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북한 주민들은 살기위해 목숨을 걸고

 

많은 탈북을 지금 현재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을 놀라게했었던

 

화제의 탈북자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요

 

 

공군 조종사 이웅평 대위

 

 

그는 어느날 북한 원산의 군관휴양소 근처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떠밀려 나타난

 

이상한 비닐 봉지를 줍게 됐습니다.

 

 그것은 삼양라면 봉지였습니다.

 

당시 그는 라면이 무엇인지 몰랐고,

 

국수라고 생각(삼양라'면'이니까)하면서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는데 봉지에 적혀 있던 글귀는

 

이웅평 상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판매나 유통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읽고 그는

 

 "남조선은 이런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소비자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구나. 그렇다면 인민의

 

지상천국이라던 우리 공화국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983년 2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북한에서는 준전시상태에 해당하는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훈련을 위해 오전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MiG-19 편대 중

 

 그의 전투기는 편대를 이탈하여 자유를 갈구하며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추격하는 북한기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습니다.

MiG-19기는 곧 해주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입했습니다.

 

 이에 초계비행 중이던 한국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이에 MiG-19기는 날개를

 

흔들어 귀순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F-5가 미그기를 유도해

 

제10전투비행단(수원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켰습니다

 

 
공산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에 따라서

 

 MiG-19기로 무려 15억 6천만 원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현재가치로 대략 70억원 수준입니다

 

한국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5월 4일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김만철 일가 탈북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김만철은

 

 청진항에서 50t급 청진호를 몰래 탈취한뒤

 

 일가족 11명을 태우고 동해 한복판까지

 

 도주했습니다.

 

이후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일본의

 

야마모토 근처에서 표류하다가 1월 20일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일본에서는 통역으로 하필이면

 

조총련계 동포인 '마쓰야마'를 보냈습니다.

 

다음날인 1월 21일 일본 해상보안청은 김만철씨 일가가

 

 승선한 청진호를 쓰루가항으로 예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이때 마쓰야마는 한국 망명은

 

위험하다고 위협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와의 협상끝에

 

 단기체류 형식으로 김만철 일가족이

 

 중화민국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김만철과 그 가족들을

 

중화민국으로 추방했습니다.

 

2월 7일 새벽에 김만철 일가족은 오키나와를

 

거쳐 중화민국에 도착했고 다음날 오후

 

 대한민국 정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작전을 통해 김만철과 그 일가족들을

 

 김포공항에 데려오는데 성공했습니다

 

 

북한군 이모씨 노크귀순사건

 

 

2012년 9월 28일 노크 귀순을 한

 

조선인민군 병사는 저녁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음식물을 훔치다 상관에게

 

 적발돼 싸우고 귀순을 계획하였습니다.

 

2012년 9월 29일 토요일 새벽 4시경 인민군 병사는

 

 경계근무 중 강원도 고성군 운전리 소재

 

부대를 이탈하여 50여㎞를 남하하는 과정에

 

 고성항 인근 야산에서 이틀간 은신하였습니다.

 

은거 후 10월 1일 21시경에 고성항에서 출발해

 

금강산 관광도로와 철길을 따라 이동하여

 

 10월 2일 화요일 07시경 능호에 도착,

 

 휴식 후 16시경 재출발했습니다.

 

 

 

10월 2일 화요일 DMZ 내 북한군 2중 철책에

 

 도착하여 일반 철조망은 월책하고

 

 전기 철조망은 나무판을 대고 간격을

 

벌려 통과하였습니다.

 

 10월 2일 화요일 22시 30분경 대한민국

 

GOP 철책에 도착하였으나 경계등 불빛이

 

 너무 환해 동쪽으로 200m 가량 이동하여

 

23시경에 월책하였습니다.

 

월책 후 후방도로를 따라 약 110m를 이동하여

 

인접 초소로 찾아갔으나 근무를 서지 않는

 

빈 초소여서 다시 200m를 걸어가 동해선

 

 경비대의 현관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어

 

 맞은편 1초소 막사로 이동해 유리문을

 

 두드려 귀순 의사를 표시하였고 소대장

 

우리 장병이 23시 19분경 신병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군은 1군사령부, 합참에 23시 32분

 

최초 귀순자 발생상황을 유선 보고하였고

 

 23시 35분 정승조 합참의장 공관서

 

 귀순자 발생 보고를 받게되었습니다.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망명사건

 

 

1996년 5월 10일 로동신문은 당 내에 수령

 

 받드는 척하며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가

 

 있다는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이는 숙청을 암시하는 기사였습니다.

 

다시 7월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사상비판을 가했습니다

 

이미 황장엽은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 기반 장악을 위한 타겟이 된 상태였습니다.

 

황장엽은 1997년 1월 30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나리타 공항을 통해 방일하여 조총련

 

극진한 환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습니다.


 

 

그는 수행원 김덕홍과 함께 2월 12일 바로

 

 중국의 북한 대사관으로 갔고 다시 한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전격적으로

 

망명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이 선물 사러 외출한 황장엽을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2월 18일에 그 주장을 접었습니다

 

 황장엽이 망명한 순간은 중국 등소평의 사망,

 

한보사태, 이한영 피살이 겹친 대혼란의

 

와중이었습니다.

 

이후 미국,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이 모두 개입된

 

 치열한 외교전 끝에 67일만인 4월 20일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영국 북한대사관 공사

태영호 망명사건

 

북한의 외교관이던 인물입니다.

 

주영 북한 공사로 근무 중,

 

2016년 8월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습니다.

귀순 전까지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로

 

 현학봉 대사에 이어 주영 북한대사관에서

 

 서열 2위였습니다.

 

 1996년 탈북한 잠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

 

서기관이었던  현성일과 함께

 

북한 외무성에서 손꼽히는

 

유럽 전문가입니다.

 

 

또, 태영호의 부인 오혜선이 빨치산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돌기도 했으나,

 

국정원에서 직접 빨치산 가문 맞다고 했으며,

 

2남 1녀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두 아들만 두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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