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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후 1976년 8월 18 이전까지 판문점의 공동경비구역은 서로 군사분계선을 자유롭게 통행하였습니다. 명칭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군 제3초소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주의에 북한군 초소 3개가 둘러 쌓고 있어서 유엔군은 행여 있을지모를 북한의 도발과 제3초소의 근무자 안전을 관측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 관측초소(OP5)와 한국군 제3초소(CP3)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어 관측이 방해되자 유엔소속 미군은 이 미루나무 가지를 절단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에 미루나무 가지를 절단하기 시작하였스비다. 물론 당시 일직장교 회의에서 북한도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에 합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군 장교 '박철 소위'가 말도 되지않는 억지와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 작업을 중단하라고 경고를 하기 시작하였지만 미군측 '보니파스 대위'는 이건 당연한 일이라며 무시하고 작업을 지속하였고 이에 격분한 북한군 장교 박철 소위는 북한군 트럭에 몽둥이로 무장한 북한군 20여 명을 태우고 다시 돌아와서 미군과 한국군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인부들이 도끼를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피를 보고 흥분한 북한군 병사 한명이 도끼를 주워들어 미군장교 두명을 도끼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미군장교 두명은 후송중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미군이 그것도 장교 2명이 북한군 도끼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주한 UN군 사령관겸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리챠드 스틸웰 대장은 일본에서 F-4 전투기 후방석에 탑승하여 한국으로 급하게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 리챠드 스틸웰 대장은 펜타곤에 무력사용을 허락받으면서 미국 본토에서 핵탑재가 가능한 F-111 전술폭격기 20여 대와 괌에서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 공군기지에서 F-4 팬텀전투기 24대가 한반도로 집결하였습니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소속의 항공모함 미드웨이가 호위함들과 함께 동해 영해상으로 진입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목적은 무력시위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절단 작업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과,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계획을 눈치챘던 북한은 잔뜩 겁을 먹었고 이에 미 백악관은 주한미군연합사에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찾으라고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한미군연합 사령관은 미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사건의 발달이었던 미루나무만을 절단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작전이 바로 작전명은 폴 버니언(Operation Paul Bunyan)이라 명명되었습니다. 폴 어니언은 덩치가 큰 나무꾼으로 하룻밤 사이에 천그루의 나무를 베었다는 미국 전설의 나무꾼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군과 입장이 달랐던 박정희 대통령은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말을 남기며 한국군에 따로 '응징보복작전'을 비밀지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한국군에서 미군에게 작전 관할권이 없고 국군 최정예였던 제1공수특전여단 64명은 작전명 독수리 작전 이름 아래 응징보복특공조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극비로 구성된 응징보복특공조 요원들이 육군 1사단 수색대대의 엄호하에 카투사 복장을 하고 미 육군 공병대를 보호하며 비무장지대로 진입하여 8월 21일 오전 7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에 걸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마친 미 육군 공병대가 철수하려던 그 순간 카투사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있었던 64명의 특전사들이 작업복을 벗기 시작하여 이동중 탑승했던 트럭 모래주머니에 분해하여 숨겨놓았던 M16 소총을 재빨리 조립하여 어깨에 둘러메고 권총과 수류탄을 꺼내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 초소를 향해 몽둥이를 들고서 야유와 욕설을 퍼부으며 보복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돌발사태에 미군측은 급하게 막아보려 했지만 응징보복특공조 특전사 64명은 돌아오지않는 다리를 넘어 돌격하였고 북한군은 초소를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특전사들은 북한군의 불법시설물이었던 바리게이트와 초소를 마구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북한군 초소 4개를 다 때려부수면서 계속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지만 북한군은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는 상부에 지시가 있었는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었던 박희도 장군은 만일 그 도발에 북한이 대응을 했으면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보다 더 끔찍한 일을 우리 특전사에게 당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당시 투입되었던 특전사들은 정말 북한군을 사살하기위해 작정하고 투입되었던 것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후 당시 미루나무 위치에 추모동판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동판에는 "2명의 유엔군 사령부 장교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바렛 중위 도끼 살해 사건의 초점이어던 황색 포풀러 나무가 이 지점에 있었는데 그들은 1978년 8월 18일 나무가지를 치는 작업단을 감독하다가 북한 경비병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1976.8.18"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