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최악의 학살사건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한국전쟁 중 발생한 사건인
303고지(자고산)학살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합니다.
발생날짜 1950년 8월 17일 오후
위치 낙동강 전선의 왜관 북방303고지
해당부대 미육군 제5기갑여단H중대 박격포소대
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일으킨 미군에 대한 학살사건입니다.
많은사람들이 생각하는 학살사건하면
거창양민,노근리 등 미군에 의한 학살이
주라면 이번 사건은 좀 다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것은
고의적인 학살이라는 것입니다.
미군은 303고지를 점령하고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오는것을
대비하기 위해 증원요청 하였습니다.
미군은 증원요청을 받아들이며 303고지에
한국군(60명)을 보내준다고 하였고,
부대는 한국군 증원병을 기달리는 와중
산아래 과수원에서 한국인들 올라오길래
당연히 한국군인줄 알았는데
정신차려 보니 이미 북한군이
포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소대장은 총 한번 사용하지 않고
북한군에 투항하였고
북한군은 이들을 데리고
다시금 낙동강을 건너 북한군 지역으로
복귀를 시도하였지만 낙동강에 있던
미군의 격렬한 반격에 실패하였고.
북한군은 미군의 소지품을 다 빼앗고 굶긴체 이틀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고,결국 낙동강을 넘지못한
북한군은 미군의 탈출을 대비하기 위해
미군이 신던 군화를 벗게 하고 그 끈을 이용하여
미군포로들의 손을 묶었습니다.
(당시 반항하던 미군 2명 사살)
북한군은 고지에서 포로들을 데리고 내려가
20명 씩 두 패로 나누어 길 양쪽의
도랑에 앉혔습니다.
그뒤 미군에게 학살을 시행하였습니다.
▲학살이후 군종목사의 기도
당시 천운을 가진 세명(맨링,로이데이,제임스 러드)는
전우들의 시체 아래로 기어들어가
목숨을 부지했으나 이미 몸이나 팔에는
총상을 입은뒤였습니다.
총성이 멈추고 학살이 끝났다고 생각한 몇 초 뒤
북한군은 미군포로 에 대해서 확인사살을
실시 당시 부상을 입은 일병 맨링은
총상을 입었지만 신음소리 한번내지 않고
꾹참았다고 합니다.
학살뒤 북한군은 유유히 낙동강을 넘어
북한군 본진에 합류하였고,
맨링은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다가갔지만 미군은 적군으로
오인사격하였지만 다행히 맨링은
"사격중지 난 미군이다" 라며 외치며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미군은 학살현장에서 시체 사이에
중상환자를 발견하여 후송을 하였습니다.
총 네명의 미군병사들이 살아남아
이 학살에 대해 미군에 전했고,
이후 화가난 미군 대대장은 맨링에게
북한군 포로중 이 학살의 주범을
찾아낼것을 지시하여
결국 북한군 105전차사단
206연대 김 광택(장교),전병덕(사병)을
찾아내었고,
이 북한군 두명은 부산으로
이송 하지만 그들의 행방을
잘 알수가 없다고 합니다.
▲ 라이프지에 실린 학살이후 맨링 이병
시간이 흘러 1999년 캠프캐롤에서는
학살중 살아남은 프레딕 라이언,로이 맨링을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 하였고
라이언 씨는
“그때 입은 총상으로 아직까지 고통에 시달리지만,
이 나라 자유수호에 보탬이 됐다는
사실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하며
“평생 잊고자 노력했지만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2013년 303고지에서 학살당한
미군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는
캠프캐롤 6병기 대대장
한국전쟁에 있어서 최악의
여름이였단 1950년 8월
이들이 낙동강 방어를 위해 먼 미국에서
한국으로 참전해 학살당한
미군에게 조의를 표하며...
▼관련 추천글링크▼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밀리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인한 지옥도가 펼쳐졌던 이오지마(유황도) 전투 (0) | 2016.09.07 |
---|---|
한국전쟁에 영예로운 죽음 영국군의 "해피밸리"전투 (0) | 2016.09.06 |
남자들의 취향저격 전쟁영화 TOP40 (0) | 2016.09.05 |
없을줄 알았던 북한군의 전투식량 (0) | 2016.09.05 |
세기 영웅들의 전쟁에 관한 어록들 (0) | 2016.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