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0년 6월 25일에 한반도 북쪽에 있는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 많은분들이 우리 한국군이 멋지게 승리하였던 춘천지구방어전투, 용문산전투, 서울수복전투 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었던 만큼 우리군도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패배한 전투가 많았습니다. 비록 전투는 패배하였지만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그분들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한국군의 7대 패전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전쟁초기

6월25일 개전부터 한강교가 폭파될때까지 한강이북지역에 투입된 한국군 부대는 1사단,2사단,7사단,3사단22연대 수도경비사령부등 총 4개사단의 병력이었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된후 퇴로가 막힌 이들은 모든 중장비와 차량, 개인화기들을 버리고 분산철수를 했는데 전쟁전 98.000명이던 한국군 총병력이 개전후 4일만에 22,000명수준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초산,온정리전투

1950년 10월 23일 초산에 진격한 한국군 6사단 7연대와 온정리로 진출한 2연대는 처음으로 치룬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각각 분산철수하였습니다. 2개연대 병력중 총 75%의 병력손실을 입었고,7연대장교중 부연대장(최영수 중령),2대대장(김종수 중령),3대대장(조한섭 소령)이 포로가 돼고,12명의 중대장 중 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덕천,영원전투

1950년 11월26일 중국군의 공세에 한국군 2군단소속인 덕천의 7사단과 영원의 8사단이 분산철수하였습니다. 이때 3명의 연대장 (박승일,고근흥대령,김영로중령)이 포로가 되고, 한연대장(박광혁 중령)은 전사하였습니다. 이때 사단의 거의 모든 중화기와 차량을 손실당하고 미 8군의 동측방이 노출됨으로써 모든 작전이 망쳐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횡성전투

전투라기 보단 학살에 가까웠던 비극입니다.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8사단이 중공군 3차 공세에서 중공군 13병단에게 포위되어 분산철수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105미리곡사포 14문, 차량 68대, 통신장비 249대, 박격포 87문, 로켓포 137문, 기관총 164정, 칼빈소총 2,389정, M-1소총 4,096정의 장비손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된 장교 323명중 10연대장(권순태 중령)과 참모전원, 16연대 부연대장,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사단전체의 인명손실 7,142명으로 피해로 거의 궤멸당했습니다.

 

   사창리 전투

19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공세시 가평북방의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한국군 6사단이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3일 동안 방어전투를 펼쳤지만 역부족이였습니다. 이후 분산철수 중 소총 2,263정,자동화기 168정,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고, 6사단을 화력지원하던 미 지원포병도 105미리 곡사포 15문,4.2인치 박격포 13문, 242대의 무전기 차량 73대 손실을 입었습니다.

 

   현리 전투

현리전투는 한국전쟁 최악의 대참사라고도 불립니다. 1951년 5월 16일 중국군의 5월공세시 현리지역에서 포위된 한국군 3군단소속 3사단과 9사단은 하진부리 방면으로 분산철수하였으며 두 사단이 보유한 모든 중화기와 차량,보급품을 상실하였습니다. 당시 피해가 군단 자체가 해체될 정도였기때문에 6.25 전쟁기 가장 참담한 패전 중 하나로 뽑히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비류수 전투, 임진왜란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 병자호란 쌍령 전투와 더불어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꼽기도 합니다.

 

   

   금성전투

한국군중공군금성 돌출부를 놓고 격전을 벌인 6.25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입니다. 1953년 7월 13일 중국군의 마지막 대공세에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한국군 수도사단,6사단,3사단,8사단,5사단 장병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병력손실은 모두 합쳐 20,000명이상의 전사자/포로가 발생했으며, 특히 수도사단 1연대는 연대 지휘소가 피습 작전지도차 나온 부사단장(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지원나온 기갑연대장(육근수 대령)이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당초의 전선보다 4km 뒤로 밀려났으며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비롯한 고지를 잃었습니다. 결국 당시 전투로 잃은 영토만 192.6 평방 킬로미터에 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