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사상최대의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도록할게요

 

 

일단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란

 

제2차 세계대전1944년 6월 연합군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실시한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상륙작전입니다.

 

 

 

이제 자세히한번 들어가서 알아보도록할게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육군참모총장이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시하며

 

 동맹국 포함 3개의 집단군 390만명

 

4600대의 전차를 동원하며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독일군은 180개가 넘는 소련군 사단들을

 

와해시키면서 전진하지만

 

독일군 앞에 놓여있는건

 

 또 다른 360개의 소련군 사단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격속도는 느려질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의 맹렬한 추위가

 

덮치면서 이어진 라스푸티차

 

 (러시아의 기후현상)까지 이어지며 


독일군의 진격은 모스크바를

 

코앞에 놔두고 공격을 포기합니다.

 

 


이윽고 1941년 12월 소련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합니다


보급차량이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전선을 무리하게 넓힌

 

 독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소련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계속해서 입고있었습니다.

 

 

 

독일군이 후퇴를 하고 있었다곤 하지만

 

 서유럽을 쉽게 정복하고

 

동부전선에 집중하던 독일군을 상대로

 

소련군도 버거워했습니다.


 

 

2차대전 당시 소련군

총사령관 스탈린



스탈린은 연합군에 시급하게 제2전선을

 

개전하라고 난리를 쳤었고


처칠이 주도한 연합군은

 

디에프 상륙작전을 실시했지만

 

  실패하고 상륙작전이 어떤 개념인지 배우고

 

이때 배운 교훈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 랜드리스(무기대여법)을 실시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항공유,기름,자원,피복 등

 

 온갖 것들을 소련에 지원해주었고


소련은 랜드리스를 등에 업고 군수산업에

 

모든 역량을 올인하여 기갑무기가

 

물밀듯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43년 7월 소련의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한

 

 독일군의 '치타델레 작전'(쿠르스크 전투)를 펼치게 되고

 

소련은 성공적으로 수비를 하게됩니다.


이후 즉각적으로 소련군은 공세로 전환

 

키예프를 탈환하고 공격에 들어가 모두가

 

잘아는 '베를린 레이스'가 시작된겁니다.


때마침 북아프리카 전선에선 영국 제8군이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박살내버리고 북아프리카에서의

 

주도권을 연합군으로 가져오게되니다.


이제 이때부터 독일군의 장성들은

 

전쟁에서의 패전을 예감하기 시작합니다.


계속된 스탈린의 제2전선 개전 요구로

 

 연합군에서 처칠은 이탈리아에 상륙하자고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이제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온 미국이 반대를하고

 

유럽 북부지방인 프랑스에 상륙하자고 결정내리게됩니다.


독일군 역시 연합군의 상륙기후를 알고 있었고

 

 연합군의 기만 작전들이 먹혀들어가

 

노르망디 주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되는데 


웃긴게 히틀러가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할것이다!'

 

라고 예견했지만 


히틀러의 전략지식이 낮았던걸 알았던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와

 

 OKW(독일 국방군최고사령부)는

 

 무시를 해버리고 맙니다.

 

 한술 더 떠 히틀러도 노르망디에

 

 연합군은 상륙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버립니다.


영,미 연합군 즉 유럽연합군의 총사령관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6월4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했지만

 

 날씨가 너무 안 좋았고 6월6일 날씨가 갠다는 소식에

 

 6월6일을 D-day로 정하게됩니다.

 

.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과 추축군의 배치도

 

 

독일군 전력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관 아돌프 히틀러

 

국방군 참모총장 빌헬름 카이텔 원수

 

작전부장 알프레드 요들 상급대장

 

서부지역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B집단군사령관 에르빈 롬멜 원수

 

독일 제7군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

 

(1기갑군단,2기갑군단,47.기갑군단,58기갑군단

2팔슈름야거군단,25군단빌헬름,74군단

81군단,84군단,서부전선 기갑집단군)

 

 

독일군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얻은 피해를 보충하지 못했고 


완편인원이 1만 2800명으로 병력들도 부족하여

 

 노인들이나 지나치게 어린인원들을

 

'고정사단'으로 배치하고 


그것도 인원이 부족하여 동방대대를

 

 추가로 배치햇는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중 자기는 독일인이

 

아니고 체코사람이라고 항변하다가

 

총맞아 죽는 애들이 나오는데


얘들은 동부전선 포로 가운데 독일군을

 

 위해서 싸우겟다고 '자원'한 인원들입니다.


