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우리나라는 국토가 두개로 나누어져 적대적인 두개의

 

정부가 존재하고 있고...

 

같은민족인 그 둘이 모든것을 걸고 서로를 말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것이 불과 수십년전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바로 그 한개의 정부이고

 

다른하나는 북한이죠...

 

 

 

대한민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기위해 무력으로

 

밀고내려왔었던 북한이 아직 건재하고 있는한

 

제2의한국전쟁,제2의 6.25전쟁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 현재까지 수많은 도발을 하고 위협을하고

 

전쟁을 운운하고 있는게 바로 북한입니다.

 

모두가 알듯이 6.25전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질뻔한 전쟁이었죠..

 

3년동안 지속되었던 전쟁에서 그 어느것하나 중요하지않은

 

사건이나 예사롭지않은 전투가 없었겠지만

 

비교적 잘 알려지지않은 글허지만 전쟁의 향방에

 

큰 영향을 준 전투를 알아보면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번글을 써볼게요

 

이번에 쓸 한국전쟁 전투는

 

마산지구전투. 다른말로는 마산방어전이라고 불려요.

 

전쟁 시작부터 낙동강 방어전까지의 북괴군 루트

 

38선 기준으로 맨 좌측에서

 

국군 1사단을 깨고 파주시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부대가 보이시나요

 

바로 북한군 제 6사단 입니다.

(네모 위에 XX 쳐진게 사단이라는 뜻이고 네모 왼쪽의 숫자가 사단 소속)

 

방호산 6사단장

 

팔로군 출신에 조선인들로 만들어진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훗날 북한군 6사단)의 사단장이자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다수의

 

 전투경험이 있던 엘리트 부대였습니다.

 

(역시 조선족은...적인듯하네요)

 

 

 

북한 6사단장인 방호산은 북한에서도 손꼽히는

 

한국전쟁의 적극적인 찬성을 했었고

 

6.25전쟁당시 나이는 30대중후반으로

 

젊은 엘리트 지휘관이었습니다.

 

중국 만주사변이후에 흑룡강성 백산에서

 

공산당항일유격대에 참가한적도 있었고

 

1936년 소련 모스크바에 유학,동방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940년에 연안으로 들어와서

 

간부훈련반,중국중앙해외사업위등에서

 

교육을 받았다고하니 그 당시 남북을

 

통틀어서도 솝꼽히는 엘리트였다고합니다.

 

방호산의 이러한 경력은 당연하게도

 

김일성으로부터 감시와 질투의 대상이였고

 

당시는 전쟁으로 남한을 삼키려고 북한군이

 

급속도로 증강되던 시기였기 떄문에 김일성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고합니다.

 

김일성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팔로군을

 

이끌던 방호산은

 

북한정권 수립이후에 북한으로 들어와

 

그대로 북한군 제 6사단이 됩니다.

 

당시 서부전선 주공은 북한 1사단인데

 

북한 6사단은 조용히 시작하다가

 

그러다 어느새 튀어나옵니다.

 

6월 27일

 

한강을 도하한 첫 북한군입니다.

 

 

 

한강하구는 조류가 쌔서 도하하기 어려운 곳인데

 

저런 쪽배를 타고 도하해서 점령합니다.

 

저런 쪽배가 건널때까지

 

저지할 국군 병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김포반도를 점령해버리고

 

단숨에 충청도 천안시를 점령하며

 

충청도를 점령해버리고 맙니다.

 

그 다음부터가 정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시기입니다.

 

북한군들이 그다음으로 진출한 곳이

 

전라도입니다.

 

 

사진을 봐도 모든 북한군은

 

 포항-대구 쪽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당연히 유엔군 입장에서도 거의 모든 부대를

 

대구-포항 라인에 집중 시켰고

 

그러다 보니

 

북한군 6사단은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광주 목포 순천 등등 전라도를

 

 차근차근 점령을 합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진주시였습니다.

 

진주는 옛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 거점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상당히 큰 도시중 하나였고

 

고려시대때도 왜적을 막는 중요 요충지였습니다.

 

임진왜란때 김시민 장군의 진주혈전은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좀더 자유로이

 

활동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던

 

그만큼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유엔군은 당장 눈앞의 적 때문에

 

북한군6사단 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천을 먹고

 

 

6사단은 모터싸이클 부대까지

증원 받으며 신나게 기동했다

 

진주를 점령하게 됩니다.

 

 

8군사령관 워커 트루먼

 

진주를 점령했단 소리에

 

유엔군사령부는 강력한 뒷통수를 맞았죠

 

정말 큰일이 난겁니다.


 

위 지도는 마산 방어전 이후 상황도여서 그렇지

 

6사단이 진주까지 진출할때까지

 

방어선 서쪽에는 그 어떤 병력도

 

없었습니다.. 조금도..

 

미 8군사령관 워커는 급하게

 

 

상주에 있었던 미 25사단을 긴급이동 시키게됩니다.

 

 

진주에서 마산까지는 40km 마산이 넘어가면

 

 코앞이 부산이라 무조건 막아야했습니다.

 

 

미군25사단

 

25사단은 상주에서 마산까지 130km 거리를

 

 하루만에 도착하게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알수 있겠죠..


 

 

미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마산 방어를 맡은 25사단장  킨소장은

 

 

 Task Force "Kean" 이라는

 

특수임무부대를 만들게됩니다.

