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지난 2편에서 
2002년 오직 스승 조훈현만이 다다를 수 있었던
프로 통산 1000승과 타이틀 획득 100회라는
철의 금자탑을 세우며

조훈현 시대의 패막과 
이창호 시대의 개막을 알렸던 이창호였다

2편에 빠트린 내용이 있었는데 짚고 넘어가자면

 

2000년도
제 4회 응씨배에서 중국의 창하오를 3-1로 꺾고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게 돼
응씨배 우승은 세계 최강을 자처하는 이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코스인데
한중일 국내 기전, 세계 기전을 통틀어 최대 규모의 상금으로 치뤄지는 대회이기도 하고
4년 마다 한 번 씩 열리기 때문에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리며
세계 바둑팬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대회야

여담으로 아쉽게도 이세돌은 아직 이 대회의 타이틀이 없어
다른 세계 대회는 모두 우승했는데 이 타이틀이 없어서
이세돌이 앞선 최강자들의 커리어를 넘어설 수 없게 만드는 
이세돌에게는 아킬레스 건이지

올해 2016년에 중국에서 제 8회 응씨배가 개최되는데
이세돌은 이 대회 우승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어
사실 4년 마다 개최되는 대회이기 때문에 이번에 우승하지 못하면
4년 후를 기약해야 하거든
이세돌이 이제 30대 후반 줄에 접어든 것을 감안하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봐도 무방하지

 

마샤오춘 9단
이세돌의 어록 중에 '아 마효춘은 빼주세요'가 아주 유명해

 

 

 

창하오 9단
이창호 보다 한 살어린 중국의 프로기사로서
이창호와 동시대에 활약했고 이창호에 가려 빛을 못봤지만
이창호를 존경하고 예의가 아주 바른 건실한 친구야

 

 

 

2015년 한국에서 열렸던 한중 어린이 바둑대회
행사 차 방문했던 창하오가 뒷풀이 자리에서 이창호와 맥주를 마시는 모습
이창호 앞에서 양 손을 모아 공손히 마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뤄시허 9단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 무렵 중국바둑계는
이 세 명의 피튀기는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고
(물론 세 명 다 세계 무대에서는 이무렵 이창호에게 상대도 안됐다)

참고로 제 1회 응씨배가 끝나고
조훈현의 결승전 상대였던 녜웨이핑은 '내게는 무서운 제자 둘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마샤오춘과 창하오였어


하지만 녜웨이핑은
조훈현에게 이창호라는 끝판대장이 있다는걸 모르고 있었지
 

 

 


 

응씨배 역대 우승자
 

삼성화재배 역대 우승자

위 두개의 대회는 대표적인 세계 대회라고 할 수 있는데
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오랫동안 세계 무대에서 최강으로 군림해오던
일본바둑계는 조훈현을 필두로 한국과 중국의 강호들에 밀려 
세계 무대에서 쇠락의 길을 걷더니
2000년대 부터는 세계 무대에서 종적을 감추고 만다

일본의 갑작스런 몰락의 이유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한국과 중국의 급성장 때문이기도 하고
두번째는 일본의 프로기사 제도 운영탓이야

왜냐하면 일본은 대회 일정상 세계 대회와 일본 국내기전의 일정이 겹칠 경우
반드시 일본 국내기전을 우선하여 참가한다는
규정이 있거든
그래서 일본 기사들은 좋든 싫든 
세계 대회보다는 국내 기전을 우선시 하고 있어
그도 그럴것이 세계 대회보다 일본 국내 기전이 상금 규모가 크거든

그렇기 때문에 세계 대회에 나설 기회가 적어진 
일본의 기사들은 세계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 밖에 없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일본은 한국처럼 
현재 국내 기전의 인기도 바닥을 치고 있어

그나마 이야마 유타 9단이 현재 일본 바둑계를 씹어먹고 있는데

 

