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쿠데타 '발키리 작전'
1944년 7월 20일 오후 12시 42분.....
동프로이센의 라슘템 부르크 총통지위소내의 회의실에서 영국제 플라스틱폭탄이 폭발하는 '히틀러 암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폭발로 4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지만 폭탄이 터진 회의실에 있었던 히틀러는 바지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지고 귀고막이 터지는 부상만을 입은채 '빌헬름 카이텔'장군에 의해 이끌려 나옵니다.
이 사건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계획했던 발키리작전입니다. 그럼 좀더 자세히 이 발키리 작전에 대해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클라우스 센트 폰 슈타우펜베르크'대령
전 육군참모총장 '루드비히 베크'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반(反) 히틀러운동과 쿠데타 또는 히틀러암살계획이 계속 있기는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 귀족출신의 '클라우스 센트 폰 슈타우펜베르크'대령은 한때 히틀러를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존경하기도 하였지만 폴란드 침공을 비롯해서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자 '바보가 불장난을 일으키고 있다!'하며 반(反)나치주의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 영화 '작전명 발키리' 中 '클라우스 센트 폰 슈타우펜베르크'대령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동부전선의 참상을 피해 북아프리카 전선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후퇴하는 과정에 영국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오른쪽 팔과 한쪽 눈을 잃게 됩니다. 그후 그는 '루드비히 베크'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반 히틀러운동에 관여하게 됩니다.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군에 남기를 원했고 결국 베를린에 위치한 독일군 방군 총사령부의 예비군동원 참모장으로 군에 남아서 계속 근무를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라슈텐부르크의 총통지휘소에 매일 출두하여 보고를 해야했습니다.
▲ '루드비히 베크' 장군
루드비히 베크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반 히틀러모인 그들은 '발퀘레 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 작전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베를린의 전투경찰부대와 나치친위대를 제압하고 정부기관,방송/신문사를 장악한 다음 동/서부전선의 주요 부대가 봉기하여 루드비히 베크 장군을 수상으로 올리고 새로운 독일임시정부를 구성한다는 작전이였습니다.
▲발키리 작전의 베를린 시내 주요장악목표를 나타낸 당시의 작전지도
여기서 발키리 작전에 대해 나오는 발키리작전은 독일 내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의 예비군을 비롯한 보충군이 이들을 진압한다는 내용의 독일 군부의 보안령이었습니다. 반나치 인사들은 이 작전을 자신들이 이용하기로합니다. 그 이유는 이 작전의 발동권을 가지고 있는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부관이 바로 반나치의 일원이자 히틀러를 폭사시킬 폭탄을 가지고 가는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1944년 7월 15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목하에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날짜를 연기해 1944년 7월 20일에 작전을 개시하기로합니다.
▲맨왼쪽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모자를쓰고 있는 히틀러
그렇게 기다리던 1944년 7월 20일 오전 10시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베크에게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요?"라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히틀러암살과 쿠데타개시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오전 10시 15분 라스텐부르크에 도착한 일행은 20분 뒤 베어볼프산체에 도착하였습니다. 베어볼프산체에는 3개의 검문소가 있었지만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합니다. 오전 11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해프텐은 총통 본영의 참모 멜렌도르프와 함께 점심식사를하며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 슈타우펜베르크대령이 가방속에 놓은 시한폭탄이 폭발한 독일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야전사령부 [늑대의 소굴] 지하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부관 베르너 폰 해프텐 중위와 함께 영국제 플라스틱 폭약을 갖고 라슈템부르크 총통지휘소 회의실에서 폭탄가방을 놓고 오기위해 향했습니다. 그 폭탄은 금속제 외피가 없어서 가능한 목표물에 가까이 배치시켜야 살상력을 높일수가 있었고 순전히 폭발에서 발생하는 폭풍과 열 그 자체만이 유일한 살상 수단인데 불행히도 히틀러 가까이 놓았던 폭탄가방이 히틀러 부관 하인츠 브란트 중령에 의해 불편하다는 이유로 히틀러의 반대편으로 옮겨졌습니다. 회의중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말할차례였는데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12 42분 회의 브리핑은 거의다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않으면 파국이....."이 말과 동시에 폭탄이 터졌고 순식간에 회의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회의실내에는 폭탄의 화염이 가득퍼졌고 지붕은 거대한 구이 났으며 창문은 모두 깨져버렸습니다. 히틀러는 직접 고른 회의용 책상은 두툼한 참나무로만들어져 있어서 그 충격을 완화시켰습니다.
