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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바둑기사 
세계 최정상 계보의 마지막 승부사
이세돌


[쎈돌 이세돌] 1편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이세돌은 전남 신안군 비금도라는 섬에서 자란 
83년생 올해 나이 34살을 맞는 프로 바둑기사야
태어나기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고
이세돌이 두살배기 시절 비금도로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 돼
사실상 고향은 비금도인 셈이지

이세돌(李世乭)

그 이름을 보면 바둑기사라는 직업과 
묘하게도 잘 어울리지
이건 그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세돌의 목 뒤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점이 세 개가 있다고 해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는 '둘째 차돌', '셋째 세돌' 이렇게 지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러가지로 의미로 들어 맞았던 거지
이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돌'이라는 글자는 사실 본래 중국 한자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자야
'돌 석石'자에 '새 을乙'자를 받침 처럼 넣어 만든 우리나라식 한자거든
그래서 이세돌이 과거에 중국 기전에 나갔을 때는  石자로 바꾸어 표기 했었어
요즘은 돌을 그대로 표기 해주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大李', 이세돌을 '小李'라고 부르기도 해

大李未走 小李又至 (대리미주 소리우지)
큰 이씨가 아직 가지 않았는데, 작은 이씨가 또 나타났다.
ㅡ 중국 체육주보(중국의 신문사)에 나온 표제

이창호 때문에 공한증에 시달리고 있던
2000년대 초
중국으로서는 이세돌이라는 또다른 괴물이 또 나타났다며
이세돌의 성장을 보도하기도 했어

가끔 이 자를 이세돌의 아버지가 이세돌의 이름을 짓기 위해 
새로 만든 한자라고 잘못 알고있는 바둑팬들이 더러 있는데
이건 이세돌의 아버지가 만든 한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써오던 한자야
조선 말 의병장인 신돌석(申乭石) 또한 이름에 같은 한자를 써





그리고
어린 시절 이세돌이 자란
이 비금도라는 섬은 목포에서도 쾌속선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더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야

 

비금도 전경 


아름답지않나?
하트모양 해안으로 유명한 섬이야
갯바위 올라가서 낚시도 하고 바둑도 두며 
노년에 유유자적하면 딱 좋겠다
사실 비금도는 그전까지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는데 
이세돌 덕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지
알파고 전 이후에는 그 관심이 더 늘어나서 요즘 관광객도 많이 찾아온다고 해
요즘 이세돌의 어머니가 기분이 아주 좋으시단다
어머니는 현재도 비금도에 지내고 계셔

서해안의 섬 답게
주민들은 어업과 염업(천일염 생산)
농업(비금도는 소금과 시금치가 특산물)을 
생업으로 삼고있어
이세돌의 부모님도 귀향 후에 이곳에서 시금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해

 

이세돌의 가족사진
어머니 앞에 안겨있는 꼬마가 이세돌


이세돌은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어
사진에는 없지만 위로 큰 누나가 한 명 더 있어
바둑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 故이수오 씨가 
어린 시절부터 자식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서
이세돌의 가족들은 어머니 박양례 씨를 빼고 모두 바둑 실력이 수준급이야
(어머니는 바둑이 하도 재미가 없어보여서 한 번도 배우질 않으셨대)

사진의 우측 상단에 서 있는 큰 형은 이세돌과 같은 프로 바둑기사야

이상훈 九단

젊은 시절
프로기사로서의 성적은 평범했지만
그래도 프로 9단 이라는 것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은퇴할 때 까지
9단까지 못 올라가고 끝나는 프로기사도 엄청 많거든
프로 9단을 '입入신神'이라고도 부르는데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야
그정도로 이르기 힘들다는 거지
 
현재는 선수생활은 하지 않고 
바둑 프로리그 '신안 천일염'팀의 감독직을 맡고 있어
참고로 이세돌은 현재 신안 천일염 팀 소속의 에이스야
 

 

 

이세나 
월간바둑 편집장

그리고 작은 누나 이세나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큰 누나 이상희 씨 또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어)
현재 바둑 관련 매체인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맡고 있어
기력은 아마 6단 정도 된다고 해
(참고로 아마추어 단급은 7단까지 있다)

