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6ㆍ25전은 끝을 맺지 못한 전쟁입니다.

 

국토는 전쟁 이전처럼 계속 분단된 상태고,

 

 북의 계속되는 도발로 인해 이전보다

 

더 팽팽히 대치중인 상태입니다.

 

정확하게 3년 1개월 2일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6ㆍ25전쟁은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1950년 미군 제7보병사단과 국군17연대의 도보행군 모습>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

 

그런데 3년이 넘는 시간

 

이 전쟁을 분석해 보면 군사적으로

 

가장 극적인 전투가 벌어진 순간은

 

 전쟁 초기 1년간뿐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거의 1년이 되는

 

1951년 5월말의 중공군 제6차 공세 이후부터

 

 휴전까지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전쟁 초기 1년 동안

 

서울의 주인이 무려 4번이나 바뀌었을 만큼

 

남북으로 무려 2,300여 킬로미터를

 

 쉴 새 없이 오르내렸지만, 나머지 2년 동안은

 

겨우 50여 킬로미터 정도를 밀고

 

 당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 한반도에 내려온 중공군은 엄연히

 

교전 대상이었는데 단지 이들을 만주로

 

몰아낸다고 과연 중국이 전쟁을

 

포기할 것인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유엔군 입장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은 정치적 한계였지만,

 

참전을 단행한 중공군 입장에서는

 

 단지 하나의 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치 외교적으로 종전을 이루지 못하는

 

 한, 군사적 공세로 전쟁을

 

마무리 짖지 못할 가능성이 컸고,

 

때문에 군사적으로 우위에 섰음에도

 

 재 북진을 주저한 것입니다.

 

 

 

중국도 미국도 전쟁을 일방의

 

 승리로 끝낼 수 없다고 판단이 서자,

 

 지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짖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전쟁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전선이

 

 형성된 바로 지금, 휴전을 하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었습니다.

 

 결국 회담은 시작되었고, 그러다보니 전쟁의 목표는

 

 휴전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6ㆍ25전쟁 후반기를 상징하는

 

 고지전이 개시된 것입니다.

 

 

 

 

출처: 국가보훈처

 

당시 전선의 중앙인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무명의 395고지는

 

 특히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연일 혈전이 계속되던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에서

 

이 고지가 서남쪽 꼭짓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이 연속하여 하늘과 맞닿은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 국군의 전설이 피로 쓰여 지게 됩니다.

 

 

 

<철의삼각지: 철원,평강,금화(김화)지구를 삼각형으로

 이은 전략적요충지 서울과 그밖의

여러곳을 연결해주는 교통중심지였다>

395고지를 아군이 점령하더라도

 

 북쪽에는 이곳을 내려다보는

 

더 높은 고지들이 많아

 

 크게 유리한 측면은 없었지만, 반대로 적이

 

 이곳을 차지하면 철원~김화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를 모두 적에게 내주고

 

아군은 약 15킬로미터 정도 뒤로 물러나야 하며

 

 중부전선의 주요 통로를

 

차단당하게 되는 위치였습니다.

 

예를 들어 북악산을 적이 차지한다면

 

남산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쳐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395고지에서 남동쪽으로

 바라본 철원평야 일대>

 

1951년 10월 17일을 기하여 미 제3사단과

 

교대한 제9사단이 계속하여

 

395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952년 10월이 되면서

 

 쉽게 타결될 것 같은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전선은

 

상대에게 더욱 압박을 가하기 위해 격화되었고

 

 395고지 일대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395고지를 공격하려 북쪽 효성산에 3개 師(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제 38군이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여타 중공군 부대와

 

달리 이곳에 투입을 목적으로

 

오랫동안 후방에서 훈련받았고 화력도

 

 막강하게 편성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만큼 적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격전은 예견되었습니다.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이라면 화력이었는데,

 

 문제는 피아가 뒤엉켜 싸우는

 

 고지전에서 화력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고지전" 中>

 

당연히 병력이 많은 쪽이 우세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습니다.

