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나라를지킨 푸른별 6사단 청성부대
안녕하세요
제가 6사단 출신이라 그런지
6사단에대해서 글을 자주 쓰는거같네요^^;;
이번엔 한국전쟁당시 청성부대 6사단에
활약에대해 빠르고 쉽게 써보도록할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북괴 김일성(金日成)의 명령으로
완전무장한 20만의
전쟁 발발 당시 북괴군은 국군보다
약 2배 병력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국공내전에 참전했었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해 온 김일성의 노력으로
북괴군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에
부담을 느낀 미국은 국군에게 군수물품 및
무기를 지원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병력 면에서도,
장비 면에서도 열세인 상황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군은 동시다발적인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즉 북한군의 연속적인 승리와
대한민국이 위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등장하니,
이끄는 6사단의 활약이었습니다
신화의 시작, 춘천대첩
북괴군의 초기 남침 전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괴군 제2군단은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공략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 주력의 후미를 차단,
제1군단과 협력하여 격멸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였고
국군의 주력은 북괴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하여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6월 30일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승전으로 전세가 유리했던
그들은 왜 국군을 추격하지 않았던걸까요
그 이유는 김종오(金鍾五) 장군 예하
6사단 장병들이
춘천에서 북한군 제2군단 병력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성공,
북괴군의 전쟁 전략에 대한 막대한 차질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인 6월 24일.
채병덕(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외출 및 외박,
휴가를 가지 못했던 장병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군을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는 개전 초기 국군은 인원 편제가 부족한 상태에서
적을 맞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김종오(金鍾五) 장군은 개전 발발 2주 전,
6사단장에 부임하였고
'전쟁이 임박했다'는 판단 하에
장병들에 대한 정신교육,
전쟁에 대비한 진지공사와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여
전쟁이 발발하자 혼란없이 적군에 대한
전투를 차질없이 시행할 수 있었던겁니다.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은
춘천에 주둔한 6사단 7연대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7연대 병력들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주포(SU-76) 2대가 파괴당하고 맙니다.
(가운데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당시 북괴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은
강원도 인제로 진격해있던 상황이었는데
북괴군 제2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은 제2사단이
춘천 제압에 실패하자
제7사단을 춘천으로 불러들이게 되고,
제7사단은 인제에 최소의 병력만 남기게 됩니다.
제2사단의 공격은 잘 막아내었으나,
제7사단이 원군으로 합세하여
6사단에 대한 철수 명령을 하달합니다.
이미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었고,
아군의 주력이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만이 춘천에서 전과를 올리고 있었으나,
오히려 적에 의해 6사단이 포위되어
격멸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6사단은 6월 29일 춘천을 포기,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6사단 19연대 소속 조달진(趙達珍) 일병은
자신을 포함한11명의 특공대를 구성,
6월 28일 10시경 홍천 말고개를 지나던
북괴군 전차대열에 육탄 공격을 감행,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6대를 노획하는
성과를 이루게됩니다.
-그를 비롯한 육탄 11용사는
현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춘천에서의 승리는 적군의 발을
멈추게 하였으며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남침에 대한 논의와
패퇴한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는 등의
소중한 시간을 벌인 전투였으며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춘천에서의 패배를 겪은 북괴군 지휘관들은
일제히 교체되게 됩니다.
(김무정 - 훗날 김일성에 의해 숙청 당한다.)
춘천에서 패배한 김광협(金光俠) 대신
김무정(金武亭)이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제2사단장 이청송 대신 최현(崔賢)이 임명되었고
제7사단장 전우 대신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제7사단은 제12사단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대통령 부대표창 1호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 전투
임부택(林富澤) 장군은
당시 6사단 7연대장이었습니다.
7연대는 춘천에서 철수하여 7월 4일,
충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쉴 틈도 없이 7연대에
김종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
"우리를 따라 내려온
북괴군 제15사단을 격퇴하라."
7연대 병력들에게는 쉴 틈도 없이
또 다시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644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6사단 7연대 2대대 병력 앞으로
웬 여성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동락국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녀는 2대대장 김종수(金鍾洙) 소령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북한군 15연대 병력들이
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김종수 소령을 비롯한 2대대의
각 중대장들은 김재옥이 제공한 정보에 대한
사실여부를 파악하였더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북한군이 경계병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2대대 병력들은 동락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적15사단
48연대 병력에 대한 기습을 실시하였고
북괴군 천여 명을 사살하고
중장비를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얻는데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성과로 국군은
북한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무기를 획득하였고
소련이 북한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리게됩니다.
