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했던 월남전 최악의 시가전 '후에 전투'
안녕하세요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이였던
월남전 전쟁중 가장 처참했던
최악의 시가전 '후에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1968년 1월 30일 베트남 인민해방군(월맹군)과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합작한
베트남의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을
테트 공세(구정대공세)가 남 베트남 전역
41개의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동양의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이 구정(설날)은
가장 큰 명절이었고, 1967년까지만 하더라도
북베트남(월맹)과 남베트남(자유월남)은 이시기에
일시적으로 휴전에 들어갔었습니다.
하지만 월맹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베트콩과 합작하여
자유 월남을 점령하기 위해
테트 공세를 일으켰습니다.
▲베트콩이 미 대사관 경비들을 살해하고
대사관을 점령하여 죽은 미군 경비들 옆으로
헌병들이 대기하고있는 모습.
▲미 대사관을 테러하고 체포된
마지막 베트콩
▲테트공세의 상징이자 사진기자
애디 애덤스가 퓰리처상을 받은사진
자유월남 응우옌 응록 루안 사이공 경찰 서장이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반전 여론을
들끓게 하였지만 실상은 자유월남의 지식인을
살해한 베트콩의 소대장을 처형하는모습입니다.
1967년 말 월맹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남베트남
지원군 사령부(MACV)는 대부분의 전투부대를
전방인 캄보디아,베트남 비무장 지대에 배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후방 도시 방어는 자유 월남군에게 맡기고
전방에서의 전투에 집중하던 MACV는 자유월남군
전투 능력을 믿지 않았기에 몇몇대대를
후방으로 재배치하였습니다.
암묵적인 휴전기간에 철저한 방어준비를
한 군대는 아이러니 하게도 주월 파병 한국군이었고
그 결과 테트 공세중 5만명의 한국군은 단 하루만에
월맹의 공격을 격퇴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월남전 최강의 군대 한국군
베트남 중부에 있으며, 응 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는 도시 중심에 흐르는 흐엉강을 기준으로
북쪽 구시가지와 남쪽 신시가지로 구성된
마치 대한민국의 서울과같은 도시였습니다.
▲따이 럭 비행장
북쪽에는 후에 성과 그 안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 월남군 제 1사단 사령부, 미공군 제20전술
항공지원대대와 미육군 제 220항공중대
월남 제219비행대대가 주둔하고있는
따이 럭 비행장이 있었고 남쪽에는
베트남 지원군 사령부(MACV)가 있었습니다.
▲MACV 사령부
1968년 1월 31일 새벽 2시30분 공격개시를
알리는 조명탄이 하늘로 치솟으자
월맹군 제6연대 소속 2개대대가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공격 개시전 자유월남군으로 변장한 4명의
월맹군병사가 후에 성의 서쪽 검문소의
경비들을 제거하고 대기하다가 조명탄이
터지자 문을 개방하였습니다
월맹군 제800대대와 제802대대 병사들은
강하게 자유월남군을 밀어 부쳤습니다.
제800대대는 따이 럭 비행장을 공격하여
방어하던 제사단 제1보급중대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제802대대는 자유월남 제1사단 사령부가있는
망카를 공격하였습니다.
제1사단 오 광 쯔엉 장군은 제1보급중대에게
사단사령부방어를 지원하도록 명령했었지만
헛 수고였습니다.
▲후에 성 북쪽의 상황지도
아침 8시가 되자 월맹의 깃발이 후에 성
꼭대기에 걸렸습니다.
유서깊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후에성이
월맹의 손에 넘어가자 MACV와 자유월남군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후에 북쪽 14km 지점에 주둔하고있던 자유월남
제1사단제3연대 제3중대와 제1공수사단 제7대대가
후에의 북쪽을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고
후에 신시가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3연대 나머지
병력들은 후헤 성을 공격하다가 역으로
공격을 당해 대패하였고 판 후치 자유월남중령이
지휘하는 제7기병대대가 미 해병대의 지원을
약속받고 3대의 M-24 채피 경전차로 안 쿠 다리를
건너 후에 성을 공격하다가 그가 탄 전차가
RPG-2로켓에 공격당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제7기병대대는 퇴각하였습니다.
▲부상자들을 옮기는 자유월남군
자유 월남군의 무능을 지켜본 MACV는
후에 남쪽 16km 지점 푸 베이 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5해병 연대소속 3개 해병대대를
후에로 투입시키게됩니다.
연대장 스탠리 S. 휴즈대령은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으로 해군십자장과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사실 푸 베이 기지도 같은 날 월맹군과
베트콩의 연합공격을 받았었지만 미 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의 공세를 꺾었습니다.
여유가 생긴 미 해병대는 1월 31일 오전 10시
제5해병연대 2대대 소속 G중대를 오후4시에는
F중대를 격전이 벌어지는 후에로 트럭을
이용하여 수송하였습니다.
▲ 후에 전투에 투입되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가 후에의 남부에 도착하였을때
도시에 숨어있던 베트콩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북쪽에서 날아오는 박격포 그리고
길에 깔려있는 부비트랩들로 건물 하나하나를
제압해가며 전진하였습니다.
오후 3시 미 해병대가 포위되어 공격받고 있는
MACV사령부에 도착하자 월맹군은 북쪽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시가전 중 M-48전차뒤에 엄폐하는
미 해병대
미 해병대 가블중령은 자유월남 제1사단 군사고문관
조지 O.에킨스 미 육군 대령을 만나
후에의 정보를 얻었고 A중대를 사령부 방어에
▲후에에서 전차와 진격하는 미 해병대
남겨두고 제 3전차대대가 보낸 M-48패튼 전차를
앞세워 북쪽으로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흐엉 강을 건너 북쪽 구시가지를
공격하려던 미 해병대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M-48패튼 전차들이 강에 놓여져있는 다리를
건너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웠습니다.
