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까지 소집해서 치룬 전쟁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는 미 군인의 희생입니다. 미국이 참전한 4대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가운데 비율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은 특히 적지 않은 장군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희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를 비롯하여 미군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한 가운데 무려 3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의 참전 결정
서울이 함락 후인 50년 6월 28일(한국은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안보회의에서 가능한 지상군을 배재하고 해공군 위주의 지원을 맥아더에게 지시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그 정도 지원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가 다음날 새벽인 6월 30일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였습니다. 그러면서 세부적으로 연대 단위의 미국 전투 부대를 긴급 투입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유엔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 국가가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미 해군의 화력
당시 미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모함은 총 15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7척의 공격용 항공모함(CV), 4척의 경항공모함(CVL), 4척의 호위항공모함(CVE)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만 11척이 77기동함대에 배속되어 주로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항공모함을 제외한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대활약하였는데 16인치 함포가 포함된 4백만발의 포탄을 발사 하여 지상군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 해군의 활약에 비해 미 해군이 받은 피해는 4척의 소해함정과 1척의 원양 예인선이 적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게임이었습니다.
미 해군 항공대 소속인 제24항모항공단(CAG)은 정규함공모함 함재되어 해군 예비항공편대 22개를 포함하여 총 100개의 편대가 한국전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이들과 지상기지 해병항공대는 미 공군 출격횟수인 392,139회의 70%에 달하는 275,912회 출격하여 북한-중공군을 항공기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었습니다.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 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엿습니다.
미 해군과 육군과 달리 미 공군의 주적은 소련 공군이었습니다. 소련군은 비밀리에 북한 공군과 방공군으로 참전하여 미 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6.25를 다룬 서적을 봐도 북한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련군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입니다.
엄청난 미국의 군수지원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습니다.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습니다.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부산군수사령부->미8군 후방사령부->후방사령부(본토) 체계였습니다.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습니다.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까지 끌어모은 미국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였습니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한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렸다가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습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미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습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미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냈습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 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습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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