여하튼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입은피해를 복구하지 못했고


기갑사단 마저도 편제와 달리 실제로

 

 완벽한 편제를 가진 기갑사단은 없었습니다.



거기다 저기 전투서열을 보면 지나치게

 

고위급 계급들이 많은걸 알수가 있습니다.


이게 히틀러 때문에 이렇게 된겁니다.

 

 

 

편제상으로는 서부전구 총사령관인 룬트슈테트가

 

예하부대를 통솔하고 지휘하게 되있었고 


배치마저도 깔끔하게 되있었는데 휘하군단의

 

원수인 에르빈 롬멜은 히틀러와 사이가 좋았고

 

히틀러 덕분에 쾌속 승진가도를 달린 케이스라서 


룬트슈테트를 거치는 보고절차를 생략하고

 

 단독으로 히틀러와 접견이 가능해서 사사껀껀

 

룬트슈테트와 병력 배치로 충돌을 일으키게됩니다.


 

거기다 계급 인플레가 심한데다 플러스 알파로

 

 자기가 잘낫다는 프로이센 귀족 정신이 섞여서

 

 배치가지고 마찰음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어느정도냐면 자기 군단을 봉건시대 영지로

 

여기는 놈들이 많았습니다.

 

 대체로 무장SS부대가 심했고


룬트슈테트 입장에서는 머리가 터질지경이였습니다.

 

롬멜은 허구한날 보고절차를 생략하고 

 

히틀러한테 난리치고 히틀러는 갑자기 전화해서

 

 자기도 모르는걸로 쓴소리를 들으면


뭔가 싶어서 알아보니 롬멜이

 

직속으로 찔러서 전화온거고 


거기다 무장친위대를 이동시키려고 하니

 

 국방군 최고사령관에 충성을 바치는 친위대는

 

히틀러의 명령없이는 이동을 시킬수 없는데다가

 

히틀러가 사사건건 참견하는 입장이라


룬트슈테트는 말이 원수에 서부전구 최고사령관이지만

 

 아무것도 자기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였습니다.

 

 

연합군 전력

 

연합군 최고사령관 미국 드와이트D.아이젠하워 대장

 

부사령관 영국 아서테더 공군대장

 

참모장 월터 베델 스미스소장

 

(21집단군,영국2군,1군단,8군단,12군단

30군단,12집단군,미국1군,미국3군.5군단

7군단,8군단,12군단,15군단,19군단,20군단)

 

 


전쟁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고

 

 휘하 장군들에게 위임을 내려


원정군 최고사령관이던 아이젠하워는

 

군 경력 대부분을 참모로 지내며

 

 병력을 통제해본적은 없지만


관리자로서 각국에서 모여든 군대를 하나의 연합체로

 

 묶는 업무를 매우 잘해냈고 자신의 한계를

 

 잘알던 아이젠하워는 허구헌날 싸워대던 패튼과

 

몽고메리의 분쟁을 잘 조정하며 중재자로서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데


이는 연합군의 승리에 또다른 요인이라고 볼수있습니다.


거기다 각 군단,사단급의 지휘관들의 계급,배치

 

 역시 매우 적절하게 이루어져 있는걸 알수가 있습니다.


또 항공기의 보유대수 역시 독일과

 

연합군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습니다.


1944년 5월 30일 기준으로


독일군은 총 891대의 항공기가 있었지만

 

작전 가능 항공기는 총 497대


연합군은 총 7520대였습니다.


 



 

서부전선군 최고사령관이지만 힘은 없던 룬트슈테트



독일군의 작전계획은


앞서 설명한걸 보면 독일

 

 서부전선군은 룬트슈테트가

 

 명목상 최고사령관이였지만 사사건건

 

개입하는 롬멜과 히틀러,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장친위대때문에 전략을 짜는데

 

상당히 골머리를 썩고 명령처리

 

 과정도 매우 복잡했습니다.