▲폭발현장에서 찢어진 히틀러의 바지
이 순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펠기벨의 사무실에 있다가 폭발음을 듣고는 덤덤히 "터졌군요"라고 말을하고 펠기벨과 악수를 한뒤 헤프텐과 함께 베어볼프산체를 떠났습니다. 검문소를 모두 속이고 마지막 검문소에서 '44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통과'라는 기록을 남긴 채 도망쳤습니다. 중간에 길가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쓰려고했던 제2의 폭탄을 분해해 길가에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라스텐베르크의 비행장에 도착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출발합니다. "드디어 히틀러가 죽었다!!!!!!"
▲볼프스산체와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의 위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폭탄이 터지고 도주한 경로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오후 1시 15분 펠기벨은 카이텔에 의해 구조되어 나오는 히틀러를 보고 놀라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지만 총통지휘소로 통하는 모든 전화는 친위대에 도청당하는 사실을 알고있어서 전화를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비군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올브리히트에게 히틀러가 아직 살아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전화를 받은 올리브히트는 당황했지만 아직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습니다. 이 무렵, 베어볼프산체에서는 SS사령관 겸 경찰총장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사건현장에 도착해 사건 파악을 위해 베를린에 있는 제국사법경찰 사령관인 아르투르 네베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네베는 사건 조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사이 히틀러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습니다.
▲폭발현장에 나타난 독일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
처음에는 아무도 슈타우펜 베르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폭발이 연합군의 정밀 폭격이나 이미 오래전부터 폭탄이 비밀리에 설치된 걸로 여겼으며 모두가 그가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환수와 카이텔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사라졌다고 알렸고 검문소에서도 폭파 직후 슈타우펜베르크가 베어볼프산체를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이 됩니다. 그러나 베어볼프산체는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빠져나오면서 통신선을 모두 절단시켜놓았기때문에 복구될때까지 연락할방법이 없었습니다
오후 4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회담을 가졌습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자신이 테러를 당한 회의장을 공개했고 현재 전황이 이처럼 위험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살아남은 것처럼 결국엔 승리하게 될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이에 대해 감동을 받고 이 사건이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결국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할것이라고 생각했다고합니다.
▲폭발사고로 다친부하들이 입원한 병실을 찾은 히틀러
오후 5시 무솔리니와의 회담중에 통신선이 복구되며 사방에서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934년 SA대장 에른스트 로미의 사건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것이며 어른.아이 할것없이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이라며 분노했습니다.
▲폭발현장을 다시 둘러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슈타우펜베르크대령은 베를린으로 돌아와 관공서 건물을 장악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되지만 바로 카이텔 장군등에 의해 히틀러가 무사하다고 발송된 통신문에 의해서 바로 제압되어 사건당일 체포가 되었습니다. 반란자들 대부분은 이미 모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체포된 약 7천명에 달하는 사람들 중 약 5천명되는 사람들은 사형이 언도되었고 거의 대부분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히틀러는 그 모습이 '푸줏간의 돼지'같아고 묘사하였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국방성 앞뜰에서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국방부청사 연병장이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비롯하여 암살작전 주동자들이 총살된곳...
이렇게 암살미수사건으로 살아남은 히틀러는
10개월정도 기간의 목숨을 더 연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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