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전운전을 위한 첫 번째는 단연 올바른 자세가 우선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자세로 운전을 하게 되면 사고 발생 시 더 큰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바르지 못한 자세로 지속적인 운전을 하게 되면 신체에 큰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잘못된 운전자세는 돌발상황에 닥쳤을 때 대처 속도가 늦어지고, 거리감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피로감을 줄이고 안전운전을 위한 올바른 운전자세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올바른 시트 포지셔닝

 

운전면허 도로주행 시 가장 먼저 평가요소로 등장하는 시트. 핸들 포지셔닝은 안전운전을 위한 기본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트. 핸들 포지셔닝이 중요한 이유는 이 부분을 지키지 않을 시 갑자기 발생한 돌발 상황에 대해 대처할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시트. 핸들 포지셔닝이 되어 있을 경우 사고 발생 시 신체에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기에 운전 시 꼭 지켜야 할 사항입니다.

 

 

올바른 시트 포지셔닝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등받이의 각도를 조절해 주어야 합니다. 통상적으로 직각으로 각도를 맞춰주어야 하며
착석 시 엉덩이는 시트에 밀착 시켜주어야 합니다. 그 후 허리를 곧게 펴고 운전을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편한 운전을 위해 등받이를 눕히시는 분들이 있는데 등받이를 눕힐 경우 시야 확보가 어려우며 안전벨트가 느슨해져 사고 발생 시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브레이크 페달에 중점을 두어 좌석 간격을 조정해야 합니다. 급작스러운 상황 발생 시 우리는 브레이크 페달을 가장 먼저 사용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브레이크를 끝까지 밟았을 때 무릎이 살짝 구부러지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만약 브레이크와 시트 간의 간격이 멀 경우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우며 충돌사고 발생 시 다리가 쭉 펴진 상태이기에 무릎에 충격이 가해져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헤드레스트의 경우 머리의 뒤통수에 맞닿게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헤드레스트가 너무 낮을 경우 사고 발생 시 목에 부상을 유발할 수 있으며 반대로 높다면 목에 피로도가 높아 어깨 통증을 유발합니다.

 

  올바른 룸미러&사이드 미러 조절 

 

올바른 시트 포지셔닝에 성공하셨다면 눈높이에 맞게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조절해 주셔야 합니다.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는 고개를 약간만 돌려도 후방이 보이게끔 조절해 주셔야 합니다. 사이드 미러 같은 경우 차체의 옆라인과 후방 지평선, 그리고 바닥이 잘 보일수 있도록 아래쪽을 향하게 조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올바른 핸들 포지셔닝

 

운전 초보 분들의 경우 운전대의 높이 조절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운전대의 경우도 본인 신체 사이즈에 맞게 높이 조절이 가능합니다. 핸들의 위치는 10시와 2시 방향에 손을 위치 시킨 후 팔꿈치가 살짝 구부러진 자세가 올바른 자세입니다. 10시와 2시 방향에 손을 위치시키는 이유는 핸들 조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며 팔꿈치가 살짝 구부러지게 하는 이유는 충격 발생 시 팔꿈치로 충격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높이 조절 시에는 핸들에 손을 얹은 상태로 높이를 조절해주며 이때 허벅지와 핸들 하단 사이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올바른 자세입니다. 시트와 핸들 간의 간격은 엠블럼이 가슴 중앙에 오게 위치 시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엠블럼 위치에서 에어백이 터지기에 상체 앞면 부위와 맞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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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간 중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패배이자 한국전쟁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투이며 영광으로 남을만한 후퇴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가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현재까지도  독일군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영하 40도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진 장진호 전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잡은 맥아더 장군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구상합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이 북한군을 격파하며 압록강으로 물밀듯이 진격하면서 한국전쟁은 UN군의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UN군은 1950년이 끝나기 전에 남한과 북한을 다시 통일 시키기 위해 진격을 서둘렀습니다.

 

 

북한은 통행이 어려운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서로 양분되어 있고 이에 따라 북진하는 UN군도 두개로 나누어졌습니다. 미 8군이 한반도의 서부해안을 따라 북진했고 한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이 동부해안을 따라 북상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했지만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1950년 10월 19일 국경선을 넘어 비밀리에 북한으로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해병대의 원산상륙에 크게 놀란 모택동은 10월 31일 만주로 이동하던 중공군 9군까지 북한으로 들어가 한국군 수도사단과 3 사단, 미 해병대 1사단을 즉시 격파하라는 무선지령을 내렸습니다.

 

 

장진호를 향해 진격하는 미 해병대 1사단 진격로

 