이야마 유타 9단
현 일본 최강

현재 일본 내의 모든 기전을 독식하고 홀로 외로운 독주를 펼치고 있는 일본기사야
상대가 없어
아마 기력으로는 그나마 현재 세계 무대에서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일본 프로기사가 아닐까 싶어
얼마전 3월 초 끝난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에서
이세돌을 만나 패한 적이 있었지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은
한.중.일 대표 5명이 차례로 나와 벌이는 팀토너먼트 전 형식인데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던 게이들이라면
위너스리그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거야
팀 별로 한 명씩 나와서 승리한 기사는 계속해서
승부를 이어가고
진 팀에서는 다음 주자가 나와서 승부를 벌이는 형식이거든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는 이세돌에게는
'제 2의 상하이 대첩'이 될 수도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
종국에 한국에서는 이세돌 9단 한 명만이 살아 남았고

일본은 
무라카와 8단,이야마 유타9단
중국에는 
롄샤오 7단
커제 9단이 살아남아 있었거든

이세돌은 
이 대회를 한국의 우승으로 결정 짓기 위해선
네 명의 적을 연달아 꺾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어
그런데 앞선 여기서 세명을 모두 꺾고
정말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연출하는가 싶었지만
아쉽게 천적 커제에게 무릎을 꿇으며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지
작년 삼성화재배, 몽백합배의 커제와의 패배 이후 이 대회에서도
커제에 설욕을 실패하고 무릎 꿇으며
이세돌은 현재 커제만 만나면 맥을 못추고 있는 상태야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결승국

 

 

(좌) 구리 9단 (중) 커제 9단 (우) 롄샤오 7단

 


아마도
이 부분은 내가 이세돌 편을 쓰게 된다면 훨씬 자세히 다루게 될 수 있는 부분이야






여담이 길어졌는데 다시 본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리고 이창호는
2003년 
춘란배 와 도요타 덴소배(2009년 구리 9단의 우승을 끝으로 지금은 사라진 대회)의 우승으로

주요세계대회
-삼성화재배,후지쯔배,LG배,응씨배,춘란배,도요타덴소배-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아쉽게도 유창혁이 1년 먼저 세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해서 최초는 아니다)

이때 이창호는 한 해에 우승상금으로만 10억 이상을 벌어들이는 유일한 프로기사였다
광고수입, 프로리그 연봉, 대전료 등을 제외하고 순수 우승 상금만 10억이 넘었으니까
1년에 못해도 20억 정도는 벌지 않았을까 싶다
(바둑 기사로서 평생가도 10억도 모으기 힘들텐데 1년에 20억...)

그리고 드디어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후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바둑계 최대의 사건
'상하이 대첩'이 쓰여지는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이 2004년 말 개최된다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 대회 개막식

이 농심 신라면배는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대회야
1회 대회 부터 전기 5회 대회까지 모두 한국팀이 우승을 차지했고
공교롭게도 1회 부터 5회까지
늘 한국의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타자는
'이창호'였어

중국이 한국만 만나면 힘을 못쓴다는 '공한증'이 바둑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지
말그대로 '한국은 공포의 대상'이라는
'공한증'은 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지역 축구 예선전에서
중국이 한국에 패하며
중국 언론에 처음 등장한 단어였는데

이후에 바둑계에서도 '공한증'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
이창호와 관련된 기사에 주로 쓰였고
중국인들은 번번이 중국에 물을 먹이는 이창호를 보며
처음에는 욕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창호를 존경하고 신성시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돼
그냥 두손 두발 다 든거지

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취임 후 한국에 방문했을 때
청와대 만찬 자리에 이창호 9단을 초대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기도 했어
시진핑은 소문난 바둑광인데
그중에서도 이창호의 광팬이었거든
이창호의 팬이라는 기사가 중국 언론에까지 보도될 정도였어

 

 

"나는 이창호9단의 팬이다"

 

 

 

 

 

 
이창호의 위엄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제 6회 농심 신라면배가 개최되었어

한국에서는
한종진 5단,안달훈 6단,최철한 9단,유창혁 9단,이창호 9단이 출전했고

 

 

 

 