 

큰 누나 이상희 씨 또한 아마 5단급 실력에 
작은 형 이차돌 씨도 아마 5단급 실력이라고 알려져 있어
아마 5단이 어느 정도 급 이냐면
보통 바둑을 중계하는 여성 캐스터들이 아마 5~7단 정도 기력을 보이는데
남성 프로바둑기사 해설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바둑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인 거지
가끔은 옆에서 남자 프로해설들이 보지 못한 수를 찾아내곤 해

그래서
여성 캐스터들 중에는 프로기사의 바로 전 단계인 연구생 출신들이 많아
프로기사를 준비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 
캐스터나 바둑 매체 관련직 쪽으로 전향하는 여류기사들이 많거든
(일게이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 캐스터에 대한 내용은 글 마지막에 따로 정리하도록 할게)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이수오 씨와 바둑을 두고있는 삼형제


작은 형인 이차돌 씨는 사실 어려서 이상훈, 이세돌과 함께
프로기사를 꿈꿨는데
바둑책 한 번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마 5단급 실력에 도달했다고 해
그런데 동생 이세돌은 바둑을 배운지 2년만에 형 이차돌의 실력을 앞질러버리고
3년만에 호선(백에게 덤을 주고 흑백이 대등하게 싸우는 것)으로 
아버지를 이기는 수준까지 이르지
이런 동생을 보고 작은 형은 마음 속으로 프로기사의 꿈을 접었다고 해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가 
"차돌아 너는 아무리 봐도 머리가 나빠서 바둑은 안되겠다"라며 
목포 고등학교에 진학시켜버렸어
후에 아버지가 머리가 나쁘니 공부나 하라고 한 이차돌 씨는 
고등학교 진학 후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을 한다
참고로 이세돌은 바둑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했어
(형제 중에 머리가 나쁜 편이었던 작은 형이 서울대 컴공이라...)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가 
이렇게 수준급의 바둑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지
한 집안에 프로기사가 한 명 나오는 일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프로 바둑기사가 둘 씩이나 나오고
또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명문대에 진학했으니
이세돌의 집안이 보통 머리는 아닌 것 같아

이러한
알토란 같은 자식들을 키워낸 장본인인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는
비금도로 귀농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목포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교직에 몸 담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돌연 교편을 내려놓고 비금도로 가족들과 함께 귀농을 결정해
주위에서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 빚을 내서 서울로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교직까지 그만두고 섬으로 들어간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거듭 만류했다고 해

하지만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걸 보면 
이수오 씨가 비범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
다른 직업도 아니고 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이 아닌 서해의 외딴 섬을 아이들의 교육 장소로
택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지
 

소년 조훈현

 

소년 이창호


조훈현의 아버지가 그랬고 이창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언제나 미래의 위업에는 과거의 보이지 않는 결단이 뒤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특별한 성공을 거두는 이들은
늘 남들은 택하지 않는 특별한 길을 걷기 마련이지
이세돌 또한 그랬어

 

 

소년 이세돌

이세돌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처음 아버지로 부터 바둑을 배우게 돼
아버지는 매일 같이 어린 이세돌에게 사활문제를 숙제로 내주며
농사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숙제를 확인하고 
함께 바둑을 두며 이세돌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해
그러다 숙제를 틀리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내려졌고
어린 나이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울면서도
끝까지 손에서 바둑알은 놓지 않았다고 해

작은 누나 이세나 씨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이세돌은
또래 친구들이 해변가에서 뛰어놀 때도
늘 혼자 방 안에 앉아 바둑판 앞에서 사활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다고 해
누나는 그런 막내 동생을 보며 늘 안쓰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냉철한 훈련과
포기하지 않는 그의 끈기덕에
지금의 이세돌이 있을 수 있었을거야

프로기사가 되고 난 후
이세돌은
비록 자신이 중학교를 중퇴하고
학교에서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라고 
말했어





이세돌이 일곱살이 되던 해인 
1989년도
그 무렵 서울은 
중국에서 돌아온 국민적 영웅을 맞으며 한 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어

 

 

 

제 1회 잉창치 배 세계 바둑 선수권 우승 자축 카퍼레이드

어린 이세돌은 TV에 나오는 
조훈현의 세계 대회 우승 카퍼레이드 모습에 매료되었어
'멋있다. 정말 멋지다. 나도 꼭 저 사람처럼 되고싶다.'