 

해안 방어 시설을 시찰하는 독일의 롬멜

 

독일군은 연합군이 조만간에

 

상륙작전을 펼친다는것을

 

 알고있었고 서부전구 기갑집단

 

사령관인 슈페벤부르크 대장은

 

 기갑부대들을 해안이 떨어진곳에 배치했다가


연합군이 상륙한뒤 내륙으로 전진해올때

 

기갑부대를 동원 반격을 가하자고 건의했는데

 

 이 같은 방법이 몇번 먹혀들어간적이 있어서 


룬트슈테트는 이 방어계획이 좋다고

 

 인정하고 입안하려는 순간


롬멜이 갑자기 반대를 시작합니다. 


'내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겪은바로는

 

 그와 같은 기동방어는 압도적인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롬멜은 독일이 상륙군을 격퇴시킬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뿐이라고 생각했고


기갑부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어

 

해안선 가까이 배치하여

 

 즉각적인 반격을 시행하자고 주장했는데


결국 이건 다툼을 벌이다가

 

 룬트슈테트가 승리합니다


근데 훗날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해보면


해안선에 배치된 부대는 상륙당시 연합군 해군의

 

압도적인 해안사격으로 뚫려버릴게 뻔했고


내륙에 배치되어 반격을 시행하려했던 부대는

 

상륙전날 투입된 공수부대의 도로 파괴공작과

 

연합군 항공전력에 무력화 되거나

 

엄청난 피해를 입습니다.


 

 

 

1944년 6월 5일 101공정사단을 시찰하는 아이젠하워

 

 

 

연합군 작전계획

 

암호명 멀베리 항구


디에프 상륙작전의 교훈으로

 

 '상륙초기 항구 탈취하는것이 불가능하다면

 

 항구를 조립해서 들고가면 되잖아?'

 

 라는 생각으로 만듭니다.


 

연합군은 정말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당시 독일군의 암호체계는 영국군에게

 

 모조리 뚤려서 줄줄 새어나가고 있었고 


독일군에게 연합군 상륙부대가

 

 두배가 되어보이도록

 

 기만전술을 펼쳤습니다.

 

문서상 존재하는 30개사단이 배속되어

 

패튼이 지휘하는 미1집단군을 만들어냈고


이는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습니다.


또한 제공권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서 


독일군의 철도 체계를 마비시킴으로써

 

전장으로 원할하게 이동하는걸 막았고


아이젠하워는 도시 폭격 전략에서

 

탈피하는걸 꺼려하는

 

 영국 폭격기 사령부와 미8공군을 설득시켜서

 

 폭격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가져오게됩니다.


그 결과 연합군은 서부전구의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을

 

 박살내버렸고 D-day 당시 연합군은 프랑스 상공에

 

 주-야간 제공권을 확실하게 장악했습니다.


지상전투 계획은 몽고메리 장군이 작성했고 이는 영국군은

 

 노르망디 동부해안에 미군은 서부해안에 상륙뒤

 

 내륙으로 진군한다는것이 핵심이였습니다.


이는 5월15일 연합군 원정군 최고사령부

 

 전체 브리핑에서 확정되었습니다.


6월4일 상륙작전이 준비되었지만 기상 상황이

 

대단히 좋지 않아서 아이젠하워는 작전을 지연

 

 1944년 6월 6일에 실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때 B집단군 원수 롬멜은 슈바벤에 있는 자택에서

 

 마누라의 생일선물을 준비하고 있었고


7군 사령관인 돌만은 전쟁연습에

 

참가하러 '렌'에 가있었고

 

 1친위기갑군단의 사령관이던

 

요제프 디트리히 역시 브뤼셀로 가있는


독일군 수뇌부들중 상당수가 자리를 비어놨습니다.

 





그리고 1944년 6월6일 자정을 넘긴시각을 전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예측한

 84군단장 에리히 마르크스 대장


그러나 6월12일 연합군의 공습에 사망합니다.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독일군의 한 장성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거라고

 

 정확하게 예언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바로 18군단 참모장을 지낸 경력이 있는

 

 에리히 마르크스 대장인데 이미 1944년 2월

 

도상 훈련에서부터 롬멜에게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할거라고 예언을 했었고


다른 군 장성들 역시 파 드 칼레(pas de calais)로

 

연합군이 상륙할거라고 예상했던지라

 

에리히 마르크스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생일은 6월6일 생일 4일전에

 

 한 장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농담삼아 했다고합니다.


"내가 영국인들을 잘 아는데, 그들은 이번 일요일에

 

다시 교회를 갈 것이고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 이곳으로 올 거야.

