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전쟁중

 

가장 참담한 패전 현리전투

 

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날짜는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2일동안 펼쳐졌구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일대에서

 

펼쳐진 전투입니다.

 

현리 전투는 아마 한국군 전쟁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은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vs 북한군.중공군

 

대한민국 지휘관으로는 3군단장 유재흥.7사단장 김형일,

9사단장 최석,3사단장 김종오

 

중공군 지휘관은 펑더화이 였습니다.

 

우리나라 국군 제 3군단과

 

종궁군 제9병단 12군,20군,27군과

 

북한군 제2,3,5군단이 치룬 전투입니다.

 

 

 

이제부터 좀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1951년 4월, 신규병력을 충원해 전력을

 

확충한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전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4월 공세,

 

혹은 춘계 1차 공세로 불리는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그야말로 이영호의 반땅 가르기

 

싸움과도 같은 무제한 화력과

 

우주방어로 저지에 성공하게됩니다.

결국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

 

 전력을 온존, 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특히 약한 국군을 제대로 박살내기로 결정합니다.

2차 춘계공세, 혹은 5월 공세라 불리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9사단을 앞세운 한국 육군 제3군단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한국 육군 5사단, 7사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9병단 예하

 

지상군 12, 20, 27군단이 미 10군단

 

 휘하 5사단과 7사단을 돌파해 깊숙이 파고들고

 

동해안 쪽에선 인민군 육군 2군단, 5군단이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 한국군 네 개 사단을

 

삼중으로 싸먹어 완전히 결딴을 내고

 

동부전선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려는 계획이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3군단의 왼쪽을 맡은 중공군 9병단은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의 방어선을 가볍게

 

뚫어제껴 버렸으나, 옆 미 2사단이 한국군의 패주로

 

 동쪽이 휑하니 비어버린 상황에서도 벙커고지에서

 

화력과 우주방어로 돌파가 확대되는 걸 저지하면서

 

 애초 의도대로 돌파구를 열지 못했고,

 

이 덕에 5사단과 7사단은 막 밀려나고 연대가 통째로

 

 날아가고 하면서도 완전 붕괴까진 안 되고

 

 물러서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3군단의 오른쪽을 파고들었어야 했을

 

인민군 2군단, 5군단마저도 돌파조차 성공하지 못하면서

 

 이들의 계획은 엉켜버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중공군의 선두 부대는

 

 산을 타고 내달려 오마치 고개에 도달하게됩니다.

당시 한국 육군 3군단은 오마치라는

 

 단 하나의 고개후방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고개가 미 10군단 휘하 한국 육군 7사단의

 

 관할구역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군단에서

 

오마치 고개에 수비 병력을 두려고 했는데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무슨 생각으로 구역 침범 하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오마치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습니다.

중공군 역시 오마치 고개를 잡으면

 

국군 3군단의 목줄을 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공세 개시 후 5월 16일 국군 7사단을 뚫어버리자마자

 

 60사 178연대 2대대 병력들을 고개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었고,

 

 이 와중에도 선두 5중대는 한밤중에 산을 타고

 

 30km를 돌파한 끝에 5월 17일 새벽에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국군 7사단은 두들겨 맞으며 밀려나는 와중에

 

 오마치가 점령당한 걸 알았지만 한국 육군 3사단이나

 

 9사단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전하지도 않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결국 3군단 쪽에서 오마치가 점령당했단 사실을 안 건

 

17일 새벽에 부대 차량들을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철수시키다 오마치에서

 

총알 세례를 받고 나서였습니다.

 

 

<참호를판뒤 공격하는 중공군>


한편 옆 동네 7사단의 방어선이 뻥 뚫리고

 

오마치 고개도 차단당한 사실을 안 9사단장 최석 장군은

 

 사단에 대한 전면 공격은 없었지만 포위를 우려해

 

 휘하 부대들에게 후퇴 지시를 내렸고,

 

9사단도 후퇴하자 3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후퇴 지시를 내리게됩니다.

 

 

 

낙오병인지 패잔병인지 3군단 병력은 차량과

 

중장비를 버리고 현리의 남쪽 방대산을 오르며

 

 남쪽으로 도망쳐 갔고,

 

방대산은 수만 명의 인파에 뒤덮일 지경이었습니다.

 

 작전도 없고 지휘도 없는 발걸음이었으며,

 

그러니 보급도 없고 식량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수가 결집해 도망갈 경우에는

 

 적의 추격을 막거나 차단막을 강행돌파하는 게

 

가능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리고 운 나쁘게 산을 헤메다가 체력이

 

바닥난 뒤 숨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중국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에게 포로간된 한국군>


산속에서 헤매는 병력들에게 제대로 된 보급을 할

 

병력도 계획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군단 본부에

 

 있던 인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산속 곳곳에

 

쌓아 두는 게 그나마 가능했고,

 

이런 주먹밥을 얻은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고 하염없이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3군단이 버리고 간 막대한 장비는 중공군이

 

 그대로 이용할 상황이었고,

 

이걸 막고자 미 공군은 현리 일대에서

 

 3군단 장비를 폭격하는

 

어이 없는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3군단 본부에선 어떻게 창촌에서 병력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패주 행렬이 창촌에 왔을 때는

 

 소수 중공군 부대가 이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창촌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사기가

 

떨어진 한국군 병력은 다시 후퇴했고,

 

결국 산을 넘고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하진부리에서야 겨우 수습되었습니다.