당시 한종진 5단과 안달훈 6단은 떠오르는 신예기사들이었고
농심 신라면배 국내 대표선발전을 뚫고 올라온 실력자들이었어

유창혁 9단은 전편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이창호 못지않은 최강의 기사였고
최철한 9단은 4년후 6회 응씨배에서 우승을 거머쥐게 되는 실력자야

 

 

최철한 9단

 

 



사실 전기 대표팀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지적이 많았어
한종진과 안달훈은 세계 대회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거든
하지만 이 둘 모두 국내 대표선발전을 거치고 올라온 실력자들이었고
최철한,유창혁,이창호로 이어지는 필승조는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게 충분한듯 보였지

 

 

최강의 필승조


이에 맞서는 중국은
펑취안 5단,왕시 5단,왕레이 8단,저우허양 9단,뤄시허 9단이었어

마지막으로 일본은
다카오 신지 8단,장쉬 9단,왕밍완 9단,미무라 도모야스 9단,조치훈 9단으로

당초 한국언론들은 예상하길 중국은 해볼만 하나
일본이 예상외의 복병일 것이다라고 많이 예상을 했어

개인전에서 세계 무대를 한국과 중국에 모두 내준 일본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드림팀을 구성해 나온 모습이었거든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떻게 팀을 짜도
어디에서도 꿇리지 않을 기사들이 즐비했기에
6회 대회 또한 무난한 우승을 예감하고 있었지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달라졌어

첫 대국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열렸다
농심 신라면배는 한국기원이 주관하고
농심이 후원하는 세계대회로서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경기를 진행한다
보통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막을 하고
한국의 부산이나 서울로 왔다가
결승전을 중국의 상하이에서 치른다

첫 주자로 나선
한종진 5단이 일본의 미무라 도모야스 9단에 불계패를 당했고

중국의 저우허양 9단이 미무라 도모야스와 한국의 안달훈 6단을 연달아 꺾어버렸어
 

 

결국 패기를 기대했던 신예 둘이 어이없이 연달아 무너져 버린 한국은
곧바로 유창혁 9단이라는 필승조를 투입시키게 되는데
장소를 부산으로 옮겨 다음 대국이 펼쳐지게 된다
유창혁의 상대는 일본의 다카야 신지 8단
그동안 거둔 성적으로 보나 명성면에서
유창혁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믿을 수 없게도
일본의 최약체로 꼽혔던 다카야 신지 8단에 4집 반 패배
사실 이창호 다음으로 한국팀에서 믿고 있었던 것이 바로 유창혁이었어
팀의 맏형이기도 했고 이당시 기력 또한 이창호 못지 않았거든

 

 

 

 

왼쪽부터 유창혁 9단, 안달훈 6단, 한종진 5단

 

하지만 기쁨도 잠시
최철한은 바로 다음 주자인 일본의 조치훈 9단을 만나 
흑 불계패를 당한다 

 

 

 

이런 조치훈도 곧바로 중국의 뤄시허 9단을 만나 패배하고 마는데

한국 언론들은 처음으로 농심배를
타국에 넘겨줄 위기에 쳐했다고 보도하게 된다
반대로 중국과 일본은 드디어
한국을 꺾고 세계 단체전에서 우승을 거둘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그 의지를 불태우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중국에는
왕시 5단,왕레이 8단,뤄시허 9단이 남아있었고
일본은
장쉬 9단과 왕밍완 9단이 남아 이창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은 오직
이창호 한 명 만이 살아남은 상황

우승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이창호가 다섯명을 연달아 모두 꺾어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이창호가 강하다고 해도
상대는 각국의 최강자들
다섯명을 연달아 굴복시키는 일은 불가능처럼 보였다
 

 

 

사실 이 당시에 언론에서도
아무리 이창호라도 우승은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거의 반포기 상태였고 이창호가 몇명이나 
이길 수 있을까가 관심사였는데

