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을 멸망시킨 히틀러의 뼈아픈 실수 10가지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역대 존재했던 국가들 중 가장 군국주의적인 광기의 나라였습니다. 당시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도 경찰복이 따로 지급되지 않고 군복을 입었으며 심지어 무장 단체가 전혀 아닌 소방관이나 공무원들까지 군복을 입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어린이들은 만 10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해야 했으며 만 18세가 되면 남성은 국방군에 입대하거나 혹은 친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나치 독일 무기들의 성능이 우수한 편이었으며 비밀병기로 불리는 독특한 무기들도 굉장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1939년 9월 고작 1달만에 육군력이 강력했던 폴란드를 철저히 격파하고 단 6주만에 프랑스군을 패퇴시켜 항복을 받아내는 등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여주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았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13년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계정복을 꿈꾸었던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유 10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치 독일은 완전히 전쟁 준비를 갖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공군의 경우 당시 충분할 만큼의 조종사와 조종사 양성 교육기관이 없었으며 이 문제는 전쟁 중반부터 나타났습니다. 또한 영국과 소련 내륙을 공격할 만한 장거리 폭격기 개발이 안된 상태였습니다. 해군의 경우 영국과 싸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며 실제로 당시 해군 사령관들이 히틀러에게 전쟁을 1945년까지 미루자고 건의했었습니다. 육군의 경우에도 전차의 숫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군대의 기계화가 완료되지 않아 개전 당시 상당히 많은 독일군이 마차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전쟁 중반부터 무기 부족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경제 전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씻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 만큼의 경제력이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히틀러의 위험천만한 도박이 성공하고 전격전이란 생소한 신개념의 전술이 성공하여 유럽을 석권할 수는 있었으나 탄탄한 공업기반을 갖춘 미국, 소련에게 전쟁을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후퇴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어떠한 악 조건속에서도 절대 후퇴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덕분에 후퇴 후 반격할수있는 작전에도 절대 후퇴는 없다를 외치며 작전을 무산시키는데 일조하였습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육군 원수 파울루스와 독일 제 6군을 한꺼번에 잃는 참패까지 겪게됩니다. 히틀러는 패망 직전인 1945년 연합군의 협상 제안에도 절대 협상, 항복은 없다를 외칠 정도로 적에게 굴복하는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는 지나친 전략 간섭을 하였습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는 전선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나친 간섭을 하였습니다. 최전선에 나가서 싸우는 사령관들의 판단이 본국 사령부의 판단보다 훨씬 정확하며 이는 전쟁 초반 전격전에서 입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반부터 시작된 히틀러의 지나친 간섭으로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 그라드 전투를 패배하였습니다.
유럽 석권한 후 영국을 바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나치 독일이 유럽을 석권한 후에 영국을 치지 않은 점은 중대한 전략적 실책이었습니다. 이 잠시동안의 기간동안 영국은 독일의 공격을 막을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레이더와 울트라의 등장도 독일이 영국침략 실패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만약 독일이 영국을 점령했더라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몰랐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영국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황에서 소련을 공격했습니다.
영국을 목표로 뒀던 히틀러는 이제 눈을 돌려 소련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히틀러를 설득하려했지만 히틀러는 오직 자신만의 생각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겨나갔습니다. 그렇게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기습 침공하여 초반은 순조롭게 소련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히틀러는 끝까지 전쟁의 경험이 많은 부하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고 결국 전략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끌려온 독일 제6군의 병사들
그리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일군들은 혹독한 소련의 겨울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극한의 추위로 수많은 독일군들이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죽었고 무기의 고장도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소련의 포위 전술로 인해 보급선 마저 끊기면서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은 포위되어 항복하였습니다.
히틀러는 무모하게 영국과 소련을 남겨두고 미국에게 선전포고하였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직후 독일은 일본과 맺은 조약에 따라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국과 소련을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말 미친짓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직후가 1941년 12월 즈음이라 히틀러 입장에서는 동부전선 소련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에 자신감이 넘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동부전선에서 소련에게 참패를 겪게되었고 이후 미국이 직접 유럽에 상륙하여 서쪽을 공략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영국과 미국, 소련에 둘러쌓이게 되었습니다.
동맹국 이탈리아를 너무 믿었습니다.
나치 독일은 제대로 전쟁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던 것은 이탈리아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실제 전력은 기대 이하였고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했던 전력을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빼돌려야 했습니다. 만약 해군 강국이었던 이탈리아의 믿었던 만큼 해군이 잘 싸웠다면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에게 밀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휘에 소질없는 괴링에게 독일 공군 지휘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괴링은 비록 1차 세계대전 공군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휘에는 소질이 없었을 뿐더러 약물 중독자였습니다. 그런 괴링이 올바른 지휘로 공군을 이끌어 나갈지 의문이었습니다. 결국 예상대로 괴릉은 무능한 지휘관으로 낙인 찍히며 영국 항공전에서 실질적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 그렇게 괴링의 신뢰도는 급격하게 떨어졌지만 히틀러는 괴링의 공군 지휘권을 박탈시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괴링은 독일 공군을 말아 먹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본을 너무 믿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되면 일본군이 만주지역에서 소련군을 공격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태평양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소련의 뒤를 공격할 파트너로써 일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독일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세계 최초의 제트기 Me-262를 오용했습니다.
1943년 전쟁 말 독일은 세계 최초의 제트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제트기의 이름은 바로 Me-262로 명명되었고 처음부터 요격기로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Me-262를 요격기로 생산하지 않고 전투 폭격기로 생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엔진 부품과 다른 기계적인 부품들을 전혀 다른 방면으로 다시 개조해야되었고 Me-262는 1944년 말이 되서야 전투 폭격기로 뒤늦게 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이를 후회한 히틀러는 뒤늦게 다시 요격기로 생산을 명하였지만 그떄는 제공권을 되찾기에 너무 늦어버린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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