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神算-이창호 편]
시작한다!!

 

 

이창호 九단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사는 조훈현이 아니라 이창호야
처음 바둑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 이창호 때문이었거든

조훈현이 격동의 시기에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이창호는 늘 극적인 승부를 연출해내며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기사라고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바둑 그까짓거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사람을 미화하냐'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 바둑이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없는 퍼포먼스가 부족한 스포츠야

몇시간씩 앉아서 말없이 돌만 놓다보니
사람들이 지루해하기 쉽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싱거워지기 마련이지

바둑에서는 겸손이 가장 큰 미덕이기에
바둑기사들은 보통 
앞에 나서서 자신을 알리려고 하지않아
때문에 대국의 긴장감과 열정이 타인으로 하여금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운동 종목 못지 않게 그 이상으로
바둑기사들은 자신들의 바둑에
큰 열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 열정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 열정을 함께 느끼고 배워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바둑을 보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해

 

 

어린시절 이창호

이창호는 전북 전주 출신의 75년생 올해 나이 마흔 하나가 되는 중견 프로바둑기사야

참 신기한 것이
한국 바둑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거의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이야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안은
故조남철 9단의 생가가 위치한 곳이고
조훈현 9단의 생가 또한 전남 목포에 있어
그리고 이창호 다음 세대의 최강자인
이세돌 또한 전남 신안군의 비금도라는 외딴 섬에서 태어났고...

전라도 사람들이 다른 건 몰라도 바둑 하나는 기막히게 두는 것 같아

아무튼
어린시절 사진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
이창호는 나면서부터 우량아였어
초 우량아

태어났을 때 4.8kg이었다고 하니까
보통 신생아들의 표준 몸무게가 3kg대인 것을 감안하면
다른 아이들 보다 1.5배 정도 더 컸던 셈이지
전북대표 우량아로 뽑혀서 그 해의 우량아를 뽑는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2위까지 올랐다고 해...

 

어렸을 때 부터 가세가 기울어 힘들었던 유년시기를 보낸
조훈현과는 달리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창호는 어려서부터 부족함없이 자랐다고 한다
바둑을 처음 배운 건
국민학교 1학년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였어

이창호의 할아버지는 전주기우회의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창호가 국민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할아버지가 친구분들과 온종일 방 안에서 바둑을 두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던 이창호는
할아버지에게 자신도 바둑을 가르쳐달라고 조르게 돼

할아버지는 네가 좀 더 크면 가르쳐주겠다 하셨지만
어린 시절 고집이 셌다는 이창호는 떼를 쓰며 
할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워내고야 말지

그 이후로 방학 내내 이창호는 집에서 바둑을 뒀다고 해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혼자 바둑판 앞에 앉아 몇시간씩 바둑을 두는데
그 끈기는 어려서부터 대단했던 것 같아


 
 

 

 

달정도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던 어린 시절의 이창호는

제법 실력이 오르자
동네 기원에 가 바둑을 두게 돼
하루종일 기원에 앉아 기원을 찾아오는 수 많은 사람들과 대국을 했다고 해
할아버지,할머니,아저씨,아줌마,학생
너나 할 것 없이 이창호에게는 그들 모두가 스승이었고
친구였어

할아버지는 이러한 손주의 모습이 대견스러웠고
친구들과 만날 때면 늘 둘째 손주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어
조훈현이고 조치훈이고 부럽지가 않았을 거야
가끔은 손주 녀석을 상대해주어 고맙다며 기원 사람들에게 
짜장면을 대접할 때도 있었어

분명 할아버지는 손주 이창호를 바둑 기사로 키울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창호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어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전주의 금은방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 이재룡씨는
사실 이창호가 나중에 의사나 공학도가 되기를 원했다고 해
그때 당시에 바둑이 인기있었던 것은 맞지만
워낙 예체능이라는 것이 미래가 불투명 하기도 하고
이창호가 어린 나이에 바둑을 잘 두긴 하지만 
재능이 그리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거야

괜히 할아버지의 말대로
바둑을 시켰다가 공부도 바둑도 이도저도 아니게 될 까봐
아버지는 늘 노심초사했어

 

 

 


하지만 할아버지의 결심은 굳어져 갔고
날로 성장해가는 어린 손주의 손을 붙들고 기원 순례를 다녀
동네 기원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크게 성장할 수 없는 법
조훈현이고 조치훈이고 부럽지 않았던 손주를
이때부턴 진짜 조훈현 조치훈으로 만들려고 하셨나봐

수 많은 기원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고수들과 붙으며
손주를 더 성장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러다 전주에서 아마 최고수라 불리던
아마 5단 이정옥을 만나게 돼
사실상 이창호의 첫번째 스승이 되는 사람이야
(일반인 아마추어라 그런지 사진이 안나오노...)