일단 부산에서 이창호는 조치훈을 꺾고 올라온 뤄시허를 상대로 승리하고
이창호는 결전의 땅 
상하이로 향하게 된다


물론 부산에서 기분 좋은 1승을 챙기고 온 이창호였지만
대회 일정 또한 이창호에게 불리하게 맞춰져 있었다
이창호는 나머지 4국을 모두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4국이 매일 연달아 있어서
하루도 쉴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바둑 또한 엄청난 정신적 체력을 필요로 하는 스포츠인데
사실 이런 큰 대회에서는
한 판만 두어도
왠만한 기사들은 체력이 바닥나서 나가 떨어져 버리곤 하니까




그렇게
상하이에서 펼쳐진 첫 번째 대국은
대만계 일본기원 소속의 장쉬 9단과의 승부
결과는 흑을 쥔 이창호의 245수만의 불계승
접전이었지만 결국 이창호가 승리를 따냈다
장쉬 9단은 당시 일본의 최강자로서 일본팀에서 가장 믿고있던 카드였어

 

 

 

 

(좌)이창호 9단 (우)장쉬 9단


다음날 이어진 중국의 왕레이 8단과의 대국
왕레이는 초반부터 승기를 잃는 듯 무너지며 쉽게 승리를 내주고 만다
결과는 이창호의 백 불계승
대국 후에 왕레이 8단은 패인에 대해
"다른 이유는 없고 오직 실력차 때문"이라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이창호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준비해서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했어

복기 중인 이창호와 왕레이


이로써 부산에서의 1승과 상하이에서의 2승
다섯명 중 벌써 세명을 꺾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는 혹시 이창호가 기적같은 
역전 우승을 이뤄내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해

하지만
남아있는 중국의 왕시 5단은
당시 중국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분류되고 있었고
왕레이는 패배 후에
"하지만 나는 이창호가 더 승리할 수 있을거라 보지 않는다. 내 뒤에는 왕시가 있다"라고
말 할 정도로 왕시에 대한 팀원들의 믿음은 두터웠어

일본의 왕밍완 9단 또한 이때까지
이창호에 대한 상대전적이 2승1패로 앞서고 있을 정도로
이창호에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이창호의 역전 우승은 아직도 힘들어 보였다


다음날 벌어진 제 4국은
일본의 최종장 왕밍완 9단과의 결전
승부는 초반부터 치열했다

결과는

 

패배 후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 왕밍완 9단(좌)

 

왕밍완과의 대국 후 이창호의 승리가 보도된 중국신문
이창호의 별명 '석불(돌부처)'이 눈에 띈다


204수 만에 백 불계승으로 이창호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제는
역전 우승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대전적으로 밀리고 있던 왕밍완 9단에게서 거둔 갚진 1승으로

마지막
중국의 왕시 5단만을 남겨두고 파죽의 4연승을 내달리는 이창호였다




그리고 다음날
2005년 2월 26일 상하이 왕바오허 호텔에서
한국의 이창호 9단과 중국의 왕시 5단의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
5연승을 거두며 한국의 통쾌한 역전우승이냐
이창호를 저지하며 세계 최강 자리를 탈환하느냐
전 세계 바둑팬들의 이목이 이 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대국 당일 분주해 보이는 한국 검토실

대국이 진행되면 검토실은 동료 기사들이 대국을 지켜보며 분석하고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기도 하는 장소로 활용돼

남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당시 인터넷 해설을 맡았던 
김성룡 9단 이창호 9단과는 동갑내기 프로기사로
친한 친구사이야
입담이 좋아서 현역시절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해설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돼
얼마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일전 때도 해설을 맡은 적이 있지

 

 

대국장으로 입장하고 있는 중국 선수단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

 

 

 

단신으로 대국장에 향하는 이창호 9단의 모습

 

 

 

위 사진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인용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사진이야
단신으로 중국과 맞서는 이창호의 고독함을 여실히 보여주지

이에 맞서는 왕시 5단은
떠오르는 중국의 기대주였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만큼 
중국인들은 왕시가 이창호를 이겨주길 기대하고 있었지

 

 

 

왕시 5단(2006년 9단 승단)

