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오늘은 전 세계 사람들의 스포츠, 바둑

그 중에서도 한국 바둑의 영웅 조훈현에 대해 아라보자


쓰고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1편 2편으로 나눠 보려고해...

한번에 쓰고 싶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면 여러분들이 읽기에도 부담될 것 같고

쓰는 나도 힘이 들어서..ㅋㅋ

어쨌든 시작한다!!


 

 

젊은시절  여자 깨나 울렸겠다


조훈현은 전남 목포 출신의 53년 생으로 올해 나이 64세를 맞은 노장 바둑기사야


조훈현의 어린시절부터 거슬러 올라 가보자면


조훈현의 아버지 조규상씨는

바둑을 즐겨두던 사람이었어 그리 잘 두는 편은 아니었다고해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7~8급 수준이었다고 하니까


당시 조훈현의 집은 2층집이었는데 

2층은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가 있었어

아버지는 조카사위와 바둑을 두며 담소를 즐겼는데

서너살 무렵부터 조훈현은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걸 옆에서 지켜보며 바둑을 배웠다고 해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한 번도 제대로 바둑을 가르쳐 준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와 조카사위가 바둑을 두는데

4살배기 조훈현이 아버지에게 거기에 두면 안된다고 훈수를 둔거야

아버지는 그말을 무시한 채 그냥 두려고 했던 곳에 두었고

나중에 바둑이 끝난 후 복기(바둑이 끝나면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며 패인을 찾아 연구하는 것)

를 하며 아까 어린 조훈현이 훈수를 두었던 곳이 큰 패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


어깨 너머로 배운 4살배기 놈이 그정도 수읽기를 했다는 것에 아버지와 조카사위 모두 놀랐지


그날 이후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에게 정식으로 바둑을 가르쳐주었고

바둑판 앞에서 만큼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바둑을 재밌어하는 아들을 보며 대견해했어 


어느새 비록 접바둑이지만 아버지를 이길 정도가 된 조훈현은

자신을 기원에 데려가 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댔고

조훈현의 사촌매형인 서울대출신 고등학교 수학교사 박승곤이라는 사람이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아버지, 사촌매형과 함께 어린 조훈현은

당시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유달기원'을 찾아가지


아버지가 어린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기 싫어했던 이유는

당시 기원은 내기바둑꾼들이 우글대는 담배연기 자욱한

시장바닥보다 더한 질 안 좋은 곳이었거든...

아마도 아버지는 조훈현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어쨌든 5살배기 조훈현은 그자리에서

유달기원의 원장과 9점 접바둑을 이겼고

원장은 조훈현에게 특별입장을 허락해 주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기원은 어른들이나 들락날락하는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어린 조훈현도 언제든 기원에 와서 

바둑을 둘 수 있게끔 특별하게 허락을 해 준거지


그러던 중 갑자기 조훈현의 집안의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가 살던 큰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가세가 이렇다보니 아버지 조규상은 바둑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던

막내 조훈현을 반드시 바둑으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에 

시장에 나가 아내와 함께 야채장사를 하며

장사가 끝나면 아들을 데리고 매일같이 당시 서울의 최대기원이었던

명동의 '송항기원'에 출퇴근을 시키게 돼

이때는 아직 한국기원이 만들어지기도 전이라

故조남철 9단이 운영하던 송항기원이 서울에서는 가장 유명한 기원이었어

 

 

 

 

故조남철 9단


잠시 故조남철 9단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조훈현이 한국바둑의 세계적 입지를 넓혔다면

조남철은 한국바둑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초대 국수(國手)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기사이자 일본 최초의 한국인 프로기사야

한국전쟁 후의 혼란했던 한국에 바둑보급을 위해 힘썼던 분이야

한국전쟁에도 참전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 자신이 운영하던

기원이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나기도 했어

오늘날 한국기원을 설립하기도 한 분이고 

한국에 프로기사 제도와 바둑용어 정립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훈현과 같은 시대의 

프로기사인 김인, 하찬석, 윤기현 또한 

모두 조남철의 문하를 거쳤어

한국 바둑계에서 이룬 업적으로만 따지자면 

조훈현, 이창호도 그 누구도 조남철의 발끝도 못 쫓아가지

아무튼 대단한 분이야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그런 한국 바둑의 최강자 조남철에게