 

화요일 이후에는 별로 기회가 없을 거야.

 

그리고 군사령부에서는 저들이 아직 오지 않았으며

 

와도 칼레 쪽으로 온다고 하지만,

 

내가 볼때 그들은 월요일에 이곳으로 와서 인사를 할걸?"


이말은 결국 사실이 되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뒤

보급물자와 병력들을 쏟아내는 연합군 수송함들



그러나 실제로 연합군이 6월6일 노르망디에

 

 상륙할거라고는 짐작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 정찰부대

 

역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이

 

 잘 쓰는 말들이 갑작스레

 

라디오를 통해서 송출되기

 

 시작했지만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상륙 경보가

 

 20회나 접수되었기 때문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6월4일부터 시작된 기상악화는

 

도버 해협의 파 드 칼레에 300~500 두께의

 

안개가 낄것이며 바람의 세기

 

 역시 강력해지므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시작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은채 독일 서부전선군의

 

해안부대들은 경계태세를 완화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군 수뇌부들은 자리를 비었고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해안을 방어하는 B집단군의

 

군단장인 에르빈 롬멜은 집으로 가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린 연합군 공수부대원들 




이미 6월6일 자정부터 코탕탱 반도에는

 

 101,82 공수사단들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의 임무는 '미군이 상륙한 해안 서쪽 끝에서

 

해안을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확보하는 것'이였습니다.

 

노르망디 급습진로


 

그렇지만 야간 작전은 미드 BOB에서도 볼수 있듯이

 

많은 병력들이 분산되고 섞여버리는 결과가 나왔고

 

남은 전쟁기간동안 공수작전은 주간에 실시되었습니다.

 


영,미 연합군 공수부대들은 비록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자신들의 임무를 잘 수행해냈고 


2시간뒤인 03:00부터 2000대에 달하는

 

 연합군 중(重)폭격기들이 상륙지점의

 

독일군 방어진지를 2시간동안 폭격했습니다.

 

상륙주정수송선이 영국해협을

건너이동하는 모습

 

해번에서 보이는 침공지역의 지도

기뢰제거지역 포격에참여하는함선위치

해안가에 목표물들이 적혀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05:00부터 상륙함대와 같이

 

노르망디 해안에 도착한 연합군 전함 7척

 

순양함 18척, 구축함 43척 등이

 

 노르망디 해안에 함포사격을 실시한뒤


상륙하기 15분전에

 

 미국 대형폭격기 1000대가

 

 방어선에 추가로 폭격을 가했습니다.

 

 


 

모든 방어진지에 타격이 이루어진 다음 06:00부터

 

 연합군은 포앙트 두 옥, 오마하 비치, 골드 비치,

 

주노 비치, 소드 비치에 상륙을 시작했는데

 


 

주노,유타,소드비치는

 

별다른 저항없이 상륙작전을

 

 쉽게 이루어냈지만 오마하 비치는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죽음의 해안으로 변하게됩니다.

 

 

 

 

"이 해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있다.

 

이미 죽은자와 곧 죽을 자이다"

-미군 제1보병사단 16연대장

조지테일러-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오마하 비치의 미군 병사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中

오마하 비치의 상황


수많은 피해를 입고

 

모든 상륙작전이 완료된 다음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수많은 물자들을

 

쏟아내면서 진군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맞서 독일군 역시 기존에 준비한

 

 반격작전을 시작했어야 했지만


B집단군 군단장인 롬멜은 집에 가있었고

 

 무장친위대 통솔자인 제프 디트리히 역시

 

근무지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제3보병사단소속 영국해병대가

소드해변에서 진격하는모습


이들은 황급히 전선으로 복귀하고

 

 서부전선구 최고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는

 

앞서 계획한 반격작전을

 

 토대로 2개 친위기갑사단에게

 

 노르망디 해안으로 진격을 명령했지만


이는 당연히 국방군 총사령관인 아돌프 히틀러의

 

 승인을 얻어야 이동시킬수 있었습니다.

 

 


그전에 OKW의 재가를 얻고 그게 위로 올라가는

 

 시스템 덕분에 허가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은채


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한참뒤인 16:00에 비로소

 

히틀러의 부대배치 승인 재가가 떨어지게됩니다.