사실 왕시는 왕레이의 차례에 자신이 먼저 출전하길 원했어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거지
패기 넘치는 신예기사였던 왕시는 당시 중국킬러 이창호를 상대로
복수를 나서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거든

 

 

대국장에 먼저 도착해 이창호를 기다리고 있는 왕시 5단

 

 

대국장에 들어서는 이창호 9단
 

 

대국장에 몰린 취재진

사실 어떤 대회든 마찬가지겠지만 결승전에는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몰려
더군다나 역전 우승에 온갖 관심이 쏠린 이 대회에는 취재 열기가 더 했지
그 인파 속에서 두 대국자는 대결을 벌이는거야
카메라 셔터도 연신 터지고
집중이 잘 될 수 없는 환경이야 일반인에게는
이런 곳 에서도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프로기사들이 대단한 부분이지
물론 취재진은 초반 몇수까지 사진 촬영시간이 끝나면 자리를 비워줘야 해
이런 환경에서 끝까지 대국을 진행할 수는 없지 

 

 

 

자리에 착석하는 이창호 9단

 


한 중 양국의 명운이 걸린 대국이
그렇게 시작되었어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39)

사실 이 글은 바알못 게이들을 위한 글이라
기보(대국의 수순을 정리해 놓은 것)를 넣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제 어떤 게이가 기보를 좀 보고 싶다고
너 바알못아니냐고 하길래...
워낙 유명한 대국이기도 하고
스토리 상 클라이막스 부분이기에
특별히 기보를 가져와 봤어

이창호는 초반 우상귀 화점과
우하귀 소목으로 시작
왕시는 이에 맞서 양 화점 시작을 해
이창호는 우하귀를 한칸으로 굳히며
상대의 집을 깨러 들어가는 공격보다는 초반 실리(실제 이득, 집)를 취하는
전략을 택하지
이에 왕시는 먼저 우변을 갈라치며 이창호의 확장을 방해하며 싸움이 시작 돼
초반 공방전을 시작한건 왕시쪽이었지

사실 여긴 바알못 게이들이 대부분일텐데
더 쉽게 설명하자면
바둑은 초반에 공격권이 먼저 두기 시작하는 흑에게 있어
하지만 흑을 쥔 이창호는 공격을 하지 않고
먼저 방어 태세를 갖추며 자신의 집을 불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거야
그대로 두면 안되니까
상대인 백은 먼저 공격을 해온 거고
초반양상은 이정도로 봐두면 될 것 같아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56)

왕시는 계속해서 공격일변도로 우변과 우상귀의 흑의 진영을 파고들어
흑의 진영을 무너뜨렸고
이창호는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공격을 타개(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하며
세력을 쌓음과 동시에 우하귀에서 하변으로 이어지는 큰 집을
만들며 왕시의 공격을 계속해서 상쇄하지
왕시는 그럴수록 더 거세게 이창호를 몰아붙였어
하지만 이창호는
거세게 맞받아치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그저 왕시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듯이 판도를 끌고 나간다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77)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바둑판 넓게 보고
돌의 연결을 잘 보면 돼
백은 바둑판의 귀퉁이마다 모양을 갖추긴 했지만 큰 집이 난 형세는 아니야
막상 공격을 주도했던 것은
왕시였지만 공격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 한거지
게다가 왕시의 집이 작은 집 뿐인데 반해 이창호의 흑돌들은 넓게 퍼져서 큰집을
형성하고 있어
오히려 공격을 방어하는 쪽이 계속해서 더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거야

 

이창호 9단(흑) VS 왕시 5단(백)
제 6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국(장면도 1~191)

대국이 종반에 까지 치다른 모습이야
노란색으로 표시된 흑의 191수로 백의 7점이 끊어 잡히게 돼
중앙으로 연결되는 흑의 거대한 집이 더 커지게 되고
백은 귀퉁이 마다 겨우 서너집밖에는 없는 모습이야

 

 

 