 

이렇게 3군단이 나흘만에 70km를 도망치면서

 

동부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일보직전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대위기 상황에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육군대장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예비대를

 

 빼내 전선을 틀어막고,

 

포위된 사단을 구출하여 겨우겨우

 

전선유지에 성공했으며

 

 

 국군 1군단 병력이 대관령 방어에 성공한 덕분에

 

그나마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8군에서는 3군단에 더 이상

 

 밀려나지 말고 현 방어선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3군단은 하진부리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게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또 다시 밀려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1일이 되자 3군단 병력은

 

또 다시 패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상황은 현리 때처럼 군단 지휘부가 병력과

 

 동떨어져 있던 상황도 아니었던지라 현리 때보다

 

 이 때가 유 장군이 제대로

 

움직였어야 했었습니다.

 

 장비는 없고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진 상태라지만

 

부대 수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이시기에 유재흥 장군은 수습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 합니다.


결국 이 상황에 격분한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 해체를 명령하게 됩니다.

 

 현리에서의 패배가 3군단 해체의 원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리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로 군단이 해체된 건 아닙니다.

 

하진부리 일대에서 또 다시 어이 없이 붕괴되는

 

 3군단의 상황을 목도하고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 해체를 결심하게 한 것이죠

이 당시 유재흥 장군과 밴 플리트 장군의 대화는

 

지금도 전설로 회자될 정도입니다.

 

벤 플리트 : "유장군,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잘 모르겠습니다."

 

벤 플리트 : "당신의 예하사단은 어디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벤 플리트 : "유장군 ,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

 

5월 23일부터 반격작전이 시작되자

 

그때까지도 쫄쫄 굶어가며 산속을 헤메고 있던

 

 한국군 낙오병들이 대규모로 수습되었고,

 

그 결과 27일까지는 병력의 약 70%와

 

장비의 30%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전사 혹은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수습은 했으나 전투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여

 

편제에서 빠진 병력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70퍼센트나 되는 병력이 전투 이후에도 건재했던 건

 

중공군의 포위 작전이 계획대로 제대로 되지 않은 덕으로,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오마치 고개와 창촌을

 

차단하면서 3군단의 철수 경로를 어느 정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래 의도했던 촘촘한 포위망을

 

짜는 데는 실패했고, 그 결과 소수 병력만이 차단과 추격에

 

 나설 수 있었으며 게다가 한국군이 그냥 퇴각한 게 아니라

 

 나름 무리를 지어 도망쳤기 때문에 어설프게

 

 차단했다가 다수의 한국군 패잔병들에게 깔려

 

역으로 전멸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군 패잔병이 산을 타고 후방으로 오는데

 

성공한 건 그 때문입니다.

 

(중공군이 제대로 포위망을 구성했던

 횡성 전투 같은 경우에는 생환하여

추후 전투 투입이 가능한 병력이

고작 30퍼센트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러나 더 참담한 일은 열받은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을

 

 모조리 해체하여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를 폐쇄했고,

 

 한국 육군 제1군단을 미 제8군의

 

직접통제로 바꿔버린 일이었습니다.

 

 3군단의 해체로 인해 육군은 오직 단 하나의

 

 군단급 제대만을 가진 존재로 전락했으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육군본부는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모두 박탈당하고 이후로는

 

후방지원업무만 담당하게 됩니다.

 

패전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아직도 3군단 시설 몇개가 현리에 세워져 있으며,

 

육군 어느 부대든 정신교육 시간에 수시로

 

 교육하는 소재가 되고 맙니다.

 

 

 

현리 전투 당시 3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한국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수준의 공적을 이룬 인물이었지만,

 

현리 전투에선 계급장 뗀

 

낙오군인 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나중에 백마고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명예를 회복을 합니다.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그랬지만,

 

특히 현리 전투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무능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특히 9사단장 최석 장군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최악이라서,

 

 심지어 광인이라는 폭언까지 등장합니다.

 

유재흥 장군조차 애둘러서 최석의 무능력함에

 

 대해 비판을 합니다.

 

 

3사단 18연대는 백골연대란 별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지금은 진백골연대로 변경),

 

이들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하란 명령을 받았지만

 

제대로 시도도 못 하고 흩어져 패주행렬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패주행렬을 쫒거나 차단하는

 

적 병력들이 있으면 그 자리에 있던 백골부대원들이

 

 힘을 합쳐 적 병력을 격퇴하는 위엄을 보여줬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나무위키.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