결국 자유월남군 소속 M-24채피 경전차들을
앞세워 미 해병대는 진격했습니다
M-48전차들은 화력지원으로 아군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매복해있던 월맹군의 기관총공격과
박격포 공격에 전차가 파괴되고
베트콩 저격수들의 조준 사격에 미 해병대원들이
쓰러져 나가자 미 해병대는 퇴각을 해서 전열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쓰러진 해병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버려진
차량들을 급하게 구급차로 개조하여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미 해병대 제1대대 작전장교 월터 M.머피 소령은
부상자들을 구찰하다가 자신도 부상을 당하였고
결국 과다출혈로 전사하였습니다.
▲부상을 입은 전우를 치료하는
미 해병대 의무병
오후 8시 푸 베이 기지의 상황을 정리한
미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 주력병력이
UH-1 휴이 헬기로 후에로 도착했고
미해군 LCU상륙정들이 보급을 위해
후에 남쪽에 도착하였습니다.
UH-1 헬기들은 MACV 사령부 착륙장을 이용하여
부상자들은 푸 베이 기지로 옮겼고 증원병력은
후에로 옮겼습니다.
1968년 2월 1일 오전 7시 미 해병대는 감옥과
투아틴엔후에 도청을 탈환하기 위해
M-48전차를 앞세워 전진했습니다.
▲M-48전차뒤에 엄폐하는 미 해병대
하지만 베트콩 저격수들의 조준사격에
해병대 대원들이 또 쓰러져갔고 57mm 무반동포
공격에 M-48전차가 격파되었습니다.
결국 공격은 취소가 되었고 미 해병대는
MACV사령부로 퇴각하게되었습니다.
반면 북쪽에서는 자유월남군 제1사단제3연대와
제1공수사단제2대대와 제7대대가
따이 럭 비행장을 탈환하여 제1보급중대의
잔존병력을 구출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는 제1사단 사령부 망 카를
탈환하였습니다.
자유월남 제2연대는 미 해병대의 헬기지원으로
북쪽에 착륙하여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착륙지점이 월맹군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무력화 되어 철수하였습니다.
2월1일 오후3시 해병대의 새로운 증원병력이
도착하였습니다.
미 해병대는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여 베트콩이
점령하고있던 MACV 통신건물을 되찾습니다.
북쪽의 DMZ와 케산기지를 연결하는 통신망이
재가동되었고 고립되어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던
미 육군제337통신중대까지 구출하게됩니다.
▲엄폐하며 뒤에서 대기하는 해병대원들
오후 10시 후에 전투지원명령을 받은 미 육군
제1기병사단 제3여단 병력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제3연단은 도착과 동시에 남쪽에 있는 적의
보급선을 끊고 베트콩을 섬멸했습니다.
2월 2일 정오 제12기병연대 제2대대는
후에 북쪽에 착륙하여 월맹군의 보급차단과
섬멸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UH-1헬기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월맹군을
공격하였지만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벌여서 인명손실이 컷습니다.
▲남쪽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 해병대와 전우들의 시체
반면 남쪽의 해병대는 치열한 시가전으로
진격속도가 느렸습니다.
후에 대학교에서 버티고있는 베트콩과 3시간이
넘게 전투를 벌였는데 지난 밤 미 해병대
몰래 강을 건너온 월맹군이 전투를
돕고있기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전 11시에 미 해병대제2대대 H중대가
흐엉 강을 건너 공격을하였습니다.
지원화력으로 M2중기관총을 4정 합쳐서 만든
M45 고기분쇄기와 6문의 106mm무반동포를
탑재한 M50온토스가 불을 뿜자 월맹군은
갈려나갔습니다.
월맹군이 75mm 무반동포로 M50온토스를
격파했을때 이미 150명의
월맹군이 죽은뒤였습니다.
▲M50 온토스는 작은크기에 강력한
화력으로 M-48전차보다 인기가많았습니다.
미 해병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후에의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시가전,근접전 경험이 거의 없는 미 해병대와
미 육군은 인명손실이 계속되자 도시 전체를
미 공군의 폭격으로 날려버릴 생각도 했지만
역사적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것은 범죄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MACV가 선택한 방법은 일대일로 적을
상대하여 도시를 탈환한다는 계획이었고
지지부진한 진격으로 시가전은 한달이나
계속되게 됩니다..
▲M60기관총을 사격하는 미 해병대
남쪽에서는 미 해병대가 주력인 MACV가
북쪽에서는 자유 월남군 제1사단이 협공해오자
수세에 몰린 후에의 월맹군은 시민 4,856명을
학살하였습니다.
공무원,지식인은 물론 평범한 시민들까지 눈에
띄는 대로 무차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1968년 2월 24일 해군의
함포 사격과 A-4스카이호크 공격기의
근접지원으로 후에 성은 자유 월남군
제1사단이 탈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투의 주력은 MACV였습니다.
▲후에 성을 공격하는 미 해병대
한달간의 전투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MCAV 216명 전사 1,584명 부상
자유월남 452명전사 2,121명 부상
월맹군과 베트콩은 8,113명 전사
98명 포로였습니다.
▲전사한 전우의 인식표를거두는 병사
유서깊은 역사적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길거리에는 시민들의 시체가 널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MCAV의 전략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시를 지키는 것은 손해가 크니 적이 이용할 것
같은곳, 은신하고 있을곳은 파괴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우고가는 미군 병사
▲ 네이팜공격으로 화상입은 베트남소녀
이후 미군의 무차별적인 마을 파괴로 민심은
더욱 나빠져갔고 전략에 실패한 미군은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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