이걸로 전후 많은 국방군 장성들은 자서전에서

 

 '히틀러가 만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신속한 방어작전이

 

 실시되지 못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라고 써놨는데 이는 당시 연합군 제공권 장악능력을

 

 보면 친위기갑사단이 즉각 진격하려고 해도

 

 이동을 저지 당했을 확률이 높았습니다.

 


일례로


서부전선 기갑집단군은

 

이동하는 동안 공습을 받아

 

보유한 무선통신의 4분의 3이 날아가서

 

6월9일까지 제기능을 하질 못합니다.


거기다 독일군의 암호는 이미 뚫려있는 상태라

 

 영국 공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기갑집단군단장이던

 

 슈페벤부르크의 눈앞에서

 

두명의 참모장교가 산채로

 

 불타버리는걸 목격하고

 

 본인 역시 큰 부상을 입습니다.


고위급 장교들이 죄다

 

죽어버리거나 부상을 입은 결과

 

 서부전선 기갑군의 반격작전은

 

 취소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본국의 OKW와 히틀러는 계속해서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미끼일것이고


대규모 상륙작전이

 

몰아칠것이다 VS 아니다 이게 본진이다


라는 내용으로 계속해서 지도를

 

부여잡고 싸우는 가운데 


연합군은 오마하 비치의 상륙작전을 이루어내고

 

 해당 구역에서 상륙해낸 연합군들과 연계를 성공.

 

내륙으로 진군해오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과

 

연합군 공수부대들은

 

 독일군의 통신,도로,철도를

 

파괴시키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군은 상륙작전이 이루어진뒤 12시간만에

 

 제대로된 반격작전을 실시하게 됩니다.


독일군이 반격작전에 들어가고 12친위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는 캐나다 3사단에

 

 반격작전을 실시하지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도로에 발이 묶여 있는채로

 

 제대로 실시하지도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독일군들은 이동중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수십대의 장갑차,차량을 파괴당하고

 

 이동속도가 현저히 느려져서 계획했던

 

 반격작전들은 죄다 취소되거나 연장됬습니다.

 

골드해변에 지어진 멀베리B

 

상륙작전 성공 후 3일 뒤인 6월 9일에는

 

 '멀베리(Mulberry)'라는이름의

 

 조립식 인공항구가 노르망디 앞바다에 가설됩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상륙 이후 군수물자를 공급할 항구를

 

 얼마나 빨리 점령하느냐 였습니다.


 

연합군은 12척의 낡은 수송선을 썰물 때 해변에서

 

 가까운 4.5m 깊이의 바다에 일렬로 가라앉혀

 

 1.5km에 이르는 방파제를 만들었습니다.

 

 또 암호명 '피닉스'로 명명된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를

 

 썰물 때 바다에 빠트려 방파제를 조성했고,

 

암호명 '봄바르돈'인 물에 뜨는 방파제를 항구의

 

 또 다른 보호막으로 삼았습니다.

상륙직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2개의

 

 정박지를 건설하였는데

 

 오마하 비치에는 미군이 건설한 멀베리A

 

그리고 골든 비치에는 영국군이 건설한 멀베리B를

 

 각각 미국과 영국이 관리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개월 동안

 

 약 250만명의 장병과 50만 대의 차량,

 

400만톤의 물자를 수송함으로써

 

연합군 승리의 초석을 마련하게됩니다.


 6월 11일 히틀러가 마침내 그놈의

 

 '퇴각 불가 현지 사수명령'을 내려버리고

 

 고착 방어전을 펼치던 B집단군은 후퇴도 못하고

 

 섬멸되기 시작합니다


 

101공수사단 병력들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1친위기갑사단(LSSAH)

 

총통경호대 친위대 아돌프 히틀러와

 

 2친위기갑사단(Das Reich)다스 라이히를 차출해서 


캉으로 진격하는 영국군을 막으려 했으나

 

SAS와 공습으로 당초 계획된 이동기간 5일을

 

훨씬 초과한 17일만에 도착합니다.


이제 이때부터 독일군은 1944년 9월17일

 

마켓가든작전까지 패주에 패주를 거듭하게됩니다.