그리고 10월 25일 한국군 1군단이 장진호 서쪽 황초령 협곡에서 중공군과 마주치며 진격을 멈췄습니다. 당시 원산에 상륙하여 북진을 하고있던 미 해병대 1사단도 11월 2일 중공군 124사단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11월 17일 중공군 9 군은 조용히 장진호 부근에 도달하여 먼저 북한에 들어왔던 중공군 42군단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 당시 UN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몰랐던 미 해병대 1사단은 11월 24일 장진호 동쪽의 신흥리와 서쪽 유담리를 점령하며 진격하였습니다. 그리고 11월 27일 밤 15만의 중공군이 사방팔방에서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담리 일대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아비규환이 되었고 비전투 인원을 포함 4천 여명에 불과했던 미 해병대 1사단은 궤멸 직전에 상황으로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그렇게 중공군의 대공세는 계속되었고 미 해병대 1사단은 고립된 채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1월 30일 UN군 사령부는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겹겹으로 둘러쌓고 있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혹한 속에서 협곡을 따라 철수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당시 장진호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질 정도로 기온이 낮은 곳이었습니다. 차가운 칼바람은 전차와 차량의 오일을 얼어붙게 했고 소총과 기관총의 기름이 얼어서 작동이 안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수통의 물은 늘 얼어있었고 추위 속에서 동상환자가 속출하였으며 전사자들의 시신은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병에게 사용해야 할 수혈관과 모르핀도 얼어붙으면서 장진호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혹한의 날씨는 미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가혹했습니다. 중공군은 추위때문에 보급병이 도착하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하였고 방한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사가 많아 동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발이 신발 밑창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중공군도 있었고 총과 손이 얼어붙는 바람에 포로가 된 중공군도 있었습니다. 결국 중공군은 미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날씨때문에 제대로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극적으로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7연대는 12월 4일 6백여 명의 부상자들과 함께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하갈우리에는 4,300명의 부상자들과 1만 명의 병력, 1,500명의 피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함흥까지 완벽히 철수하는 일이 남았었습니다. 당시 지휘관은 모든 전투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공중으로 철수하라는 제의를 했지만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사단장 스미스는 해병대의 불명예라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4,300명의 부상자만 수송기로 공수하고 나머지 인원은 육로를 통해 탈출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위기에 빠진 미 해병대 1사단의 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는데 중국은 승리를 확신하며 당시 전황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 해병대 1사단장이었떤 스미스는 말 한마디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습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12월 6일 첫 집결지였던 하남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 1사단은 12월 7일 고토리에 도착하였고 12월 9일에는 중공군이 파괴시킨 수문교에 조립교를 설치해 병력과 차량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살인적인 혹한과 사투를 거듭하면서 철수를 이어가면서 12월 11일 함흥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유담리에서 철수를 개시한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간 3600명의 미군이 전사,부상,실종의 피해를 입었으며 중공군은 25,000명이 사망하였고 12,5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미 해병대 1사단의 끈질긴 저항과 후퇴 작전 덕분에 중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함흠지역 진출에 곤란을 겪었으며 덕분에 우리 국군과 UN군이 안전하게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이 전멸했다면 UN군이 한반도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장진호 전투는 한반도를 구해낸 결정적인 후퇴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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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5일, 육군특수전사령부 제707특수임무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장병과 공군 장병들이 갑작스럽게 동원되었습니다. 이유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음날인 2월 6일 제주공항 신활주로 건설 준공식에 참석하자 이의 경호, 일명 '봉황새 작전'의 수행을 위한 것으로 C-123 수송기 3대가 출격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출발지인 서울공항은 물론 도착지인 제주공항 역시 눈이 내리는 악천후로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강설로 인해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공수비행단에서조차 이륙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2번씩이나 했습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이륙이었습니다.

 

 

문제는 C-123 수송기 중 한대의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이에 공군기가 출동해 제주해역에 대한 수색작업을 실시하였지만 바다를 샅샅이 뒤져도 비행기 잔해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주 근해에 대한 수색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라산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라산 일대에 대한 수색이 시작되었습니다.

 

▲추락한 C-123 수송기 잔해

 

결국 다음 날인 2월 6일 오후 4시경 한라산 해발 1,060m 지점 동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 사이의 작은 골짜기인 개미등 부근에서 추락한 기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당시 사건현장은 수송기 파편들이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고로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수송기가 추락하면서 대원들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과 폭약들도 함께 폭발했었습니다.

 

▲당시 특전사령관이 707대대장에게 봉황새 박전을 대간첩 침투작전으로 훈련 명칭을 변경하라고 보낸 메시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군인들이 한꺼번에 사망했던 이 사건은 매우 큰 사건이었지만 단순기사거리로 취급되었습니다. 국방부는 "지난 5일 오후 3시께 제주도지역에서 대침투작전 훈련중이던 C-123 군용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 이 수송기에 타고 있던 육군과 공군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공식발표하였는데 대통령 경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으며 훈련중 사고였다는 점만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숨진 장병들이 속해있던 육군 쪽 인사들은 이 사고의 책임을 지기는 커녕 이 사건 이후에도 승승장구했습니다.

 

 

수송기가 추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지점에는 추락 지점을 알리는 원점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 15일에는 당시 특전사령관과 군 관계자, 유족들이 모여 충혼비를 세우면서 불의의 사고로 산화한 젊은 넋들을 위로했습니다. 문제는 원점비 비문에는 당시 사고가 대침투 작전 중 벌어진 일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이후 유족들에게 당시 사고로 인한 법정 보상금 약 2,500만원 정도씩 지급되었고 대통령의 한마디 사과도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유족들은 이후 오랜기간 동안 군당국의 엉터리 조사와 사후처리에 항의하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국회 및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검찰에 당시 지휘관들을 고소하기도 하면서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현재는 사고지점인 관음사 주차장 옆에 충성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어 1년마다 추모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시된 당시 사고기의 잔해가 이 사고가 얼마나 끔찍한 사고였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에 훈련을 오는 특전사 부대들은 항상 충성공원을 찾아 신고식을 겸한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현충일이나 국군의 날, 명절 때에도 빠짐없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이 봉황새 작전은 기상상태도 고려치 않고 작전을 무리하게 감행해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의 군인으로 살다가 숨진 이들에 대한 진실 규명과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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