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미국인이다 제100보병대대
안녕하세요
1941년 미국에는 약15만명의 일본계
시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세대 이민자 이세이, 2세대 이민자 니세이
3세대 이민자 산세이로 불리었고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소규모 음식점을 하거나
무술 도장을 열거나, 생선을 잡거나, 농사를 짓거나
세탁소를 하면서 미국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갔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본이 아닌
미국의 시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진주만 공습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감행된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이들의 삶은 고달퍼 졌습니다.
1942년 2월 19일 미국내 일본인들이 폭동 혹은
폭탄 테러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미국 정부는
행정명령 9066을 실행했습니다.
▲행정명령9066 공고
미 연방수사국 FBI와 각주의 경찰, 주방위군이
동원되어 미국내의 모든 일본인들을 군부대와
수용소로 보냈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때까지
수용하였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추방되는 일본계와 악수하는 그의 이웃
▲전국에 배치된 수용소와 군부대
▲황량한 수용소
▲수용소에 살아가는 일본계 시민들 한편 하와이주 인구의 40%가 일본계였기에
미국 정부는 2,900명의 일본계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하와이 주방위군으로 편입시켰습니다.
훈련을 위해 수송선을 이용하여 위스콘신
주 캠프 맥코이와 미시시피 주 캠프 쉘비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혹독한 체력훈련과 사격술,
전술훈련등이었습니다.
▲캠프 맥코이에서 훈련을 시작한 일본계 미국인들 장교와 교관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그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잽스(Japs)들의 충성심과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5개 중대로 나뉘어서 훈련을 끝낸 이들에게 부여된 부대 번호는 제5보병연대 제100보병대대 였고 일본계 병사들은 1-푸카-푸카(하와이어로 구멍)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을 담당하는 제85사단장 웨이드 헤이슬립 소장은 솔직히 일본계 병사들이 마음에 들지않았습니다. 전쟁에 나가면 배신을 때리고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훈련에 임하고, 높은 충성심을 보이자 생각이 달라졌고, 그들을 유럽 전선에 파견해야한다고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결국 1943년 7월 20일 일본계 미국인 부대는
제442보병연대 전투단 제100보병대대로
정식 출범하였고 1943년 9월 2일
미육군 제8군 제34보병사단 제133보병연대로
배속이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출범한 제100보병대대 가운데 글씨는 진주만을 기억하라 북아프리카 오랑항에 도착한 그들은 미군들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지나가면 미군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잽스가 왔다라고 놀리거나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계 병사들은 개의치 않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충성을 증명할 전투를 기다리며 참고 또 참았습니다. 몇몇 병사들은 일본군이 항복했다고 생각하거나 중화민국군이 참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43년 9월 22일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제100보병대대는 9월 28일 몬테 코비노에서 나치 독일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9월 29일 타카다 시에고 병장이 최초로 전사한 일본계 미국인이 되었습니다. 부상당한 상태에서도 적의 기관총좌를 파괴한 그에게 퍼플 하트와 수훈 십자 훈장이 수여됩니다.
▲마크 클라쿠 제 5군 사령관 다시 북쪽으로 진격한 제100보병대대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 철도 중심지 베네벤토 마을을 공격합니다. 성공적으로 마을을 점령한뒤 제34보병사단 사단장 라이더 소장은 사단 마크와 장식을 정식으로 수여했고, 제100보병대대는 제34보병사단의 정식 일원이 되었습니다.
▲마을을 함락시키고 들어가는 제100대대 1943년 10월 제100보병대대는 3번의
공격 끝에 볼투르노강 북쪽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1944년 1월 악명 높은
몬테 카시노를 공격하였습니다.
▲짧은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
해발 520m, 라피도 강과 릴리 강이 둘러쌓고 있는
천연의 요새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
독일 공수 부대 제1공수 사단이 버티고 있는
몬테 카시노, 그곳에서의 험난한 전투로
제100보병대대가 퍼플 하트 대대로 불리게 됩니다.
몬테 카시노의 험준한 산을 오르며 독일 공수 부대와
싸운 B중대는 187명 중 14명만이 살아남았으며,
C중대는 170명 중 23명이 살아남았습니다.
1944년 2월 8일 1개 소대가 몬테 카시노의 정상을
3일간 점령했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퇴각해야만 했고, 14명 중 3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막대한 손실에 3개 중대는 전투 불능이었지만
퇴각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대대장 터너 중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산 미첼로 퇴각했습니다.