돌을 던지는 왕시 5단

바둑에서는 항복의 의미로 '돌을 던진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말 돌을 집어서 상대한테 던지지는 않고
상대에게 따낸 상대의 돌을 가만히 반상에 올려둔다던지
상대에게 졌습니다라고 말한다던지
집었던 자신의 돌을 반상에 떨구고 항복의 표시 고개를 숙인다던지
방법이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고 기사들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결국
집 차이를 견디지 못한 왕시는
결국 이후 257수만에 이창호를 상대로 패배를 선언하게 되고

 

 

 

이창호는 혼자 힘으로 
한국의 역사적인 역전우승을 결정짓게 된다

 

 

 

충격에 빠진 중국 취재진들
 

 

 

 

승리를 결정지은 후의 이창호 9단
상당히 피로한 모습이다
 

 

대국 후 왕시에게 몰려드는 취재진들

이창호는 복기 후에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려서
패자인 왕시에게 온 집중이 쏠려버렸다
왕시는 당시 인터뷰에서 자신의 완패를 인정했어
"처음부터 이창호를 흔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는데
모두 먹히지 않았고 이창호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는 소감을 밝혔어

그리고 취재진들은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지

 

 

 

 

 

몰려드는 취재진에 이창호는 몸 둘 바를 모른다


간신히 주위를 수습하고
기자들은 우승자 이창호를 향한 질문을 쏟아낸다
-기적같은 5연승을 거두며 한국팀 6연패를 지켜내셨습니다. 그 우승 소감이 궁금합니다.
-어..기쁘다기 보다는 그동안 무거운 부담감을 내려놓은 듯 해서 마음이 편하다는 쪽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전에 인터뷰에서 왕시 5단과 먼저 두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오늘 왕시 5단과 둔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초반에 백(왕시 5단)쪽에서 실수가 나와서 편하게 뒀는데 중반 이후 형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앙에 큰 집을 짓고 나서는 바둑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 판 중 가장 어려웠던 판은 언제 였습니까?
-심리적으로 볼 때 장쉬전이 가장 부담이 많이 되었는데...나중에 내용적으로는 왕밍완 9단과의 대국이
상당히 위험했었습니다.

-오늘 대국은 초반부터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는데 특별히 작전을 구상하고 나오셨는지요?
-특별히 작전을 짜온건 아니고 그날 그날 형태에 따라서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왕레이 전 때와 비슷한 모양이 나와서 비교적 속기로 둘 수 있었습니다






이하는 우승 직후 중국인들의 반응

'내 우상은 이창호다! 난 줄곧 그가 이기길 바랄뿐이다.'
'우리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창호는 너무 막강하다. 방법이 없다.'
'이창호는 이미 얼빠진 사람처럼 멍해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석불을 존경한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이창호는 바둑계를 30년간 통치할 것이고, 바둑계에 300년간 영향을 줄것이다.'
'석불의 천하임은 분명합니다.'
 

 

사실 농심배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이창호는 갑작스런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1승5패의 전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이창호에게 5연승은
불가능처럼 보였고
이창호 본인도 많은 부담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부담감을 이겨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불멸의 승부사 이창호


 

 


농심배 이후 
2007년 왕위전 12연패(30기~41기)위업 달성
2009년 KBS 바둑왕전 3연패 등
90년대 부터 2000년대는 바야흐로 이창호의 시대였다




그리고 2010년
사이버오로(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이도윤씨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추게 된다

 

 

참고로 신부...11살 연하다


지금은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여전히 프로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2000년대 후반 부터 이세돌에게 최강자 자리를 내어주고
하락세를 보이며
현재는 중견 프로기사로서 프로활동을 이어오는 중이다





한국인들 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 더 사랑받고 존경받은 이창호
중요한 순간 마다 대한민국을 구해내며
'신산' '석불' '수문장' '수호신' '철의 승부사' 등
수 많은 별명을 얻었다

누구보다
승부에 강했던 역대 최강의 기사

그의
무표정 뒤에 감춰진
열정을 느끼며
그 때를 추억해 보았다


 

 

여기까지 이창호편의 마무리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