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냈던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
구소련 시절부터 핵잠수함 강국으로 명성을 날린 러시아는 그만큼 크고 작은 사고 또한 많이 발생해서 여러 차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습니다. 1960년대 이래 20여 척의 잠수함이 침몰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개는 함내의 어뢰 폭발이나 다른 선박과의 충돌, 혹은 승조원의 기관 조작 실수 등의 이유로 비극을 맞았습니다. 심해를 잠항하는 잠수함의 특성상 잠수함은 한번 침몰하게되면 거의 대부분의 승조원들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를 초래합니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냈던 사건을 꼽으라면 지난 2000년 8월 침몰한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핵잠수함 K-141이라고도 불리는 쿠르스크 호는 구소련 시절 건조된 것으로 최대 24기의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까지 잠항할 수 있는 최신예 잠수함이었습니다. 또한 4층 건물 높이에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으며, 2중 강철로 이루어진 선체 덕분에 안정성 면에서도 기존의 잠수함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2000년 8월 12일 ‘절대 침몰 불가’라는 예상을 뒤엎고 구소련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훈련 중이던 쿠르스크 호가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해저 108m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승조원 118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인양된 후에 건진 시신도 12구에 불과했습니다. 함수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그쪽에 몰려 있던 군인들 대부분이 폭발과 함께 공중으로 분해됐던 것입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혹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에는 미국이나 영국의 잠수함과 충돌했다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며 반박했습니다. 두께 40㎝의 2중 강철로 이루어진 쿠르스크 호가 그 정도의 충돌로 침몰했을 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침몰 원인은 “함내의 어뢰에서 불량연료가 누출되어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폭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뢰의 압축가스로 사용된 과산화수소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 어뢰 2기가 연속으로 폭발해 침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불러일으켰던 것은 승조원들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이었습니다. 침몰 후에도 한동안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3명의 승조원들이 과연 함내에서 얼마나 버티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작업이 조금만 빨리 진행됐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러시아인들은 정부의 늑장대응과 안이한 대처에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침몰 후 생존자가 있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은 인양된 시신 한 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쪽지를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중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쪽지에는 사고 발생 후 함내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쪽지에는 “두 번의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함수가 심하게 흔들렸으며, 대부분의 승조원들은 폭발과 함께 즉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생존자들이 함미 부분으로 이동했다. 현재 23명이 살아 있다. 우리 중 선체 표면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적혀 있어 생존자들이 탈출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처음에는 또박또박 쓰인 글씨가 끝으로 갈수록 휘갈겨진 것으로 미루어 글을 쓰는 도중에 비상등이 꺼진 것으로 추측됐으며, 쪽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감각에 의지해 글을 쓴다. 이제 가망이 없을 것 같다. 누군가 이 글을 보기만 해도 좋겠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얼마나 오래 살아 있었는지,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질식사였는지 아니면 함내로 스며든 해수 때문에 익사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쪽지로 인해 몇 가지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침몰 즉시 구조작업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쪽지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그렇지 못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선체를 두드려서 생존자가 있는지를 살폈다는 러시아 해군의 주장과 달리 콜레스니코프의 쪽지에서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 러시아 정부와 해군의 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 서방 언론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후 이틀이 지나서야 침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미 모두 사망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의 도움을 거부했었습니다.
2003년 발간된 <타임 투 다이-쿠르스크 호 비극의 숨겨진 이야기>의 저자인 영국의 로버트 무어 기자 역시 책에서 “쿠르스크 호 침몰은 예정된 비극이었다”고 말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잘못된 결정과 정치적 실수로 118명의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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