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최후의 결전 대규모전투 금성전투
안녕하세요!
6월25일이 다가오면서
포스팅 초점이 한국전쟁으로 계속
맞춰지는거같네요...
한국전쟁하면 많은분들이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전투.용문산전투.춘천전투등을 많이
떠올리실꺼라생각됩니다.
한국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지고
있을때 금성지역 북방에 위치하여있던 중공군과
국군이 치른 대전투가 금성전투입니다.
7.13 공세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럼 금성전투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0일까지 벌어졌어요
대한민국 지휘관으로는 임부택 제11사단장 .
김용배 제7사단장이였구요
중공군 지휘관은 현리전투에도
나왔던 펑더화이였습니다.
대한민국 병력은 11사단.8사단.6사단.5사단.3사단.
수도사단.L-20경비행기30대였구요.
중공군은 제24군.54군.60군.67군.68군.
산하 12개 사단이나 됬습니다.
1953년 3월 휴전에 반대하며 전황을
지지부진 끌게 만들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953년 4월 즈음 휴전은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만이
휴전은 불가하다면서
단독 북진을 외치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년 6월, 휴전협상은
종반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중국은 휴전이 맺어지기 전
마지막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내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중공군은 전쟁 중 항상 미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노렸고,
이런 결정에 따라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금성 돌출부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게 됩니다.
이 때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공격하는데
6개 사단을 동원했으며, 다시 후방에서 4개 사단을 증원시켰고
34개 대대 포병 390문의 야포와 말 1만필과 마차 1500대도
동원하는 등
1951년 춘계 공세 이후 최대 병력을 투입하였습니다.
<중공군 출정식>
물론 한국군도 이에 맞서 선전했으나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지 얼마 안돼
실전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인데다
수적으로도 열세고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형편이라 중과부적으로 방어선을 내주고 저지선에서
후방 4km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포격과함께 돌진하는 중공군>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은 11일에
하루에만 6만발을 기록하는 등
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유엔군과 미군의 전투기 출격횟수
또한 2143회를 기록함으로서
참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1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비록 전선 전체의 돌파에는
실패했으나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를 지키던
국군의 방어지역 일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합니다.
중국이 휴전 직전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었듯이 한국 또한 마지막 전투를 패배로 기록해두고
싶지 않았기에 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3년 7월 중공군 5개 군(약 24만명)이
금성 돌출부로 모이기 시작하자 긴장한 한국군 또한
6개 사단을 동원해 방어에 나섰으며, 휴전을 직전에 둔
시점에서 한국군과 중공군은
그 규모가 개전 이래 최대급이었습니다.
<중공군 전차부대>
7월 13일부터 중공군은 한국군이 방어하는 전선에 대한
대규모 집중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중공군의 이같은 공세로 미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국군의 방어선을 금성천 남단으로 재조정하여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배치하고 5사단은 백암산
남쪽 고지군의 방어선을 구축,
강화시켜 아군의 후방인 화천 저수지까지 노리며
진격해오는 중공군을 저지했습니다.
더욱이 홍수로 인해 보급이 곤란해진 중공군에 비해
한국군은 미군의 막대한 보급물자를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으며,
새로 도착한 증원군들에 힘입어 병력을 보충하고
화력을 충원하여 반격을 시작하게됩니다.
폭우로 중공군이 재정비하는 사이 7월 16일부터
김종묵 소대장이 이끄는 특공대의 활약과 더불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구성)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미 제8군의 공격목표인 아이슬랜드 선
(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였으나,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 북안의 원진지는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중국군이 전선 전체를 돌파당할 경우 증원군을 투입하여
반격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휴전을 눈앞에 두고
대규모 전투를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은
UN군의 제지로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한 채
전선 일대에서의 공방전만 이어가다가
종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났으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비롯한 고지를 잃었습니다.
중공군은 금성천 북안의 주요고지를 점령하게 되었지만
점령지의 절반을 다시 내어준것과 화천댐 공략 실패로
인해 국군보다 2~3배가 우세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인명피해가
국군에 비해 3~4배 발생하였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전과가 이긴합니다...
1주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한국군은 전사 및 실종자 수천 명을
포함하여 14,3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중공군은 66,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됩니다.
이렇게 사상자가 많은 것은 양측
모두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는 점,
그리고 한국군이 중국군에 비해 자질 및 장비 면에서
그다지 나은 점이 없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한국군의 자질을 강화하고
무기 및 장비를 새로 지급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정전 협정의 조인
휴전 2주만 남겨둔 상태에서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 협정을
연기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귀환하지
못한 국군 포로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 이어졌지만
소규모 전투만을 지속하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언제 전쟁이 재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다가오는 6월25일 우리는 항상 잊지말고
준비하고있어야 합니다.
사진 및 참고자료 : 구글.나무위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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