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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0년 추운 겨울..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반격을 개시하였고 눈부신 속도로 진격하여 평양을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강계로 수도를 옮겨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였지만 사실상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상황이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 30만명이 기습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크게 뒤바뀌었고 유재흥의 부대전멸까지 겹치게되면서 UN군은 전면적인 후퇴를 할수밖에 없었습니다.(1.4후퇴) 함경도 지역의 국군과 UN군은 함흥부근의 흥남부두에 모여 해군의 도움으로 철수를 하는것으로 결정하지만 중공군은 이를 포착하고 흥남부두를 포위하게 됩니다.

 

 

미 공군의 근접폭격과 해군 전함들의 결사적인 화력지원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되어 중공군은 끝없는 인해전술로 도시 주변을 포위하고만 있었고 부두에 집결한 국군과 UN군 10만명을 서둘러 철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가지에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군을 따라온 수만명의 피난민이 부두에 발이 묶여버린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공산당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사람들로 다시 공산당 치하로 들어갈경우 반역으로 대부분 처형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미 10군단의 한국인 고문이자 군의관이었던 현봉학은 군단장을 설득하였고 군단장은 해군 함정 13척을 동원하여 9만명에 가까운 피난민을 수송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철수가 끝난 뒤 마지막으로 부두앞에 정원 47명의 미국 국적의 유조선 메레디스호가 남게됩니다. 선장이었던 레너스 라루는 현봉학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모든 화물을 버리고 부두로 다가가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원 47명의 유조선에 피난민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주며 올라타기 시작하였고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자신의 짐을 바다로 던지고 다른사람의 손을 잡아 올려주었습니다. 정원 47명의 화물선에 올라탄 피난민의 수는 14,000여명이였고 메레디스 호의 탈출 직후 미군은 흥남부두를 폭파시켰습니다.

 

 

영하 30도의 한겨울에 정원을 3백배가 넘게 초과한 혹독한 상황에서 거제도까지의 3일간의 항해에도 단 한사람도 희생가자가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5명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3일간의 항해끝에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메레디스호는 거제도에 도착하였고 모든 피난민을 안전하게 내려주고 다시 항해를 떠났습니다.

 

 

메레디스호는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해낸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당시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는 1960년에 그떄를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10년전 지구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기적이었따. 사흘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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