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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은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는데 결과는 당연히 참패였습니다. 

 

 

그래도 독일군의 최후의 공세에 당황한 연합국은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이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민돌격대 대장이었던 괴벨스

 

그렇게 베를린 주위에는 소련군 3개 전선군이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련군의 병력은 약 250만 명, 전차 6,250대, 전투기 7,500대, 각종 화포 40,000문 등 거대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수비대는 70만 명의 병력과 1,519대의 AFV, 2,000여 대의 전투기, 9,000문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독일군 병력 수치도 전부 멀쩡한 병력은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 전투 경험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를린 근교에서 포격을 준비하는 소련군

 

4월 21일 소련군 포병은 드디어 베를린을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격에 사용된 포탄 숫자는 서방 연합군의 폭격기가 대전기 내내 베를린에 투하한 폭탄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자 독일군 상층부는 물론이고 최하위 말단 병사까지 눈앞에 다가온 나치 독일의 최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인리히 힘러는 항복 협상을 위해 자신의 무장친위대 병력15,000~20,000명을 몰래 빼돌려 놨고 자신과 친한 슈타이너에게 히틀러와 사령부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독일에게는 사실상 항복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독일군은 계속 저항했습니다. 항복을 택하기엔 나치가 전쟁 내내 동유럽에서 자행한 범죄와 잔학 행위가 너무 심했습니다. 소련에게 항복해서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던 독일군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4월 23일에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을 최후의 베를린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지만 소련군의 각 전선군들은 베를린 포위 작전을 계속 진행중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자 측근들의 탈출 요청도 거부하고 자신은 베를린에서 죽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리고 4월 24일 베를린은 소련군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탈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틀러는 4월 29일 비서에게 총통 직책을 다시 둘로 쪼개 칼 되니츠에게 대통령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총리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를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 달라고 했다가 신임을 잃고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도 총통 몰래 스웨덴의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 협상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어 마찬가지로 승계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4월 30일 그녀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였습니다.

 

 

총통 벙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소련군은 계속 중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4월 30일에 나치 독일의 심장이자 베를린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도달하였습니다. 총통 벙커가 있는 총통 관저도 제국의사당에서 가까운 곳 지하에 있었습니다. 제국의사당 구역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무장친위대의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였습니다. 이들은 몇 안되는 티거 2, 3호 돌격포, 4호 전차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벌였습니다. 제국의사당 내부는 이 사단의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육박해 오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에 맞서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제국의사당을 방어했습니다.

 

 

사실 일개 건물에 불과한 제국의사당이 이렇게 의외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의사당 내부와 주변의 병력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km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의 일명 '동물원 대공포탑(Zoo flak tower)'의 화력 지원도 컸습니다. 이 대공포탑은 독일군 최강의 대공포였던 12,8cm FlaK 2연장 4정(총 8문)과 많은 중·소구경 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공포탑이 건재한 이상 제국의사당을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소련군은 결국 파괴는 못하고 4월 30일에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으며, 대공포탑이 항복하자마자 제국의사당이 함락되었습니다. 실제로 저런 콘크리트 요새는 현대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하여 당시 존재하던 기술력으론 지진폭탄이나 신형전함의 함포사격, 열차포 정도를 동원해야 부술 수 있었으며 당시 소련군이 현장에서 사용하던 야포나 자주포로는 파괴하는게 불가능했습니다.

 

 

제국의사당 내부의 독일군이 전멸함으로서 의사당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은 결국 나치 독일의 상징인 제국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때가 5월 1일 오전, 한밤중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국기를 게양할 당시에도 독일군의 방해를 상당히 받았습니다. 물론 깃발만 꽂는다고 그 순간부터 전투가 끝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국의사당과 그 주변에 있었던 독일군과 소련군은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을 했습니다. 

 

▲항복한 독일군 장성급 포로들(제일 왼쪽이 헬무트 바이틀린 대장)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게 점령된 직후 베를린 방어 사령관이었던 헬무트 바이틀링 대장이 소련군에 항복하였습니다. 이로서 공식적으로 베를린 전투가 끝났습니다. 헬무트 바이틀링은 소련군의 요청에 따라 시내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독일군에게 항복을 명령하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폐허가 된 베를린 시내 곳곳에 방송차량이 다니며 바이틀링의 항복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그렇게 베를린 시내의 잔존 독일군의 완전 소탕은 첫 항복 조인식이 열리던 5월 8일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은 5월 8일을,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