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그동안 많은사람이 알지못했던 6.25전쟁 이후 미국의 영웅이 된 한국 출신의 말 한마리 이야기

 

 

 

 

갈색의 몸에 발과 얼굴 앞쪽은 하얗게 털이난 사랑스러운 암말의 이름은 여명이었다.

여명은 경주마로 서울 신설동 경마장 부근에서 소년마주 김혁문이라는 사람이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누나 김정숙이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자 의족을 사기 위해 
사랑하는 세살배기 여명을 미해군에게 250달러에 팔게 되었다.


여명을 구입한 사람은 미 해병 1사단 5연대 소속의 대전차 무반동포 소대의 소대장 에릭 피더슨 중위였다.
그는 산악지형이 많고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한국에서 수송용으로 쓰기 위해 자신의 사비로 구입하였다.

1952년 10월 26일 피더슨 중위는 윌라드 베리 병장, 필립 카터 상병과 함께 
서울경마장에서 돈을 지불하고 수송차량에 여명을 실었다.
소년 김혁문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사랑하는 여명과 이별을 하였다.
유망했던 경주마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군용마로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 레클러스와 조셉 레담 중사 >





 
미해군부대로 오게 된 여명은 처음에는 리코일스(무반동) 이라고 부르다가 
곧 소대의 별명인  '레클러스 라이플 Reckless Rifles' (겁을 상실한 포)을 따서 '레클러스' 라고 불렀다.


레클러스는 조셉 레담 중사를 비롯하여 많은 해병들이 훈련시키고 돌봐주었다.
그녀는 전장에서 살아 남기 위한 여러 훈련을 받았다.
'적이다!'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리면 벙커로 도망가 숨는것이 가장 먼저 배운 훈련이었다.


 

 


얌전하고 순한 그녀는 훈련이 없을때에는 부대 부근을 자유롭게 돌아 다닐수 있도록 고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레담 중사의 텐트에 들어와 옆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여러가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소대원들을 즐겁게 하였다.
스크램블 에그를 먹고, 코카콜라와 맥주를 마셨다. 
심지어 베이컨, 토스트, 초콜릿바, 사탕, 피넛 버터 샌드위치, 으깬 감자까지 모조리 다 먹었다.
이렇게 소대원들에게 있어서 레클러스의 존재는 전장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움도 잠시였다.
미군들이 ' 헤디 (당시 헐리웃 섹시여배우 헤디 라마)의 사타구니 ' 라고 부르던 곽촌리 부근의 전투에서
레클러스는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개당 11kg인 무반동포의 포탄을 그녀의 등에 6개를 싣고 운반하는 첫 임무가 주어졌다.
귀를 찢는 포탄과 총의 소음에 바들바들 떨며 두려워하며 움직이지 못했다.

 

 

 

1953년 3월 정전 협정을 4개월 앞두고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중 판문점에서 16킬로 떨어진 지점인 현 연천군 장남면 매향리 지역인 네바다 기지 ( 베가스, 레노, 카슨 세개의 전초로 이뤄짐) 가
전략적 요충지로 중공군 120 사단이 침공을 하였다.

가장 고지였던 베가스 전초기지가 먼저 공격을 받았고 이곳이 무너질 경우 나머지 전초기지도 함락되는것이다.
이 때의 포사격은 판문점의 평화협상테이블에 까지 생생히 들릴 지경이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 마저도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포격전이 펼쳐졌다.

이 5일 밤낮으로 지속된 베가스 전투에서 레클리스는 전설적인 활약을 하게된다.

분당 500발의 포가 사방에서 터지는 전투의 한복판에서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비탈진 산의 정상으로
혼자서 포탄을 싣고 운반하던 것이다.

한번에 11킬로의 포탄을 6~8개식 등에 싣고 45도의 급경사진 산을 올라 가기글 하루동안 380 여회.
거리로 따지면 5~60 km가 넘는 거리였다.

이렇게 그녀는 하루만에 4000 kg의 포탄을 날랐다. 
그 전투에서 사용된 포탄의 95프로의 물량이었다.


"암갈색 몸매에 하얀 얼굴을 한 레클러스가 말 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을 보고
모두 감동해서 사기가 진작되어 적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전 해병대 상병 바빗

 

 

 

그녀는 용감하고 똑똑했다. 포탄이 근처에 날라오면 피하기도 재빨리 다른곳으로 돌아 가기도 했고
통신선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움직였다.

포탄을 배달하고 내려갈때에는 부상자를 태워 운반하였다.

