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대연합군 물자지원 계획을 세우게됩니다. 사실 유럽 연합군의 핵이었던 소련과 영국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자금이 부족했고, 거기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군에게 크게 밀렸기 때문에 제대로 싸우기 힘들었습니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무기대여법(랜드리스)으로 연합군의 물량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기대여법으로 많은 득을 본 것은 연합군의 선봉이었던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대전 초반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독일에 비해 훨씬 높은 생산효율과 미국 물자의 보급을 통해 결국 독일을 이기고 베를린을 짓밟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이미 미국 물자의 혜택을 받기 시작한 1942년 1월에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차적으로 독일의 공세를 꺾고 패퇴시켰습니다.

 

 

무기대여법이 체결되고 소련 공군은 경합금 관련 기술이 부족해 방부 처리가 안된 나무로 전투기를 만드는 심각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미국이 지원한 경합금으로 생산한 항공기에 미국산 엔진을 달고 미국이 지원해준 항공유로 사용하였고 미국이 준 무전기로 통신하면서 미국에서 보내준 폭약으로 만든 항공폭탄으로 독일군을 물리치게 됩니다. 게다가 직접 영국제와 미국제 비행기 18,303대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소련 공군이 보유한 모든 항공기의 15%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전차를 비롯한 기갑차량은 12,161대로 소련의 보유량 중 15%를 차지했으며, 야포 및 박격포의 경우에도 96,000문으로 소련의 보유량 중 2%를 차지할 정도로 수량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기관총 131,600정, 포탄 325,784톤 야전용 전화기 422,000개를 지급받았습니다.

 

 

 

또한 소련군은 미국이 준 409,526대의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녔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생산한 모든 트럭 수를 능가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준 철로와 1,860량의 기관차, 11181량의 화차와 객차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이 때문에 전쟁기간 내내 소련제 기관차, 화차, 철도 관련 시설에 대한 생산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국이 준 약 15,000,000켤레 전투화는 소련 육군 장병들이 신고도 남았고, 함께 온 혹한기 대비용 털장화는 소련 장병들의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질이 좋았습니다. 소련군 장병들의 보급에는 미국이 준 스팸 통조림도 있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반에 소련군이 막장 상황에 빠져서 식량 배급이 극도로 부실할 때 장병들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나눠 준 게 허쉬 초콜릿이었다고 합니다.

 



소련은 미국에게 식량 분야도 지원을 받았습니다. 일단 소련은 자급자족이 가능했긴 했지만 개전 초의 대패배로 주요 곡창지역이 독일군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인력부족인 상황에서 남은 농경지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에서 트랙터나 콤바인을 지원해주고 비료까지 투입한 덕분에 간신히 기초적인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통조림 같은 저장물자나 전투식량은 미국제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식량 지원은 4,281,910톤으로 소련이 필요한 식량의 25%를 담당했습니다. 이 25%가 무시할수 없는게 전쟁중 군인은 평시보다 훨신 많은 열량을 소모 하니 군인에게 들어가는 식량을 줄일수 없으니 25%가 없었으면 민간인 아사자가 무시무시하게 나왔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무기대여법은 식량과 기초적인 원자재, 통신과 철도, 지프 등으로 대표되는 수송장비를 소련에 대량공급하여 독소전 초반에 공업력의 75%, 식량 생산량의 50% 이상을 잃어버린 소련이 빠르게 회복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펼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만약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소련이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완전히 짓밟고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세우며 전쟁에서 완벽히 이기는 것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제 무기들은 소련제보다 전반적으로 품질관리가 잘 되어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습니다. 더욱이 소련은 독소전쟁 초기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상실하여 식량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식량 위주로 이루어지던 초기 무기대여법 물자마저도 소련이 견디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덕분에 이 시기를 거친 러시아인들 대부분은 영어를 읽을 줄 안다고 합니다. 미국이 러시아에 물자를 퍼주면서 포장 박스, 사용설명 매뉴얼까지는 러시아어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받은 엄청난 물자를 뭔지 구별하기 위해, 때로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기대여법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소련이지만, 최대로 받은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소련의 3배에 달하는 무기대여법 물품을 받았습니다. 무기대여법 전체 추산 액수인 약 500억 달러 중 영국은 313억 달러(전체 액수의 60%) 가량을 받았습니다. 소련은 109억 달러(21%) 가량이었습니다.


일단, 영국 육군의 경우 사실상 전차의 주력이 M4 셔먼으로 통일되다시피 했으며 영국 해군도 개전 당시 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 3개 전선에서 활동하느라 전력이 분산되어 함선 수가 부족한데 대서양 전투로 유보트의 위협까지 받자 미국에게 구식 구축함 50척을 지원해달라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척의 호위항공모함 및 호위구축함을 지원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미국 없었으면 개전 당시의 해군 규모를 유지하기도 곤란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함선 지원의 대가로서 영국은 카리브 해 지역의 주요 해군 기지들을, 곧 카리브 해 제해권을 완전히 미국에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린탓에 소련이 110억 달러, 영국이 330억 달러 어치의 물자를 받는 동안 10억 달러도 못 받는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선이었고 영국과 소련을 지원하기도 바쁜데 중국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의 주요 해안을 장악하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한 이후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루트가, 영국령 버마가 일본에 함락당한 이후로 버마 루트까지 끊기면서 물자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추축국 중심인 독일 역시 미국의 무기대여법과 비슷하게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원유 30% 이상을 루마니아에서 받았으며, 자잘한 전차부품의 최소 30% 이상을 헝가리로부터 공급받았고, 강철과 같은 물품들의 1/3을 노르웨이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려지지 못한 얘기지만 독일은 동계장비를 절대적으로 핀란드에서 공급받았습니다. 독일은 전쟁 내내 핀란드에서 동계 장비를 공급받았으며, 이탈리아군에 대한 세간의 저평가와 달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죽어라 노력해준 덕분에 독일이 겨우 보급을 유지하는게 가능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들에게 보급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미국의 무기대여법은 무상 지원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부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그 기간 동안 손실되지 않은 지원품은 미국에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물자가 부족한 국가들은 상당량의 지원품을 계속 쓰길 원했고 또 미국은 전쟁 중에 만들어졌지만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미국에 남은 상당량의 보급품을 처분해야 됐습니다. 미국은 이것들은 10분의 1 가격으로 연합국에 넘겼는데, 엄연히 대가가 달린 만큼 여력이 있는 국가는 전부 갚아야 했고 실제로 미국은 전쟁 끝나고 나서 덜 받더라도 다 받아냈습니다. 보통 이자율 2%에 50년 상환 기환을 주었기 때문에, 미국에게도 상당한 이익이 되는 일이였습니다.

 


사실상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이 미국의 채무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독일이 더 오래 저항하거나 미국에 선전포고 안 했으면 그만큼 빚이 더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기대여법은

미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당시 대공황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 경제가 이런 잉여 생산품을 모조리 외국에 처분하게 되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1950년대 미국의 활황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뒤바뀔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독일은 생산력 자체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에 비해서는 밀릴 것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미국이 말도 안되는 생산력을 갖춘것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