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사일 개발에 시작이 된 '제4차중동전쟁'
북한인민군의 제4차 중동전쟁에서의 참전했던 사실을 많은 분들은 모르고 계실겁니다. 아랍나라들은 국토, 경제력, 인구, 병력수, 장비의 질과 양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압도하고 있으며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장비들은 소련제였고 고문단도 소련군 장교들이었습니다.
제1차 중동전쟁 1948년 5월 8일 ,제2차 중동전쟁 1956년 10월 27일 ,제3차 중동전쟁 1967년 6월 5일 ,제4차 중동전쟁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 (파란색)과 아랍 연맹 (녹색과 연두색)-
1차~3차 전쟁에서 아랍 측은 한번도 이기지 못하였고 그 때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공군 공격부대의 전격작전으로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의 영토는 4배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소련군사고문단의 지도에도 불과하고 아랍나라들은 패배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랍국가들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던 이집트는 전쟁결과에 분통을 터뜨렸고 소련군사고문단은 귀국의 길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집트는 다시 싸울 의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북한으로 극비리에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면서 군사고문단과 비행기 조종사들의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였습니다. 북한에게는 기후나 자연 지리적 조건도 다르고 국제환경도 맞지 않는 중동까지 가서 싸운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었고 게다가 이스라엘과 싸울 이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김정일과의 협의를 거쳐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고 그렇게 북한은 약 1천 5백명 정도의 군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쓴 전격작전과 같은 방법을 거꾸로 이용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즉 이집트 공군공격기는 시나이반도를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번 북상했다가 지중해에 나가 바다로부터 저공비행으로 이스라엘에 침입하면 방공망을 손쉽게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조종사가 이끄는 이집트공군 특별부대 수백 기가 1973년 10월 6일 긴급 출격했습니다. 공격부대는 먼저 북상, 지중해로 나와 진로를 바꾸어 저공으로 이스라엘에 침공하여 전격적인 기습을 감행하였는데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기갑부대가 쳐들어가 시나이반도를 석권하고 이스라엘군을 내몰고 승리하였는데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을 이집트 육군 공병이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뚫어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습니다.당시 이스라엘 국방상이었던 외눈 다얀은 조종사들이 한국어를 말한다고 발표했으나 북한은 즉시 이것을 부정했습니다.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4차 중동전쟁을 주도했던 사다트가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을 증인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에 조인 후 이스라엘 베긴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善戰)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나름대로 당당했습니다. 지금도 이집트는 이 전쟁을 자국이 이긴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군이 전투에서는 반격으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으로는 시나이 반도를 획득한 이집트군이 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이후 소련군사고문단의 지휘를 받으면서 세 번이나 패배의 쓴맛을 본 이집트사람들은 북한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시하였으며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북한 군대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소련이 북한에 공여를 거절했던 스커드미사일을 극비리에 평양으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 스커드 미사일은 북한의 "노동 1호" 미사일이나 "대포동미사일" 개발 모체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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