 

"상처를 입은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외로이 충성스럽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훌륭한 것입니다.
그녀의 모습이 나의 머리속과 가슴에 영원히 각인되었습니다. " --- 전 해병대 하사 해롤드 워들리  

이 전투에서 그녀는 두번이나 부상을 입었다. 왼쪽 귀와 옆구리에 포탄의 파편이 박혔지만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렇게 부상을 당한 레클러스를 보호하기 위해 미해병대는 전우애을 발휘하여 자신들이 입고 있던 
방탄조끼를 그녀에게 씌워주었다.

레클러스의 활약으로 짱깨군은 1300여명이 사망하는 전과를 올렸다. (미군 사망은 118명)
이 전투에 승리한 덕분에 한국은 많은 땅을 더 획득할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그녀의 활약에 감동을 받은 미군은 그녀를 상병으로 특진시켰다.

그 후 부상으로 전면으로 나서진 못하지만 후방에서 많은 물품들을 실어 나르며 활약을 하였다.


 

 

 

"저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능에 정말 놀랐습니다.
믿으실지는 몰라도 그녀는 다른 해병대와 같은 단결심과 소속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우와 함께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모두의 관심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모든 해병들이 그녀를 사랑하는것이 분명합니다. "
 ---- 전 해병대 사령관, 해병대 1사단장 대장 랜돌프 페이트 

전쟁이 끝나고 몇개월이 지난 1954년 4월 10일 
미해병 1사단장인 랜돌프 M. 페이트는 레클러스의 활약을 치하하며 하사로 진급시켰다.
이 진급식에서 그녀는 부대휘장이 새겨진 금색과 빨간색의 화려한 담요도 상으로 받았다.

 

 

<레클러스의 하사 진급 축하행사 >




그리고 자신을 처음으로 해병대에 입단시킨 에릭 피더슨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땅을 밟게 되었다.

그 전부터 언론을 통해 미국 본토에서도 그녀의 영웅담이 알려지며 관심을 한몸에 받았지만
해병대는 그녀를 단순한 상업적인 흥미에 노출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 하였다.

 

 

< 미국에 도착한 레클러스와 피더슨 중위 >


그 후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있는 미해병 1사단 5연대 소속 캠프 펜들튼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 그녀는 VIP 대접을 받으며 관리되며 세 마리의 자손을 낳았다.

 

 

 


1955년 미국에서는 레클러스의 영웅담을 다룬 책 " 레클러스 : 해병대의 자랑 " 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페이트쨩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해병대 사령관 (4스타) 까지 진급한 뒤
1959년 8월 31일 다시 한번 레클리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행사를 자신이 직접 주최를 하였다.
이 행사에서 1700명의 해병대원이 그녀에게 거총경례를 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1968년 캠프 펜들튼에서 잘 지내던중 목에 가시철사 펜스가 박히는 부상으로 숨을 거두었다.
미해병대는 정식으로 군장례식을 치뤄주고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

 

 

 

 

그녀가 생전에 받았던 훈장은 다음과 같다.

Purple Hearts (베가스 전투의 부상으로 받음) 
Good Conduct Medal (선행장; 부사관에게 교부되는 근무기장)
Presidential Unit Citation (미국 대통령 표창)
National Defense Service Medal (국방 종군기장)
Korean Service Medal (한국 종군기장)
United Nations Korea Medal (UN 종군기장)
Navy Unit Commendation (미해군 표창)
Republic of Korea Presidential Unit Citation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1997년 미국의 유명한 잡지 LIFE 에서는 미국의 100대 영웅들 ( 링컨, 루즈벨트등 미국 역사의 영웅들을 뽑은 리스트)중
하나로 선정하였다.




2013년 7월 26일. 국립 미해병대박물관이 있는 기념공원에 한국전쟁 종전 60주년 기념으로 레클러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 동상의 아랫부분에는 그녀의 꼬리털 묶음도 함께 전시되었다.

 


2014년 7월 29일 레클러스가 활약했던 판문점-베가스 전투가 벌어졌던 연천군은 레클러스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공원을 만들기로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조국에서는 알려지지 않던 레클러스의 헌신과 노력이 알려지길 기대해본다.

 

 

 

출처 : 구글. 위키피디아, 엔하위키

동영상참조 :http://www.youtube.com/watch?v=YIo3ZfA9da0

 

 

 

6.25하면 보통 인천 상륙작전이나

 

낙동강전선 다부동전투,

 

아니면 백마고지 전투 같은거

 

 많이 떠올리는게 일반적인데

 

나는 6.25 전쟁의 방향을 결정지은건

 

다름아닌 6사단의 춘천전투라고 봅니다.

