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여기쯤에는 조그만 집무실과 내실,

그리고 침대와화장실, 샤워실이 있었습니다.

그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했던 지하벙커를 발견한지 벌써 7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히틀러는 지금까지도 인류 최악의 독재자로 남아있습니다.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히틀러가 사망하고 난 이후에도 아직 히틀러는 살아있다는 소문과 남아메리카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한 일간지에서 실제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지켜본 친위대원의 인터뷰가 실리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 2주일을 지켜본 측근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로쿠스 미슈씨는 1945년 11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에게 히틀러 자살 당시의 순간을 진술하였으며 이때 작성된 문건이 몇 년 전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으나 비밀에 쌓여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미슈씨는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베를린의 예전 히틀러 지하 벙커 자리를 바라보며 설명했습니다.

 

 

"제2차대전의 전 기간을 통해 경호원 겸 전화당번으로 히틀러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SS친위대 장교 출신의 나는 히틀러가 아내 에바 브라운과 권총 자살한 1945년 4월30일까지 마지막 2주를 함께 지냈다. 히틀러는 제3제국의 종말이 다가오자 그의 총통 집무실 아래에 있는 지하 벙커로 내려온 뒤 미슈씨를 포함한 필수요원 몇명만을 남겨놓고 참모들의 대부분을 해산시켰다. "

 

 

당시 미슈씨는 그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히틀러는 4월22일 소수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나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 남은인원 중에 미슈씨는 베를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4월30일까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2월부터 벙커로 은신, 꼼짝도 않고최후를 맞이했다는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며 히틀러는 평소처럼 밖으로 나와 자신의 아파트에도 들렀으며, 공습이 있을 경우 벙커를 찾았으며 벙커 생활은 굉장히 평온했고 히틀러도 침작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최후를 마치기 이틀전 전격 결혼한 애인 에바 브라운도 수주전부터 벙커를 찾았으며, 마지막 2주일은 벙커에서 애인과 줄곧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나치독일의 선전상인 요제프 괴벨스 부부가 6명의 자녀들과 함께 자신의방에서 자살한 것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끔찍한 일을 목격해 지금도 과거의 악몽에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미슈씨에 따르면 히틀러는 연합군측의 무전 도청으로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뒤 4월 28일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에 진격하는 소련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자살을 결심하고 가장 좋은 자살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법을 알게된 히틀러는 청산가리 캡슐로 결정한 뒤 효능을 시험하기 위해 애견인 셰퍼드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운명의 날인 4월30일 "우리는 전쟁에서 졌다. 제군들은 모두 나를 의지해라. 나는 결코 베를린을 떠나지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극단적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히틀러가 자살용으로 마련해 둔 청산가리 캡슐까지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총을 선택하여 숨을 거뒀다고 그는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살하고 이틀후인 1945년 5월 2일 소련군이 베를린의 총통 관저에 들이 닥쳤을 때 미슈씨는 27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련군에 체포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8년을 갇혀있다가 1953년 베를린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는 현지 역사단체가 지하 대피소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기자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이 쏟아지는데도 차분하면서도 비교적 명확하게 답했습니다. 벙커가 있던 자리는 지난 1980년대 당시 동독정부에 의해 자갈 등으로 메워져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벙커는 물론 히틀러의 절친한 건축가 친구인 알베르트 슈페르가 세운 기념비적인 '신제국' 궁전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