이세돌은 이때 처음으로 프로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해

이렇게 보면
세계 바둑 최강의 계보를 잇는
조훈현과 이창호, 이세돌이 
참 묘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아버지 이수오 씨와 어린 시절 이세돌
1991년 KBS 바둑 큰 잔치에 참가한 모습


1991년도
아버지는 국민학교 2학년에 올라간 이세돌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 오게 돼
더 이상 작은 섬에서는 이세돌이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거야

 

 

서울에서 생활 중이던 소년 이세돌
 

당시 형 이상훈은 먼저 서울에 올라와
90년도
15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하여 프로기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형 이상훈과 함께 이세돌은 이때부터 서울에서 지내며
'권갑용 바둑도장'에서 
권갑용 사범의 밑에서 바둑을 수학하게 돼

 

 

권갑용 8단
이세돌의 바둑 스승이야
후진양성에 힘써 93년도에 한국기원 으로부터 
'바둑문화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훈현의 시대에는
바둑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이 불가피했고
이창호의 시대에는
프로기사의 내제자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 무렵에는 한국에도 바둑도장들이 생겨나게 돼
이세돌이 수학한 권갑용 바둑도장 출신의 다른 유명 프로기사로는
 

 

 
최철한 9단
 

 

원성진 9단
최철한, 박영훈과 함께 일명 '송아지 삼총사'로 불리며
(세 명 모두 85년생 소 띠)
신예 기사 때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박정환 9단
현재 국내 바둑기사 랭킹 1위를 달리며
28개월 연속 랭킹 1위를 기록하고있다
(국내 신기록)
하지만 세계 대회에서는 번번이 탈락하며 '국내용' 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지석, 백홍석, 이영구, 윤준상, 강동윤 9단 등
수 많은 프로기사 및 우승자를 배출하며 
현재 한국 프로기사 랭킹
상위 열 명 중 여섯 명이 권갑용 사범 도장 출신일 정도로
우리나라 3대 명문 바둑 도장 중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야
2003년에는 국내 최초로 도장 출신 프로기사 총합 단수가 100단을 돌파했어
현재도 계속해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내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
참고로 나머지 두 곳은 '허장회 바둑도장'과 '김원 바둑도장'이야


아무튼
이세돌은 권갑용 사범의 밑에서 3년 간 바둑을 공부하며
92년도 부터 4번째 도전만에 
95년도
만 12세의 나이로 프로기사로 입단하게 돼
(역대 최연소 5위의 기록)

이세돌 9단의 입단 동기로는 조한승 9단이 있는데
조한승이 이세돌 보다 한 살이 많아
어렸을 적 부터 붙어 다녀서 지금도 둘은 매우 친해
 

 

조한승 9단

조한승 9단은 동기인 이세돌 9단에 비해
우승 횟수가 적어서 최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기사라고 볼 수는 없어
하지만 유연하고 쉽게쉽게 두는 자신만의 확고한 색깔이 있는 것은 큰 장점이지
때문에 '유연한 승부사' '반상위의 신사'등의 별명으로 불렸어 

우승 성적은 많지 않지만
그의 성품 만큼은 누구 못지 않은 대인배야

2008년 주요 세계 기전 중 하나인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동기 이세돌 9단과 만나 아쉽게 패했는데
이세돌 9단 과 조한승 9단은 우승,준우승 상금 전액을
쓰촨성 지진피해 복구에 쓰일 수 있도록 전달하였고
2010년에는 군복무 중 출전했던 GS 칼텍스배의 준우승 상금 1200만원을
천안함 유족들에 전달했어
그리고 2012년에는 
국수전 우승상금 4500만원을 전액 유니세프 
봉사단체에 기부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단체전 부문 금메달을 획득
27사단 이기자 부대 수색대대 복무 중(상병)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된 조한승
좌측의 인물은 일베에서도 유명한 전인범 전 27사단장
현재는 중장 진급 후 육군 제 1 야전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 중이야
 