 

6사단이 춘천에서 북괴 2군단을 발라버리면서

 

 적의 주요 전략을 완전히 뒤틀어버렸고,

 

그 덕에 그나마 남은 병력과 장비를

 

 추스려서 낙동강 전선이라도

 

 구축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6.25 개전 당시, 북괴의 개전 초 전략입니다.

 

서울을 위시로한 서부전선에는 시가지도 있고,

 

 국군도 3개 사단이나 있고, 인구도 많아

 

징집 땜빵이 쉬울 것으로 보이니

 

이곳 전선을 모루로 삼고

 

동부전선의 2군단을 망치로 삼아

 

춘천을 거쳐 수원방향으로 우회하여

 

서부전선 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려던 게

 

 북괴의 주 전략이었습니다.

 

이게 성공했다면 장비를 버렸더라도

 

 병력이라도 건진 1사단이나 7사단, 수도사단이나

 

 피난민들은 뒤에서 북괴 1군단, 앞에서 북괴 2군단을

 

 만나 포위 섬멸당했을 것이고, 한반도 남부에 있던

 

서너 개 사단은 집결하기도 전에 휩쓸리고,

 

김일성의 장담대로 8월 15일에

 

북괴군은 부산까지 도달했었겠죠.


이를 위해서는 망치의 진격로상에 있는

 

 6사단을 초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북괴는 서부전선보다도 더한 병력집중을 시켰습니다.

 

 6사단 하나 잡으려고 2개 사단에다가 자주포,

 

모터찌클연대까지 증원시켰고 예비사단까지 뒀습니다.

 

 병력격차가 세배쯤 났을거에요


 

 

 

근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춘천지구를 방어하던 6사단 7연대는

 

 북괴 2사단의 초전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소양강 도하를 준비하던 적을 상대로

 

 오히려 아군이 역 도하하여

 

기습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심일소위 및 특공대가 한국전쟁

 

최초의 적 기갑 격파 타이틀도 따냈습니다.


거기에 적의 진격로를 예측했던

 

 6사단 포병대대가 성공적인 화력지원을 수행해,

 

강안을 따라 진격하던 북괴 6연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수십문의 북괴 곡사포 및

 

 대전차포 등을 격파하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인제-홍천지구를 방어하던 6사단 2연대는

 

배속받은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작전에 돌입하여, 많은 피해를 입긴

 

 하였으나 적 12사단의 공격을 저지해냈습니다.


사단 예비였던 19연대는 춘천과 인제를

 

오가며 효율적으로 예비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춘천에서 북괴 2사단이 소멸당하자, 북괴는 12사단에서

 

 일부 전력을 빼내어 춘천 쪽으로 돌렸고,

 

그동안에 6사단 예비였던 19연대가 춘천에서

 

인제-홍천쪽으로 이동하고, 6사단 포병대대도 일부를

 

 이동하여 인제-홍천방면을 지원. 여기서도 매우 효과적인

 

포병대대의 지원에 힘입어 오히려

 

적 12사단 잔류병력까지 괴멸시켰습니다.

 

개전 3일도 안되서 사단 두개가 사라졌죠

 

망치와 모루를 하고싶었던 것 같은데

 

 망치가 파괴됬죠 ㅎ


이때 더 소름돋는게 있는데, 춘천과 인제를 왔다갔다

 

 하면서 연대급 적을 궤멸시키고 적 포병도

 

 소멸시키던 6사단의 포병대대 전력은

 

사거리 10km도 안되는 105mm

 

 M3 견인곡사포 13문이 전부였습니다.

 

꼴랑 13문가지고 이리쪼개고

 

저리쪼개서 적시에 적소에 화력지원.


 

 

 

비록 서울이 함락되긴 했으나,

 

6사단이 적 망치의 핵심 진격로였던 춘천을 방어하고

 

오히려 망치를 때려잡아버렸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아군 병력을 상당수 보존하는데 성공했고,

 

기습 상륙한 적에게 포위되었던 8사단은 병력과

 

 장비를 상당수 보존하며 대관령을 타고

 

철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고 때맞춰 도착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굳히기를 시전했죠.

 

북괴의 공세종말점은 거기였고, 낙동강 전선은

 

 좁은 전선폭과 전선의 형태가 예비대를

 

굴리기 매우 적절했던 까닭에, 당시의

 

 치열한 전투랑은 별개로

 

 매우 효율적인 방어선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다들 알다시피 북진이었고...

 

6.25 전쟁 초 북괴의 전략을

 

6사단이 완전히 뒤엎어 놨습니다

 

만약 안그랬으면 낙동강 전선이고

 

뭐고 한국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6사단의 춘천전투는 널리 알려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