아무튼 이정옥을 만나게 된 이창호는
매일같이 이정옥을 만나 수백판을 두었다고 해
이정옥은 그당시의 이창호를 회상하며
'묘한 아이'였다고 말해

물어보면 따로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수를 기가 막히게 찾고 또 수를 봤는데 거기다 두지 않고 다른 곳에 두고
묘한 생각을 가진 아이였다는 거야

얼마 후 어린 이창호는 인생을 바꿀 만남을 갖게 되는데

바로 故전영선 7단과의 만남이야
 

 

좌측이 전영선 7단

전영선 7단은 후에 조훈현 9단에게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이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이야
전북 전주 출신의 프로기사로서 
2002년에 안타깝게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분이 이창호의 두번째 스승이야
이창호에게 바둑 기본기를 가르쳐 준 실질적인 스승 중의 한 명이지

전영선은 바둑계의 기인으로 통했는데
바지 뒷춤에 항상 소주병을 두병씩 꽂고 다녀 '쌍권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어

기풍은 엄청나게 호전적인 전투형의 바둑이라
적당히 타협하며 집을 짓고 이겨서는 바둑이 아니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어
바둑 기사의 겸손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1967년 한국바둑선수권전 우승 당시의 故전영선 7단의 모습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기사이지
사실 프로7단을 고스톱 쳐서 단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야
사실 전영선은 당시 프로기사였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잠시 고향에 내려와 기원에 들렀다가 어린 이창호를 만나게 돼
지도대국을 둬보고는 기재에 감탄을 하지
이창호 할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전영선은 
한 달에 한 번씩 전주에 내려와 이창호를 지도해주기로 해

처음에는 6점을 놓고 시작해서
이창호가 전영선과 정선(덤이 없이 하수가 흑으로 먼저 두는 것)을 
둘 수 있게 될 때 까지 함께 두었다니까
꽤 오랜시간을 함께 보냈던 것 같아
어린 이창호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던 것이지

위에서도 말했듯이 호전적 기풍의 전영선은
이창호에게 싸움을 가르쳐
'바둑은 전투이며 투쟁이다, 끊지 않을거면 두지도 마라'
그 만의 투박한 방식이었지만
이창호는 늘 싸움을 피해가는 길을 선택하고
스승에게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어

한 인터뷰에서 이창호는 과거 스승이었던 
전영선 사범에게 수를 내지않는다고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안다는 질문에
'수를 내지않았던 것이 아니라 싸움은 복잡하고 자신이 없어 싫었다'고 대답을 해

사실 이러한 이창호의 어릴 적 기풍은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이
나타나는데 이 부분이 참 신기하지
스승이었던 전영선도 조훈현도 모두 전투에 능한 기사들이었는데
정작 이창호는 전투를 극도로 기피하는 기풍을 지니게 되니 말이야

 이 점 때문에 처음에 전영선 7단은 반신반의 했다고 해
바둑에 깊이는 있으나 자신감이 부족하고
힘은 있으나 싸우려 하지 않으니
과연 이 아이가 대성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해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국민학교 2학년 시절 
처음으로 어린이바둑대회에 나가게 돼
예선은 단숨에 통과했지만
아쉽게도 16강에서 당시 6학년 이었던 류시훈을 만나 패배하고 말아

말 수도 적고 감정표현도 서툴었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어 
그 날의 패배가 어린 이창호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

전주 동네에서는 어딜가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른들에게 칭찬만 받으며 지냈는데
막상 대회에 나가보니 자신보다 훨씬 더 잘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던 거야

그날이후로
어린 이창호는 밤늦게 까지 기보를 보며 연습에 더욱 매진했어
명절날 친척어른들이 모두 모여
집안이 시끌벅적 할 때도
이창호는 방안에 박혀 바둑만을 두었다고 해

이듬해 84년 1월
육영재단에서 주최한 어깨동무 어린이바둑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게 되고
전영선 7단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는 결승에 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하필 결승전의 상대가 작년에 이창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긴 류시훈이었어
헌데 이번에는 이창호가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류시훈을 꺾어버리고 우승을 차지하게 돼

이 류시훈도 사실 나중에 프로기사가 되는데

 

 

류시훈 9단

 

프로기사로 입단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7대기전 중 하나인 
천원타이틀 3연패를 이루는 등
프로기사로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게 돼





그리고 석달 후 84년 4월에

또다른 커다란 운명을 만나게 되지

바로

 

 

조훈현 9단

바둑인생 최대의 스승, 조훈현 9단을 찾아가게 돼
프로기사였던 전영선 7단은 이창호의 기재를 꽃 피우기 위해선
반드시 조훈현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해
결국 조훈현을 찾아가게 되고 내제자로 들일 것을 부탁해

하지만 당시 조훈현은
국내 기전을 모조리 휩쓸며
한국 바둑의 최정상을 달리던 1인자였어
조훈현은 전영선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고 말지

 

 

당시 조훈현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아홉점을 접어줄 정도로 클라스있는 분이었어...

한창 바둑기사로서 왕성히 활동해야 할 30대에
제자를 들인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그건 조훈현에게도 이창호에게도 독이 될 수 있는 선택이었으니까
조훈현은 너무 바빴고 이창호를 돌볼 겨를이 없을 것 같았어

얼마 후 전영선에 이끌려
조훈현은 전주로 내려가게 돼
이창호를 다시 보기 위해서 였지
전주 이창호의 집에서 다시 한 번 석점 지도대국을 두었는데
여기서 조훈현이 지고말아
서울에서 처음만났을 때는 조훈현이 석점으로 이겼었거든

며칠만에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어
조훈현, 최강중의 최강 조훈현을 상대로
석점으로 지던
국민학생이 석점 접바둑을 이기게 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을 수 밖에


 

 

 

당시 조훈현이 회상하는 이창호의 첫 인상은
확실히 '천재'는 아니었어
날렵함을 중시하는 조훈현에게 있어
외모적으로나 기풍으로나 이창호는 날렵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묵직함이 있었어
오히려 프로기사인 자신보다 더한 묵직함을
어린 국민학생으로 부터 느낄 수 있었다고 해

결국 고민끝에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고

 

 

 

 

이창호는 조훈현의 손을 잡는다






이창호는 조훈현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게 돼















 

 


자 여기까지가 1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