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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은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하면서 발발했으며 1945년 5월 8일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결과 독일은 패망하게 되었고 동유럽 국가들은 공화하가 되었으며 소련과 미국이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몇몇 전문가들은 이 전쟁의 여파는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히틀러는 그 당시 꼭 소련을 침공해야만 했을까요...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소개합니다.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략을 개시해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의 이유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게르만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대-블셰비즘을 제거하고 최종적인 '천년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의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습니다. 집권 후에는 이것이 국가 정책이 되었으며 위협을 느낀 소련의 스탈린은 유대인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직속 부하인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으로 앉혀 독일에게 친화적인 제스처를 보냈습니다.

 

 

한편으로 히틀러도 침략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개입하면 침략전쟁이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1939년 8월 소련에게 전보를 보내 불가침 조약을 타진하였고 폴란드 침공 직전에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과 경제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들에 의해 소련은 폴라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루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소련 반대편에는 동맹국 일본이 있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히틀러는 수십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이상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두고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틀러가 가장 부담스러워 했던 것은 미국의 참전 여부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국내의 고립주의자들의 반대때문에 직접 참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영국 지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했고 루즈벨트의 민주주의 병기창 정책으로 연합국에 엄청난 물자 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빠른 미래에 이루어질지도 모를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은 독일에 매우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미국이 변심해 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까지 소련이라는 눈 앞에 놓인 시한폭튼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세계가 놀랐던 이유는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떤 두 나라가 손을 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간에 믿을 만한 국가는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독일은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두지 못한다면 영국과 미국의 공격을 막느라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식량과 석유라는 엄청난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기때문에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습니다.

 

 

엄청난 육군력을 자랑했던 독일은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부대를 이용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한달이라는 단시일안에 정복했듯이 엄청난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공격을 한다면 소련은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안을 내놨으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하기만 하면 공산통치에 염증을 느낌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체제는 공격 즉시 붕괴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은 처음에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준 군대라고 환영했었습니다.

 

 

히틀러는 소련을 매우 과소평하고 있었고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버렸는데 독일의 3국 동맹이 있었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였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해도 무방했습니다.

 

 

하지만 이 선전포고는 일본이 중국을 그만 공격하고 소련으로 발을 돌리라는 의미도 섞여있었지만 일본은 물량이 전쟁터에 승패를 결정짓는 전쟁에서 세계 1위와 2위의 공업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멍청한 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전쟁터에서 물량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