2012년 여러 기부활동으로 사회에 모범이 되어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는 조한승 9단
 

프로입단 동기인 이세돌과 조한승

이세돌과 함께 지내며 동생의 바둑을 봐주던 형 이상훈은
마침내 동생이 프로 입단을 결정짓게 되자 이틀 후
곧 바로 군 입대를 하게 돼
때문에 이세돌은 입단 후 곧바로 혼자 지내게 되었지

이세돌은
어려서 부터 집에만 있어서 주위에 연락할 만한 친구도 없었어 
더군다나 섬에서 자라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오다 보니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입단 동기인 조한승 9단이 이세돌 9단을 친동생 처럼 많이 챙겨줬다고 해
이세돌 9단은 그런 조한승 9단을 많이 따랐지

입단 직후 초初단 시절에는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해

이때까지 승단은 매해 치뤄지는 한국기원 자체적으로 치뤄지는
승단대회를 거쳐서 합격해야
승단이 됐거든

3년 후인 1998년도에
이세돌은 2단으로 승단을 하게 돼

그리고 그 해 3월 2일 이세돌의 생일날
비금도에서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가 세상을 떠나게 돼
서울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던 이세돌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이무렵 실어증에 걸리게 된다
함께 지내던 형 조차도 군에 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세돌은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어
그 후유증으로 이세돌은 지금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처음 이세돌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여자 목소리 같은
얇은 목소리에 놀라기도 해

이세돌은 처음엔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목소리 덕에 사람들이 자신을 더 많이 기억해줘서
그의 얇은 목소리가 맘에 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세돌은 거기서 무너지지 않고 
이듬해 곧바로 3단 승단

2000년도 부터 비로소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파죽의 32연승을 달리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무패소년' '리틀 조훈현' 등의 별명을 이때 얻게 돼
지금도 그렇지만
신인 시절에는 지금 보다 더한 공격형 기사였거든
속기파 공격형 기사였던 이세돌은 
조훈현의 젊은 시절 장기인 쾌속의 수법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어

이세돌은 신인시절 부터 이창호와 자주 비교가 됐어
"이창호가 흑도黑道라면 이세돌은 백도白道류의 기사다"
이창호의 바둑은 검고 무거운 느낌이 강한 바둑이거든
그 깊이가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깊다 못해 그의 바둑에서는 음울함 마저 느껴진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어

반면 이세돌의 바둑은
빠르고 날렵한 전광석화 같아서
언제나 환하게 빛나는 순백의 돌과 같았지
사실 이러한 평가는 이창호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신인 시절
공격형 기풍의 스승 조훈현, 유창혁과 비교되며 처음 쓰였었는데
이창호가 1인자에 올라선 후 이세돌이 등장했고
이창호와 이세돌이 비교되며 흑도와 백도의 표현 또한 다시 등장했어
 

신인 시절 이세돌의 모습

이세돌은 사진을 봐도 항상 웃는 표정이 많아
장난끼가 많고 통통튀는 성격은 언제나 주목을 받기에 좋았지
하지만 이창호는 언제나 잘 웃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았어
성격적인 부분에서도 기풍에서도 둘은 극 과 극에 서있었지

사람들은 
언제나 상극의 대결에 열광해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를 좋아하지

'신과 악마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최강의 창이냐 최강의 방패냐'

이창호와 이세돌 또한 그랬어
그래서 이 둘의 첫 대결이 언제쯤 펼쳐질지 늘 귀추가 주목됐지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
이세돌은 무섭게 성장했고
금새 이창호가 서 있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됐지

2001년
'제 5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많은 바둑팬들이 기다리던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결이 펼쳐지게 된다
창이냐 방패냐
수 많은 관심이 이 승부에 집중됐어

 

제 5회 LG배 결승전 제 1국
 

매서운 눈빛의 이세돌



최강의 방패와 최강의 창이 처음으로 맞부딪혔던 순간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어느 쪽일까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