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독일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자 자연스럽게 양면전쟁에 위험성이 높아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계획 수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참모총장 슐리펜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슐리펜 계획'을 고안해냅니다. 이 슐리펜 계획은 일단 전선이 프랑스, 러시아 양쪽으로 형성되는 것을 막기위해 우선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집중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점령하고 전력의 10% 가량을 동부로 돌려 최대한 러시아의 공세를 지연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이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한테 밀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슐리펜은 독일군 전력의 10%만으로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막아낼 만하다고 착각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까지 끌어들인다면 러시아는 절대 뚫기 힘들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수송망을 고려해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 이상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아주 만약 러시아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력하면 동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는 내주고 최대한 시간을 벌고 프랑스를 39일안에 밀어내고 42일까지 완벽하게 프랑스를 점령한 뒤 주력군을 빠르게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르게 프랑스를 점령하는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일단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하고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다면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42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프랑스의 자금지원으로 러시아가 철도망을 확충하면서 실제적인 시간제한은 갈수록 짧아져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가 이전부터 슐리펜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슐리펜 계획을 본인 멋대로 수정하였고 계획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몰트케는 기존의 슐리펜 계획의 우익과 좌익의 병력 비율은 7:1이었는데 그것을 3:1로 변경하였고 1, 2군을 각각 18개에서 13개 군단으로 축소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총동원이 의외로 빠르자 동부전선에도 우익에서 5개 군단을 빼내 우익을 더 축소시켰으며 후방에 있던 6개의 예비병력을 좌익 지원 위치로 이동시키면서 슐리펜 계획에서 프랑스 포위의 핵심인 우익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축소시켰습니다.

 

 

이렇게 슐리펜 계획이 변경되면서 4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강대국 프랑스를 점령하고 바로 동부로 달려가 러시아까지 상대한다는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으로 바뀌었습니다. 

 

*빌헬름 2세(좌측 첫번째)

 

그리고 당시 독일 3대 황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부쳤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 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다. 군대를 멈춰라!'라고 명령했지만 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네델란드에서 벨기에로 진격 중인 독일군

 

실제로 그 순간 독일군 일부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은 당시 중립을 지키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쳐들어가면서 영국까지 독일에 개전을 선포하면서 상황은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경악한 독일 3대 황제 빌헬름 2세는 뒤늦게 몰트케를 참모총장에서 해임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 원수를 참모총장으로 교체해버렸습니다.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파리 광장에 집결한 택시들

 

결국 벨기에의 저항으로 전선이 벨기에에 묶였고,  1914년 9월 6일~9월 10일 동안 센 강 방어선에서 버티고 있던 프랑스는 파리에서 택시 부대가 끌고 오는 신병까지 받으면서 온 힘을 다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정말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밀려오던 독일군을 방어하는데 기적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단기결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과 연합군은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프랑스 침공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