츠에서 극지방 기후에 대해 계속 연구를 했고, 1930년 다시 그린란드로 갔다.

 

하지만 이번 탐험은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탐사대의 일부가 해안에서 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탐사 대장으로서 베개너는 구조대를 보내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베개너의 구조대 대부분이 별다른 성과 없이 되돌아왔다. 베개너와 동료가 캠프까지 도달하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으며, 온도는 영하 58도였다.

 

1930년 베개너의 50세 생일을 축하한 다음 날, 베개너와 그를 도와 준 그린란드인 빌룸센은 귀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봄 베개너의 시신이 침낭에 쌓인 채 발견되었고 이후 그의 시신은 눈과 얼음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이론은 시들어 갔다. 그러나 1950년 대 새로운 과학 기법이 등장하면서 지각 활동을 새로운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해양학과 지구의 극성이 수백만 년에 걸쳐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연구 덕분에 베개너의 대륙 이동설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