 

 

 

초반부터 북한군 6사단은 진동리

 

일대를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많은 사상자 나오는 접전이 되었습니다.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

 

-북한6사단 방호산 소장-

 

 

 

그야 말로 혈전이었고

 

이걸 빼앗으면 부산이 코앞이고

 

이걸 뺐기면 부산이 위험해진다

 

서로에게 중요했고 그래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습니다.

 

국군 부대도 이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 부대가 바로

 

 

 

김성은 장군이 이끌었던

 

한국 해병대였습니다.

 

 

이들은 진동리 일대에 진출하던

 

북괴군을 만나 109명을 죽이고

 

6명만 전사하는 전과를 올리게됩니다.

 

 

 

이어서 야반산(342고지)이라는 곳을 공격해서

 

북한군을 몰아냈고

 

마산과 진동리를 이어주는 도로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 전투로 북한군6사단은 마산으로

 

 진출이 실패하게 되고

 

유엔군이 반격할 기회를 만들어 주게 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김성은 부대는

 

 전장병 1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을 받게됩니다.

 

북한군은 포기하지 않고 비정규전 그러니깐

 

빨치산의 토대가 된 게릴라 부대까지 운용했습니다.

 

 

피난민인척 검문검색을 통과한후

 

몸속에서 총을 꺼내 유엔군을 죽이고 빠지고

 

국군 전투복을 입고 아군인척 다가와 쏘고 빠지고

 

미군들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였습니다.

 

같은 동양인이라 군복으로 피아 구별했는데

 

위장을 하고오니 피아식별이 안됬던거죠


 

 

 

거기다가 레이디퍼스트를 외치던 미군들에게

 

 아녀자인척 다가와 총 칼로 쏘고 찌르고 도망치고

 

정말 모든 방법을 다 썼습니다.

 

하지만 유엔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킨 특임대

 

먼저 킨 특임대는

 

제 1해병여단 예하 89전차대대와

 

25사 5연대 전차중대 해병 1전차대대의

 

전차전력들을 끌어모아

 

1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킨 특임대 소속 전차 대원

 

북한군 6사단은 전차25대가 고작이었습니다.

 

 

 

8월 6일 25사단은 전차들을

 

 앞세워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44도의 무더운 날씨 속에

 

열사병 환자들도 속출 했지만

 

미25사단과 김성은부대는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일동안의 혈전끝에 봉암리를 점령하고

 

진주가 코 앞인 진주고개까지

 

 진출하게 됐습니다.

 

이대로 가면 진주 탈환도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킨 특임대에

 

후퇴 명령이 떨어지게됩니다.

 

대구-포항 방어선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죠

 

북한군 4사단이 영산을 공격하고 

 

 

 

성주에 있던 3사단이 낙동강을 건너고 있었고

 

포항 방어를 하던 국군 제 3사단이 포위 되는 등

 

유엔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마땅한 예비군이 없던

 

유엔군은 25사를 마산으로 빼고

 

긴급하게 배속되었던 예하 부대들은

 

 대구 방어선으로 배속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 마산 전투로

 

북한군 6사단의 마산 진출은 좌절 됬고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국전쟁 역전의 시작 인천상륙작전

http://kimssine51.tistory.com/80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때까지

 

북한군 6사단은 아무것도 못했고

 

25사단의 맹공에 부대가 해체 되버립니다.

 

퇴로가 끊어지자 방호산 6사단장은

 

점령지를 통해 분산된 북한군을 모아

 

그 해 11월에 북으로 돌아갑니다.

 

함께 하지 못한 북한군들은

 

 지리산에 숨어들어 빨치산이 됬었고

 

6월부터 인천상륙작전인 9월까지

 

짧은 3개월동안

 

북한군 6사단은 한국전쟁사에

 

큰 획을 그어버렸습니다.

 

그들의 김포반도 점령과

 

빠른 호남지방 평정은

 

유엔군으로 하여금 심각한 위기감을 심어줬고

 

2개 사단만 준다면 이 전쟁을 끝내겠다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북한군을 우습게 본

 

 미군지휘부의 뒷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어줬죠.

 

(원래 유럽으로 파견시키려했던 미3사단까지

 방어선에 투입할 정도로 긴박했었다고합니다.)

 

어쩌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오히려 유엔군에게는 약이 된건지도 모르는거죠.

 

북한군6사단은 3개월 동안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었는데

 

바로

 

인민재판입니다.

 


 

가는 곳마다 인민재판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가장 잔인하고 악마같은 부대였습니다.

 

한편 도망친 방호산은 영웅칭호를

 

 받으며 인민영웅으로 추앙받습니다.

 

휴전 후에도 승승장구하며 북한 동화책에도

 

 나오고 여기저기 선전물이 막 나오게됩니다.

 

하지만 59년 김일성이

 

권력 다지기를 하면서 연안파 숙청때

 

방호산도 같이 숙청당해버립니다.

 

그렇게 한국전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부대는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우리 모두는

 

마산전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북한군 6사단이 광주, 목포를 점령하지 않고 

 

 바로 순천 -진주로 진격했다면

 

한국전쟁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꺼라 생각됩니다.

 

한국전쟁 나라를지킨 6사단청성부대

http://kimssine51.tistory.com/121

 

한국전쟁 중공군의 1차~7차공세

http://kimssine51.tistory.com/114

 

한국전쟁 가장 치열했던 용문산전투

http://kimssine51.tistory.com/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