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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누구도 좋아서 하는게 아니오. 이건 의무이지. 국민이 침략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싸워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소.'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아흐마드 샤 마수드(페르시아어:احمد شاه مسعود)는 판지시르의 사자, 아프가니스탄의 국가 영웅, 세계 최강이었던 외세의 압제와 맞서 싸우며 민중의 안생과 조국의 발전을 도모한 리더, 이슬람의 이순신으로 불립니다. 마수드는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세력이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자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게릴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자신들의 꼭두각시 카르말 정권을 출범시키자 마수드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짜게 됩니다. 첫쨰, 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군대 양성 둘쨰, 비정규전의 수행과 그 동안 거점인 판지시르의 적극적 사수 셋째 "전략적 공세"로 마수드의 군대가 북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제압 , 넷째 마수드의 원리를 나라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정권을의 붕괴였습니다.

 

 

1980년, 파키스탄 쪽의 루트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7백여 정의 구식 소총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1천여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마수드는 무자헤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은 마수드의 지도를 거치면서 1984년 5천 명의 강병으로 성장했고, 종전이 된 1989년, 마수드 휘하 무자헤딘의 수는 무려 1만 3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마수드는 적의 주력과 정면에서 맞붙어야 하면서 외부의 지원은 거의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휘하의 무자헤딘을 엄청난 규모로 만들었습니다.


소련군 역시 자신들의 유일한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는 마수드를 최우선 제거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수드와 그 휘하의 무자헤딘에 활약에 화가난 소련이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를 때려잡겠다고 스페츠나츠를 포함하여 만 명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고 폭격기까지 투입해서 대공세를 가한 횟수만 무려 9회였습니다.

 


1983년, 소련은 마수드에게 정전을 제안하였고 마수드는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소련의 속셈은 일단 자신들의 전력을 재정비하고 다른 곳부터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기간을 적절히 사용한 것은 오히려 마수드였습니다. 1983년 7월 마수드는 파완, 라그만, 카피사, 쿠나르, 바다크샨 타카르, 바그란과 쿤드즈를 포함하는 북 아프가니스탄 7개 주의 130명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모았고, 그 곳에서 무자헤딘들의 행동을 확실히 조절하기 위한 군사 협의체인 감독 의회(Shura-ye-nazar)를 창설합니다. 감독 의회를 통해 마수드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로 분열되어 있어서 각자 움직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마수드의 영향력은 본거지인 판지시르를 넘어 타카르, 발한 주까지 뻗어나갔고 카르말 정권은 기겁하며 소련군에게 판지시르에 대한 공격재개를 요청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기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마수드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Tu-16 폭격기를 동원하여 판지시르 계곡에 전략 폭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수드는 이미 카르말 정권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았고 소련군의 폭탄은 5만 명의 거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계곡에 떨어졌습니다.

 


1984년, 소련-공산 아프간 군은 2만 1천여 명이 동원된 7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무자헤딘 5천여 명의 반격에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 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한 데 이어 공산 아프간 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면서 결국 소련측은 1986년 판지시르에 대한 공세를 중단, 1988년 즈음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당시 마수드는 미국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마수드는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이 외세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소련이나 이를 핑계로 무자헤딘에게 무기 지원을 하려는 미국이나 똑같은 외세로 봤기 때문이였습니다.



2001년 9월 9일, 벨기에 여권을 소지한 서방 기자들이 마수드를 취재하러 왔었고 그들을 응대하던 마수드는 기자들로 위장한 알 카에다 소속 자폭테러범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48세였습니다.

 

 

이틀 후 9.11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탈레반에게 요구했으나 자신들의 숙적인 마수드를 제거해준 알 카에다를 탈레반 정권이 내놓지 않았고 결과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슬퍼했습니다.

 

 

 

마수드는 '판지시르의 사자'등의 별명으로 불렸으며 말 그대로 전설이나 다름없는 게릴라 지도자였습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시기에는 타지크족이라는 특성상 미국의 지원을 거의 못 받는 상황에서도 가장 혁혁한 전공을 올렸습니다.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립된 후 마수드는 국가의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기일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가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비탈레반 지역에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