 

 

미하엘 비트만(제일 왼쪽)과 그의 전차병들


그러나 일례로 1944년 6월13일

 

101SS중전차대대 2중대장이던  미하엘 비트만은

 

 9대의 전차로 28대의 영국군 전차를 파괴시키고

 

영국7기갑사단의 진격을 멈춰버리는

 

유명한 '빌레르-보카주'전투가 있었습니다.


 

 

 

 

3대의 야크트판터가 야간 기습으로

 

연합군 처칠전차 11대를 박살내버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후 한시름 덜었다고

 

 지휘관들은 생각했지만

 

병사들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험난한 전투속에 마음을

 

편하게 놓을순 없었습니다.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은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였고


6월 22일 셰르부르를 점령하고 

 

 7월 11일 영국군은 캉을 점령했습니다.


연합군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기록한 굿우드 작전과

 

 미군의 코브라 작전으로 연합군은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마침표

를 끝낼수가 있었습니다.

 

 

 

6월 11일 히틀러의 퇴각불가

 

 현지사수 명령이 떨어진 이후

 

 롬멜은 세인트 게르망에 있는

 

 서부전선구 최고사령부에 방문했고


룬트슈테트를 만나 가망없는 이 상황에 대해

 

 히틀러에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하고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서부 연합군과

 

'타협'을 해야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당시 독일군의 대다수들은

 

영,미 연합군들에게 항복하면

 

 그들은 침략자 소비에트군과 같이 전쟁을 할줄

 

 알고 있었으나 그건 상당한 오산이였으며


카이로 회담때 이미 독일과 추축국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었습니다.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제발 전선으로 와서 이야기좀 하자고

 

 간청에 간청을 했고


히틀러는 프랑스로 와서 두 사령관들로부터

 

 서부전선의 상황, 후퇴해서 방어전으로 펼치고

 

 영,미연합군과 협상해야한다 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이때 히틀러는

 

"어떤 회피도 조정도 없다.

단지 그자리에서 사수하거나 죽는것 뿐이다"

 

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V1에 목을 매달기 시작합니다.

 

 


그후 롬멜은 소극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다가

 

 7월17일 연합군 공습을 받아

 

부상을 입고 재기불능됩니다.


룬트슈테트는 이제 전쟁은 이길수 없다고 체념하고

 

 꼭두각시인 카이텔에게 전화가 오면 허구헌날

 

 수화기를 붙잡고 싸움질만 했다고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를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가지 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1.독일군의 멍청한 지휘 시스템


뭐 독일군이 엄청 강하니 그러는데

 

전투에서 이기지만 전쟁에서 지는게 문제였죠.


히틀러는 장군들을 믿지 못해서 자기가

 

 직접 총사령관에 재직함으로 병력이동

 

무장친위대 지휘 까지 혼자했는데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두곳에서 혼자 그걸

 

 다해낸다는건 불가능했습니다.

 

거기다 전선시찰도 안하고 자기보다

 

 훨씬 능력있는 장군들 말도 다 무시해버렸습니다.


 

2.제공권을 장악하면 편하다


연합군의 막강한 제공권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격작전을 펼치려는 독일군을 무력화시키거나

 

진격속도를 매우 늦추어 버리고 서부전구 기갑군단의

 

기능을 2주 넘게 마비시켜버리는 결과까지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후방교란과 포병부대의 제거까지


이는 지금까지도 내려오게됩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연합군의 육해공군 장병여러분.

 

여러분은 바야흐로

 

 위대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고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던지 그들의 희망과 기도는

 

여러분과 함께 진군할 것입니다.

 

우리의 용맹한 연합군과 여러분의 전우들은

 

독일의 전쟁기계를

 

무너뜨려야하고 나치의 압제와

 

폭정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켜내야합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결코 쉽지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적은 잘 훈련되어있고,

 

잘 무장되어있으며,

 

전투경험으로 단련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치열하게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세는바뀌었습니다.

 

세계의 자유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승리를 향해 행진하고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용기,임무에

 

대한 헌신성, 그리고 전투역량에 무한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하고 고귀한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전지전능한

 

신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연합군최고사령부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전에-

 

 

마지막으로 노르망디에 과거와 현재사진으로

 

마무리할게요!

 

 

 

 

 

 

 

 

 

 

 

2차대전을 패배로만든 히틀러실수

http://kimssine51.tistory.com/101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http://kimssine51.tistory.com/80

 

사진및참고자료출처: 나무위키.위키백과.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