▲격렬한 전투로 의무소는 가득찼습니다. 몬테 카시노 전투가 끝나는 1944년 5월 23일까지
1,300명의 대대원 중 521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제100보병대대는 대통령
부대 표창과 우수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습니다.
막대한 인명 손실 덕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되었어야할 제442연대의 병력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몬테 카시노를 점령하고 찍은 사진 한편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 대위가 이끄는
소규모의 정보 수집팀은 안지오 전투에 파견되어
독일군으로 부터 정보를 수집하였고,
이러한 공로로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습니다.
▲은성무공 훈장을 받는 김영옥 대위 1944년 6월3일 북쪽으로 진격한 제100보병대대는 라누비오 근처 435고지의 독일군을 섬멸하고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로마를 10Km 앞두고 최초로 로마에 입성한 연합군 부대가 될 수 있었지만, 로마 북쪽에 있는 도시 치비타베키아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제100보병대대는 크게 실망합니다. 한 장교는 "일본계 미국인 부대라 로마를 점령하는 영광을 누릴 수 없다. 이거냐?" 라고 툴툴되었습니다. 하여간 제100보병대대는 6월 11일 치비타베키아를 점령하였고, 제442보병 전투단 제1대대로 편입되었습니다. 10일간의 휴식을 마치고 제1대대는 다시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나치깃발을 노획한 병사들 1944년 6월 22일 벨베데레를 점령하고, 7월 7일 카스텔리나 마르테마 지역의 140고지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전투를 리틀 카시노라고 부르게 됩니다. 제1대대는 140고지를 탈환하려는 독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1944년 9월 9일 미육군 제7군에 편입되어 프랑스 마르세유로 향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에 성공한 오버로드작전으로 프랑스 북쪽의 교두보가 완성되자 프랑스 남쪽에 상륙하여 프랑스의 독일군을 섬멸하기 위한 연합군의 계획때문이었습니다. 1944년 10월 14일부터 10월 24일까지 제1대대는
부르에와 피퐁텐느에서 무장 SS 제9경찰연대,
제192기갑척탄병 연대, 제732척탄병연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집중 공격을 받은 D중대는
190명의 병사 중 15명만이 살아 남게됩니다.
▲구출작전을 펼치는 제1대대
▲프랑스에서 행군하는 제1대대
극심한 피해를 입은 제1대대는 휴식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죽어가는
제142연대 제1대대 구출작전을 벌입니다.
몰려오는 독일 전차와 독일군을 막아내고
제1대대를 구출하지만 1,400명 중
280명이 전사했습니다.
▲제1대대 구출작전 그후 프랑스 리베이라에서 병력을 증원하고 휴식을 취한 제1대대는 1945년 3월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합니다. 나치 독일의 이탈리아 최후의 방어선
고딕라인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제1대대는 험준한 조지아 힐과
플로리다 힐, 오하이오 힐등을 차례로
함락시켰고, 4월 17일 독일군은
아울라로 퇴각하게 됩니다.
▲고딕라인을 포격하는 제442연대 병사들
▲독일군 포로를 인솔하는 제1대대병사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공세를 재개하려는 찰나인 5월 2일 이탈리아 전선의 교전이 종료됩니다. 그리고 5월 8일 나치 독일이 종말을 맞이하자 제1대대는 미국으로 돌아가게됩니다.
1946년 7월 15일 워싱턴 D.C의 전승 행사에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이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전승행사에 당당히 전진하는 대대원들 "고향으로 돌아온 여러분은 지금까지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적과의 전투뿐만이 아니라, 편견과 차별과도 싸워 당당히 승리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으로써, 미합중국의 시민으로써 의무를 충실히 해낸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대를 방문한 해리S.트루먼 대통령 그후 제1대대는 제100독립보병대대로
전환되어 하와이 주방위군 소속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와이로 복귀하여 환영받는 병사들 전쟁 후 한 기자가 제100보병대대 참전 유공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미국 시민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싸움을 피하거나, 적게 죽었다면, 잽스들이 그럼그렇지라며 우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멈추지 않았겠죠. 우리가 가족들과 이민 사회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싸우다 죽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우리도 미국인이다를 외치며 싸워온
제100보병대대의 일본계 미군인들에게
찬사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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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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