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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던 한국전쟁은 사실 핵무기만 제한되었을뿐 제3차 세계대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던 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이 중요군사 장비를 대한민국에 넘기지 않고 철수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럼 한국전쟁 발발 원인부터 우리나라 국군이 참패한 이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전쟁 발발원인

 

 

 제주4.3사건

 

1948년 4월 3일 통일된 조국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던 남로당 제주도 지부의 남로당원 김달삼 외 320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와 우익을 기습 공격하여 고일수 순경 외 수많은 경찰과 우익을 살해하여 제주4.3폭동이 발생하였습니 후에는 무장 폭도들이 3,000명으로 증가하여 1년 넘게 남로당 폭도들을 진압군이 잔압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어나 행방불명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여수.순천 사건

 

여수에 있는 14연대에 "제주도 폭도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14연대 안의 남로당(조선공산당)원 지창수 상사 외 40여 명이 이 명령을 거역하고 10월19일 김일영 대대장 외 우익장교 20여명과 반란을 거부하는 사병 40여 명을 사살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0월 20일 여수읍의 주요 공공 건물과 요소요소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서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렸습니다. 평양방송에서는 이미 20일 아침 6시에 제 1보로 반란의 진전 사항을 수시로 보도하며 여수·순천 지역의 좌익세력을 격려하고 남조선의 모든 애국적 인민과 국방군 장병은 여기에 호응 봉기하라고 선동했습니다. 같은날자 ‘로동신문’,‘민주조선’등에서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이들은 여수, 순천, 별교, 광양을 점령하고 구례에서 진압군 12연대 1개 대대를 격파하고 포위된 12연대장이 자살할 정도로 좌익 반란군은 막강하였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으로 시작으로 국군의 연속 반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진압군에게 생포된 반란군

 

광주의 4연대 나주 파견부대인 김남근 중대의 김남근은 2대대장을 총으로 사살하고 중대원을 반란군으로 만들어 장성으로 도망쳤다가 부연대장이 2대대를 인솔하여 김남근 반란군을 전원 체포하였습니다. 결국 광주 4연대와 여수 14연대는 해체되었습니다.

 

 

 춘천 8연대 2개 대대의 월북

 

춘천의 8연대 1대대장 남로당원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부하 368명을 완전무장 시킨 후 38선에서 야간훈련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월북하여 평양에서 시가행진을 하였습니다.

 

 

강태무는 월북한 후 인민군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으며 종전 직후에는 28세로 소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박헌영의 선동

 

남로당 대표 박헌영은 이상의 사건을 유발시키면서 "남한에서 남로당원들이 죽으면서 투쟁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며 김일성을 설득하였습니다

 

1948년 김일성과 박헌영

 

박헌영은 계속해서 "인민군이 38선만 넘으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봉기하여 남한은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선동하였고 김일성은 무기는 소련에서 인력은 중공에서 지원받아 1950년 6월 25일 240대의 전차와 11만 대병으로 남침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패배 원인

 

 

 국군 전 장병 휴가와 외출

 

북한군 남침 하루 전인 6월24일 12시를 기해 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을 휴가와 외출을 보내게 하여 1/3이상의 병력이 부대에서 빠져나가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하였을 당시 병력이 부족하여 혼성부대로 편성하였지만 육군 전체에 전투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이 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 휴가와 외출을 보내게 한 이유는 장병들이 오래도록 외출을 못해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이였고 외출 시 건빵을 가지고 가는데 경계령으로 장병들의 외출이 없어 건빵이 남아돌아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실탄 부족

 

의정부 국군 7사단과 수도사단에 실탄만 충분히 있었으면 북한군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문산의 국군 1사단, 춘천의 6사단, 강릉의 8사단은 실탄이 충분하였는데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 7사단과 수도사단만 실탄이 부족하여 6월26일 국군 3개 사단이 의정부에서 하루 만에 참패하며 육군이 붕괴되었습니다.

 

한편에선 북한군 전차 때문에 쉽게 밀렸다고 하는데 당시 북한군 전차는 국군이 소지하고 있는 바주카포나 대전차포, 105mm 곡사포로 전차의 바퀴 줄을 공격하여 파괴하였습니다. 그 증거는 홍천의 국군 2연대, 문산의 국군 1사단, 의정부 자일리에서 북한군 전차는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진지 구축 부족

 

문산의 국군 1사단, 춘천의 6사단, 강릉의 8사단은 제 1진지에서 제 3진지까지 있었지만 의정부는 진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특히 축석령은 진지만 구축하였으면 인민군 전차는 절대 이 진지를 돌파하지 못해 국군이 북한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축석령에 진지 구축을 하지 않아 북한군이 쉽게 축석령을 넘어 국군이 참패하였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알수없는 행동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참모총장은 한국전쟁 발발 15일 전 6월 10일 육군의 중화기 및 차량 절반 정도를 수리하라고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려 북한군 남침 시 육군의 발이 묶여 초전 작전에 많은 지장을 주었고 같은 날 연대 급 부대 이동과 전방 3개 사단장의 인사이동과 육군본부 작전국장, 작전차장, 작전과장을 모두 교체하였습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전 국군 3/2 장병들을 6.25전날 휴가와 외출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전날에 밤 10시까지 육군 회관에서 육군본부의 국장, 과장, 실장, 전방사단장등 50여 명을 초대하여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새벽 4시에 북한군이 남침하였으나 육본에서는 오전 9시 30분에 남침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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