국군이 반격한 전투 중 최초의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 대한 1계급 특진과
대통령 부대표창 1호를 수여하였습니다.
김재옥 여교사는 이때의 전투에 참여했던
이득주(李得周) 소위와 결혼하게 됩니다.
가자, 압록강으로!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으며…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탈환합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北進)을
시작하게됩니다.
북으로 도망을 쳤고
압록강을 바라고 진격했습니다.
국군은 통일을 위하여 북한군을 추격하며
1950년 10월 22일
6사단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장군이
지휘하는 수색대대원들이
평안북도 묘향산 부근에서
김일성의 캐딜락을
노획하는데에 성공합니다.
1950년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1대대는
압록강 초산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압록강 물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하게 됩니다.
국군과 UN군 중 이들을 제외하고는
압록강에 도달한 부대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얼마 안 있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날 비극은 시작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뼈저린 6사단의 패배
김일성의 구원 요청을 수락한 모택동(毛泽东)은
중공군을 한국전쟁에 개입시키게됩니다.
이에 압록강까지 홀로 진격했던 7연대는
순식간에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고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으며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자신의 6사단을 지휘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김종오 장군은 6사단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후임으로 장도영(張都暎) 장군이 6사단장에 임명됩니다.
국군과 UN군은 어렵게 점령했던
38선 이북의 영토를 포기하고
중공군은 이를 계속하여 추격했습니다.
1951년 4월 22일
제6사단은 강원도 화천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를 벌였으나
또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미군들의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決死의 다짐, 용문산 전투
6사단은 화천리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충북 음성에서 최초의 승전을 거두고
국군과 UN군 중 아무도 하지 못했던
압록강 진격을 이뤄냈던 부대였건만,
하루 아침에 패배하여 미군의 조롱을
받는 부대가 되어버렸으니….
하지만, 6사단은 얼마 안 있어
중공군에게 설욕을 함과 동시에
6.25전쟁에서 발생했었던 전투 중
최고의 전과를 이뤄낸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1951년 5월 17일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
(187, 188, 189)이
아군 제6사단 2연대 병력들이 사수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게됩니다.
중공군은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였는데,
2연대 병력들이 도망치지 않고
용문산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는
용문산이 국군의 주 방어선이라고 착각,
'저 곳을 뚫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6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에게 설욕하기 위해,
방탄에
새기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용문산 전투 후 포로가 된 중공군들)
당시 중공군은 2연대가 지키고 있던
용문산을 계속하여 공격하였는데,
용문산 양 옆으로는 아군 제7연대,
제19연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은 미처 이 사실을 몰랐고
2연대만 뚫으면 된다고 판단하여
용문산만 하염없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군 제7연대와 제19연대는
일제히 양 옆에서 튀어나와
용문산을 집중공격하고 있던
중공군의 측면을 공격
했고
5월 21일, 퇴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용문산을 지키고 있던
2연대 병력도 산에서 내려와
모두 합류한 상태로
퇴각하는 중공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화천 저수지까지 추격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중공군
약
17,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2,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부상 494명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서는 화천 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破虜湖)'라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중공군)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이였습니다.
이 전투로 6사단은 중공군에
설욕함과 동시에
한국전쟁 역사상 최고의 성과를
얻는 등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6사단은 강원도 홍천, 경기도 포천 등에
주둔하다가 1966년, 철원으로 이동하여
지금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켰던
북한군 정예 제4사단이
바로 6사단 바로 전방에 주둔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3년 11월 20일
GOP 초병 경계를 서고 있던 상병 이기태,
일병 김효섭이 미상 폭음을 청취하여
상부에 보고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미상 폭음 청취
보고가 들어오자
군에서는 7연대 GOP 지역에
북한군의 땅굴을 의심하여
시추 작업을 실시하였고
1975년 3월 19일,
제2땅굴 시추 작업동안 꽃다운 생명들이
전사(戰死)하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1966년 철원 축선을 담당한 이후로
적의 침투를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의 이 순간.
6사단은 철원 축선의 철책선을 담당하며
365일 24시간 완전경계작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맞서 용문산을 지켜내고,
그대들이 있어 이 나라가 존재합니다
雖死不敗 靑星鬪魂
압록강 물을 다시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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