 

 때문에 아군은 반드시 고수할

 

고지만 선별적으로 확보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한 손실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395고지는 반드시 사수해야 했고

 

 당연히 피를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승리의 관건은 집결한 적을 향하여

 

 화력을 집중시킬 타이밍이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적들이 역곡천을 고의로

 

 범람시켜 아군의 증원을 차단시킨 후,

 

제30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395고지 일대의

 

 진지에 격렬한 포격을 개시하면서

 

 피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포격 후 연이어 개시한 중공군의 3차례 공격을

 

 아군이 모두 격퇴하였지만 병력을

 

 대폭 증강한 적이 너무 지쳐있던 아군을

 

 

10월 7일 재차 공격하자 고지가 피탈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습니다.


 

<점령된 고지위에 남겨진 적 시신>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제28연대가 즉시 반격에

 

 나서 고지를 탈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아군은 최대한 불필요한 사상을 막고

 

전투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해 순차적으로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군의 희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395고지는 아군과 적들이 흘린 피로 뻘겋게

 

 물들어가면서 양측 모두 인명 피해가

 

 급격히 늘어갔습니다.

 

 



전투 개시 불과 3일이 경과하였을 때,

 

 돌아가며 방어와 탈환에 나섰던

 

제28, 30연대들은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되기 곤란할 만큼

 

출혈이 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적 제113, 114사 또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예비로

 

 아껴두었던 제29연대와 제112사 마저 동원되었고

 

 이들 또한 처절하게 피를 흘려 고지를 적셔갔습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장장 열흘에 걸친

 

전투로 무려 12차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의 임자가 바뀌었습니다.

 

 

<영화"고지전"中>

 

 

 

해발 400미터도 되지 않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이 퍼부었던 포탄만 해도 무려 30만

 

 발 정도로 추정되고 하루 동안에 주인이 서로

 

 뒤바뀐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인내심은 중공군을 압도했고

 

이런 놀라운 9사단의 모습에 중공군은

 

서서히 질려갔습니다.

결국 10월 15일, 9사단의 놀라운 분투에

 

중공군은 백기를 던졌습니다.

 

사실 중공군 38군은 지구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더 이상 투입할 자원도 없었습니다.

 

 고지 주변에서 확인된 중공군 시신만도

 

1만 4,389구였는데 이는 38군의 60퍼센트 정도였고

 

 부상자까지 따진다면 38군이 전투를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참하게 녹아버린 것이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3,146명의 국군이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희생됐습니다.

 

 

 

 

<영화"고지전"中>

 

 하지만 전쟁 내내 국군이 하나의 거점을

 

 사수하기 위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중공군이 더 이상은 피를 부어대는

 

고지전에 매달리지 않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병력을 마구 소모할 줄만 알던

 

중공군도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국군은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면서 작전 주도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95고지는 전투 중 실시된 엄청난 포격으로

 

말미암아 높이가 1미터정도

 

낮아졌을 정도로 황폐화됐는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 하여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되었고 국

 

군 역사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적 1개 군단을 궤멸시킨 제9사단에게는

 

 백마부대라는 영광된 호칭이 부여되었습니다

 

 

한국군 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소비를한 전투입니다..

 

 

 

 

 

한국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자랑하는 중국군의 궁식전사에도 드물정도로

 

한국군의 승리를 인정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백마전투에 백마3군신이라

 

불리우는분들도 기억해주시길바랍니다..

 

제3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 . 요봉규 하사 . 안영권 하사 등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공격정면에서

 

지형상 포병 및 공군 화력으로

 

 도저히 제압할수없는

 

난공불락의 적 특화점에 수류탄 다발을 안고

 

 육탄 돌입하여 파괴함으로써

 

국군이 백마고지를 탈취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마고지 3군신으로

 

 불리우고있는 용사들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그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헌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