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남아공은 핵무기 제조에 성공한 이후 이를 자진하여 폐기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입니다. 1993년 3월 드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자국이 보유한 6개의 원자폭탄을 모두 폐기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1994년 IAEA는 사찰 후 남아공에 있는 핵무기들이 완벽하게 폐기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남아공 행동에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핵무기는 사실 많은 나라들이 갖고 싶어 하는 강력한 무기인데 무슨 이유로 자진해서 폐기하였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을까요

 

남아공은 풍부한 우라늄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었고 1960년대부터 미국의 원자로 기술을 도입하여 운영하면서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시도하였으며 1974년부터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77년 미국과 소련의 정보위성이 남아공 칼라하리 사막에서 핵실험으로 보이는 섬광을 포착되면서 남아공은 비공식 핵보유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979년 9월 22일에는 남아공의 무인도 프린스에드워드 제도 근처 해상에서 두 번의 섬광이 미국 인공위성에 탐지되었는데 이는 남아공과 이스라엘의 3차 합동 핵실험인 오퍼레이션 피닉스였습니다. 당시 남아공은 이스라엘과 은밀히 협조를 통해 공동으로 2~3 kt급 핵실험을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남아공은 6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아공의 핵무기 보유는 결국 1980년대 말까지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남아공은 유엔 제재 결의의 단골 대상이었고, 이웃 나라 앙골라와 분쟁 중이었으며, 남아공 국민들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와 함께 강력한 억압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989년 가을 드 클레르크가 남아공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88년 앙골라와 나미비아분쟁에 투입되었던 남아공 병력들이 Ratel 20과 90 장갑차 및 Casspir 대지뢰방어 장갑차와 철수하는 모습

 

냉전이 끝남에 따라 앙골라와의 분쟁은 해소되었지만,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흑인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국제적 강력한 경제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핵무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단지 백인들의 정권유지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아공에 대한 국제적 압박이 더 심각해지자 드 클레르크는 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생활을 하던 넬슨 만델라를 풀어주고, 아프리카민족회의나 공산당 같은 금지된 단체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며 핵무기를 폐기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하고 민주화를 시작하여 평화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6월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NPT 가입 의사를 밝힘으로써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남아공은 NPT에 가입했고 이어 IAEA와 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해 핵관련 시설에 대한 국제사찰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 3월24일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아프리카 제국과 국제사회와의 새로운 관계인식에 근거하여 핵억지력을 포기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남아공은 42개 아프리카 국가들과 함께 아프리카 비핵 지대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런 1980년대 말의 남아공의 모습은 지금의 북한 상황과 굉장히 닮은 점이 많습니다. 북한도 당시의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강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고 국민들은 강력한 억압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이 핵을 폐기한 것처럼 북한도 현재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 북한은 그동안 북미 대화를 하더라도 핵 보유국으로서 인정받아야 하며, 핵무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김정은은 체제 안전과 비핵화 문제를 연계하면서 미국과 마주 앉아 북핵 문제를 논의할 의사를 밝혔으며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한반도에도 하루빨리 비핵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