조훈현의 지도대국(접바둑으로서 고수가 하수의 기력을 알아보고 지도를 해주는 것)을 부탁하고

목포에서 올라온 바둑신동이 있다는 말에 조남철은 흔쾌히 지도대국을 승낙하지


조남철은 한 눈에 조훈현의 탁월한 기재(바둑을 두는 재능)를 알아보았고

그때부터 기원에 다니며 조남철의 밑에서 바둑을 배우게 돼


그러다 조훈현은 9세의 나이에 

제 16회 한국 바둑 프로입단대회를 통과하고

한국 프로기사로 당당히 입단을 하게 된다

이 기록은 세계 최연소 프로입단 기록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어

보통 프로바둑계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설이 있는데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대성을 하고

2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평범한 기사로 남는다는 거야


이 말은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는 것이

엄청난 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엄청 빠른거지만 조훈현은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프로기사의 레벨에 오른거야

 

결국 조남철은 조훈현의 아버지에게 일본유학을 권유하게 돼

당시 50~60년대 한국은 전쟁 후의 격동의 시기였고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반이 전무했어

조남철 본인도 일본에서 바둑을 배운 뒤 

일본에서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조훈현 정도의 기재를 가졌다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필수라며 조훈현의 아버지를 설득하지


조남철과 같은 선구자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조훈현도 유학을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 불세출의 영웅 

조훈현도 조훈현의 내제자인 이창호도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지..

물론 이건 가정이니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어ㅋㅋ

어쨌든 여기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을 일본으로 보내는 결단을 내리게 돼


그리고 조훈현은 혈혈단신 10세의 나이로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조훈현의 부모는 한국에서 일을 하며 

조훈현의 유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에 함께

이민을 갈 수가 없었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조훈현의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거든

그래서인지 조훈현의 일본유학이 결정되자 조선일보에서는

흔쾌히 조훈현의 항공료를 전액 지원해준다


조훈현은 당초 조남철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기타니9단의 가문의

내제자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일본 바둑계에서 기타니9단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세고에 겐사쿠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게 돼


故세고에 겐사쿠 9단


세고에 겐사쿠9단은 생전에 단 3명의 제자만을 거뒀어

세고에 겐사쿠 문하의 또다른 유명 기사로는 오청원9단과 하시모토9단이 있는데

이 둘은 일본 바둑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설들이야

그 중에서도 오청원 9단은

약 20년 간 일본 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엄청난 사람이야

당시 일본은 한,중,일 중 그 상대가 없을 정도로 바둑 강국이었으니

여기서 20년간 최강자라면 역대급 바둑 기사인거지

결국 세고에 겐사쿠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최강자를

모두 키워낸 인물이 돼


아무튼 조훈현이 일본에 갔을 때 

세고에 겐사쿠는 이미 70세를 넘긴 노인이었는데

제자로 받아달라는 조남철의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조훈현과 시험삼아 지도대국을 두어 본 뒤 기재를 보고 깜짝놀랐다고 해

그 당시 세고에9단은 나이가 너무 많아 은퇴한 뒤

제자를 두지 않고 휴식기를 취하는 중이었던 터라

조훈현을 거둘 생각이 없었으나

조훈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거지


같은 시기 당초 조훈현이 들어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기타니 도장에는

세 살 아래의 조치훈이 바둑을 공부하고 있었어

일본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부터 사실은 일본 최고 최대의 도장인 기타니 도장에

들어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조훈현이 만약 세고에를 만나지 못하고

기타니 도장에 들어갔다면 조훈현과 조치훈, 

쌍조의 만남이 좀 더 빨리 이루어 졌을지도 몰라

조훈현과 조치훈은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젊은 시절 한국의 최강자와 일본의 최강자로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거든


세고에9단은 

한국에서 온 어린 조훈현을 거둬 바둑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친아들처럼 키워

정말 자식처럼 키웠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세고에는 후에 조훈현이 병역문제로 한국으로

떠난 뒤 자택에서 목을 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의 유서에

조훈현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기뻤다고 밝혀...


이게 무슨 뜻이냐면

바둑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걸 일본에 전파해준 것이 그 옛날 백제 사람들 이었거든

천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어쨌든 세고에는 이것이 일본이 한국에

은혜를 입었다고 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어떤 면으로는 침략으로 인해

한국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준 일본의 국민으로서

마음의 빚 또한 지고 있었다고 봐


어쨌든 그렇게 세고에 문하에서 온갖 허드렛일과

바둑공부,학업에 매진하여 일본 유학 3년만에 일본기원의 프로입단대회 또한

통과하고 당시 일본 최연소 입단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돼

당시 나이는 13세...

