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나치 독일의 엘리트 수호부대인 친위대(SS)는 SS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를 필두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달루게 등과 함께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말살하는 계획인 '최종 해결'의 실행과정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 말까지 SS는 엄청난 대량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특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골수 나치분자로 1931년 친위대(SS) 정보부대인 보안방첩대(Sicherheitsdienst; SD)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이드리히는 SS의 정보업무를 군 정보기관 수준으로 끌어올려 조직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런 하이드리히의 능력에 만족한 히믈러는 하이드리히를 1933년 바이에른(Bayern) 주 부경찰청장으로 임명하였으며 1934년에 헤르만 괴링(Hermann Göing)으로부터 게슈타포(Gestapo) 지휘권까지 넘겨 받으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1941년 6월에는 독소전쟁에 앞서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토벌을 위해서 살인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을 조직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했으며, 1941년 7월에는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유럽전역에 걸친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을 건의받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 학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유대인 학살계획은 하이드리히의 이름을 따서 "라인하르트 작전"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이드리히 진급 내역

1922. 4. 1: 해군 사관 후보생(Fähnrich Zur See)
1924. 4. 1: 준위(Oberfähnrich Zur See)
1926. 7. 1: 소위(Leutnant Zur See)
1928. 7. 1: 중위(Oberleutnant zur See)
1931. 7.14: SS 이병(Mann)
1931. 8.10: SS 소위(Sturmführer)
1931.12. 1: SS 대위(Sturmhauptführer)
1931.12.25: SS 소령(Sturmbannführer)
1932. 7.29: SS 대령(Standartenführer)
1933.11. 9: SS 준장(Brigadeführer)
1934. 6.30: SS 소장(Gruppenführer)
1941. 9.27: SS 중장(Obergruppenführer)

 

 

그렇게 언제나 히틀러의 적을 제거하는 선봉에는 언제나 하이드리히가 서 있었습니다. 특히 하이드리히는 인종학살을 고안한 주요인물 중 하나였으며 승승장구 하던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말에 이르자 히틀러는 유럽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독일군은 모스크바(Moskva)까지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연합국은 나치 정권의 핵심인물이자 제2의 히틀러가 될 수도 있는 하이드리히를 제1사살목표로 지정하고 표적 사살(Targeted Killing)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으로 불렸습니다. 영국군 특수작전국(SOE)은 1941년 10월 20일부터 유인원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SOE 2인조 작전팀은 제138비행대대의 핼리팩스 수송기 편으로 1941년 12월 28일 체코로 이동하였고 기차에서 하이드리히를 사살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차에서 암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포기하고 하이드리히의 저택에서 프라하로 향하는 도중에 숲속에서 매복공격을 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 차량에 무장병력이 있는걸 확인하고 프라하에서 암살하기로 다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1942년 5월 27일 10시 30분 하이드리히는 파넨스케 브르제자니(Panenské Břežany)의 자택에서 프라하 성의 사무실로 출발했습니다. 영국의 특수부대 SOE 2명은 프라하 8번 국도상에 있는 불로브카(Bulovka) 병원 골목의 전차 정거장에서 잠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연 하이드리히의 메르세데스 벤츠 320C 컨버터블 차량이 속도를 줄이면서 코너를 돌자 SOE 요원 한 명이 하이드리히의 차량 앞을 막아섰습니다.

 

 

그리고 품속에서 스텐 기관단총을 꺼내서 발사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기관단총이 기능고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하이드리히는 운전사에게 차량을 멈출 것을 명령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총을 꺼내들었습니다. 좌석에서 일어난 하이드리히가 권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또 다른 SOE요원 한 명이 개조한 영국제 73식 대전차용 수류탄을 오픈카 안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수류탄은 완전히 차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차량의 오른쪽 뒤편에 부딪히면서 폭파했습니다. 폭발과 함께 수류탄과 차량 부속의 파편이 하이드리히의 몸으로 파고들었습니다. 한편 자신이 파편으로 부상당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는지, 하이드리히는 차 밖으로 뛰어 나와서 권총을 쏘면서 SOE요원을 쫓아갔지만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곧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겨우 현장을 빠져나온 SOE 요원 2명은 자신들의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이드리히는 곧바로 250미터 앞에 있는 불로브카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으고 회복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으로부터 1주일이 지나자 하이드리히는 완치된 듯이 보였지만 다음 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이 아끼던 하이드리히가 죽자 하이드리히가 죽은 체코의 리디체(Lidice)라는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16세 이상 남자 196명을 모두 처형한 뒤에,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105명의 아이 중 88명이 죽고 17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학살 사실을 전세계에 공표했습니다.

 

 

암살에 성공한 SOE 2명은 교회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은신처가 발각되었고 6월 18일 03시 45분, SS 병력 700여 명이 SOE 요원이 은신한 교회로 신속히 출동하여 04시 15분 교회 인근에 차단선을 구축하고 공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곳에는 하이드리히 암살에 성공한 SOE 2명 외에 암살에 관여한 5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관단총, 수류탄으로 무장하여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SS 병력을 상대로 2시간 동안 치열한 혈투를 벌이다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SS 병력도 14명이 전사하고 2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작전은 2차대전을 통틀어 독일 정부 고위인사에 대한 유일한 암살작전으로 기록되었으며 지금 현재까지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교회 벽에는 총탄 흔적이 남아있으며 초모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일화는 새벽의 7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2016년 8월 12일에 개봉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드리히 역을 맡은 배우 데틀레프 보테라는 독일인 배우가 하이드리히와 너무 닮아 한번 더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