정말 엄청난 재능이지

그리고 매해 승단대회를 통해 단수를 올려가게 돼




그렇게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실력을 키워가던 중 

조훈현의 바둑 인생 두번째 스승인 '후지사와 슈코9단'을 만나게 된다

세고에 9단이 어린 조훈현에게 진정한 바둑의 의미와 정신적 자세를 가르쳤다면

조훈현에게 바둑의 기술과 실전싸움을 가르친 것이 바로

이 후지사와 슈코 9단이야

 

 

故후지사와 슈코 9단


정상급 바둑기사들은 보통 한두개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후지사와 슈코는 '괴물' '괴물 슈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정상급 기사였어

마르고 날렵한 외모와는 다르게 바둑에서는 엄청난 힘을 구사하며

빠른 계산과 전투로 상대를 압살해버리는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지


우연찮게 슈코의 연구실에 들렀던 조훈현은

후지사와 슈코를 만나게 되고 한국에서 유학온 조훈현의 기재를 본

후지사와 슈코는 빠르고 정확한 조훈현의 솜씨에 감탄하게 돼

슈코는 원래부터 속기를 강조한 '속기파'였거든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늘 속기에 대해 강조를 했다고 해

빠르게 두어야 바둑에 대한 감이 날카로워 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어


그런데 조훈현은 빠르게 두면서도 정확하게 두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

조훈현은 이후로도 후지사와의 연구실에서

바둑을 공부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돼


한 번은 조훈현이 후지사와의 연구실에 찾아간 날

연구실의 멤버였던 아베 요시테루 당시 6단과 만나

당시 조훈현은 2단이었는데 이때가 아베와 명인전 예선에서 만나 이긴 후 였어

조훈현에게 패한 아베가 먼저 내기바둑을 청한 거야

그냥 두면 재미없으니 돈을 걸자는 거였어

하지만 조훈현은 내기바둑을 뒀다간 세고에 스승님께 혼난다며

내기바둑을 거절해

재밌는 건 이 내기바둑을  옆에서 종용한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 슈코라는 거야

슈코는 옆에서 조훈현에게

'선생님이 아실리 없으니 걱정말고 둬라'라는 식으로

조훈현의 등을 떠밀어

조훈현의 바둑에 매료되어 있던 후지사와는 

그런 장난으로 조훈현의 실력을 더 보고 싶었던 거지


마지못해 조훈현은 아베와 백엔짜리 내기바둑을 두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6판을 내리 발라버려

당시 프로 6단이었던 아베는 2단밖에 되지않는 조훈현에게

치욕적인 6연패를 당하고 6백엔을 주게 돼

그런데 결국 이게 세고에 스승의 귀에 들어가게 된거야

6연패를 당한 아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

조훈현이 엄청나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거지


첫번째 스승인 세고에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후지사와는 괴짜에다 털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세고에는 진노했고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조훈현을 집에서 내쫓아버려

그따위 정신상태로는 성공할 수 없으니 한국으로 꺼져버리라는 거야

조훈현은 울고불고 빌어봤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

도쿄거리를 전전하던 조훈현은

한국식당에 들어가 설거지든 뭐든 할테니 받아달라며 부탁을 해


그렇게 접시닦이로 2주일 간 식당에서 일을 하던 조훈현은

주위 바둑계 인사들이 세고에 9단을 거듭 찾아가 조훈현의 입장을 대변해주며

내기바둑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결국 세고에 스승은 의지를 꺾고 조훈현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여


그 내기바둑 6판으로 큰 교훈을 얻게 된

조훈현은 살면서 다시는 내기바둑을 두지 않았다고 해

그 이후로 조훈현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일본 바둑계의 신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지


하지만 스승 세고에 9단에겐 근심이 있었어

그건 조훈현의 군대문제였지

일본과 달리 징병제였던 한국의 사정상

조훈현의 입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어

물론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막 실력이 만개하고 있는 제자를

3년씩이나 군대에 보내는 것은

제자의 실력을 썩힐 수 있다는 걱정때문이었지

스승 세고에 9단은 입대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결과는 헛수고였고 결국 1972년 군입대 문제로

조훈현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세고에 9단은 이때문에 식욕까지 잃고 몸저 눕게 돼

얼마나 조훈현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결국 조훈현의 입대 후 4개월 만에 스승 세고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두가지를 당부하는데

첫번째는 늙은 몸으로 더이상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아 떠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어...


그리고 위에서 말했다시피

조훈현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고 밝혔지


세고에 9단의 정확한 자살 원인은 오직 본인만이 알겠지만

애제자의 군입대와 그의 진정한 성공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








자 여기까지가 1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