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벌써 14년이란 시간이 지난 정말

 

 안타까운 사건 연평해전에대해

 

포스팅하려고합니다.

 

2002년에 일어난 사건이

 

2008년이 되어서야

 

서해교전에서  연평해전이라 명칭으로

 

개칭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도 못했던 사건이였어요..

 

나라를 지킨 영웅들에 대해

 

알아보는 글을 쓰려고합니다!

 

 

제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북한경비정 4척이 어선20척과

 

 함께 NLL 2km 해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에 해군고속정초계함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하고

 

북쪽으로 밀어내기위해 선체를 직접 부딪혀서

 

 밀어내는 방식으로 북한함을 NLL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전수칙의 해군은 선체밀어내기

 전법으로 대응하는모습>

 

이 과정에서 선체를 부딪힌 북한함정이

 

 25mm 기관포로 사격을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어요.

 

당시 참수리 325호의

 

정장인 안지영소령 및 승무원

 

 일부가 부상을 입었지만 초계함과 함께

 

북한 어뢰정 한척과 중형경비정 한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지휘관 : 해군작전사령관 중장 서영길

2함대사령관 소장 박정성

고속정 편대장 소령 정순용

참수리 325 정장 대위 안지영

전력 : 포항급 초계함

참수리급 고속정

피해규모 : 참수리급 고속정 2척파손

7명부상

 

북한군

 

북한군 지휘관 : 불명

전력 : 청진급 경비정

신흥급경비정

상하이-2급경비정

등산곶경비정

대청급경비정

피해규모:1척침몰5척파손

20명 전사(추정)

30명 부상(추정)

 

 

 

 

당시 승리에는 장비의 질이 차이가

 

 크게 작용했었죠

 

모든무기가 수동식이였던 북한군

 

우리 해군의 배를 명중시키기가 어렸웠고

 

우리 해군의 장비는 자동화되어 북한군의 배를

 

자동주준하여 맞출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해군의 대승!

 

그러나...

 

북한의 계획된 도발 2차 연평해전

 

북한은 그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3년동안 만반의 준비를하고

 

계획적으로 도발을 준비하였습니다.

 

<영화 연평해전中 축구응원장면>

 

2002년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4강전 경기가 있었던 당일.

 

 

 

북한군의 경비정 두척이 NLL을

 

또 다시 침범하게됩니다.

 

1차 연평해전의 패배의 원인을

 

알고있었던 북한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해군의 배를 이길수없다고 판단!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합니다.

 

화력이 부족한 경비정에 탱크포를

 

달아서 화력을 보강하고

 

떨어지는 명중률을 보안하기위해 우리해군

 

배를 가까운곳으로 유인하게됩니다.

 

<북한군은 배에 전차1포탑을 장착할정도로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 해군의 교전수칙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있었어요.

 

<영화 연평해전 中>

 

먼저 발포하지 않을것을 알았던거죠..

 

다가오며 시위 기동을 하고있던

 

참수리 357호를 조준하기 시작했습니다.

 

 

 

NLL을 침범한 북한의 등산곶 684호에게

 

경고방송을 하며 시위기동을 하던 우리해군의

 

참수리357호는 가까운곳에서 기회를

 

 노리던 등산곶 684호에게 선재공격을 당하고맙니다.

 

 

북한함정의 이상징후를 눈치 챘지만

 

 교전수칙때문에 선재공격을 할 수가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의 85mm 전차포의 기습으로

 

윤영하 대위(당시계급)가

 

그 자리에서 전사하게 되었고,

 

기습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하고

 

동력이 나가버린 참수리호에서도

 

어떻게든 전투를 하려던 와중

 

21포와 22포의 황도현 중사와 조천형 중사가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관실내연사로 북한군의 공격에

 

 직접 기관총을 들어 응전했던 서후원 하사도

 

북한군의 공격에 가슴이 뚫려 전사하게 됩니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상병도

 

부상당한 전후들을 위해 여기저기서 분투하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게 됩니다.

 

 

분투(奮鬪)그리고 승리

 

부장이었던 이희완중위는 다리가

 

 잘려나간 와중에도 함정을 지휘했습니다.

 

어떤 병사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와중에도

 

 총으로 응사를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부상을 당한 다른 병사들도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영화 연평해전中 한상국하사>

 

결국 북한의 함정에 큰 피해를

 

 입히며 북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수리 357호도 피해가

 

심각하여 결국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최초보고로는 4명 전사,

 

19명 부상, 1명 실종, 4명 무사고 였습니다.

 

이후 실종되었던 한상국 하사가

 

 발견되었고, 전사처리 되었습니다.

 

한상국 하사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때

 

침몰한 배에서도 끝까지 조타기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상국 하사가 전사한 장소>


박동혁 상병은 온몸에 100여개

 

이상의 파편이 박혀있었고

 

 이 파편들의 무게를 합치면 3kg이

 

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박동혁 상병도 병원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대한민국

 

지휘관 : 정장 해군 대위 윤영하

부정장 해군 중위 이희완

병력: 초계함 2대

고속정 6대

피해규모: 참수리 고속정 357호 침몰

6명 전사

19명 부상

 

 

북한군

 

지휘관 : 대위 김영식

병력 : 경비정 2대

피해규모 : 등산곶 684호 파괴

13명 전사

25명 부상

 

 

연평해전의 전사자들

 

최후에 병상에서 숨을 거둔 박동혁 상병을 끝으로

 

정장 윤영하 소령(추서계급), 조타장 한상국 중사,

 

황도현 중사, 조천형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전사자는 총 6명이 되었습니다

 

 

 

정권에게 외면을 받은 전사자들과 유가족

많은분들이 알고있다시피

 

영결식에 당시 대통령이

 

참가하진 않았습니다.

 

 

당시 월드컵 폐막식과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문제없이 안전하다는 제스쳐라는 것과

 

정상회담간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는

 

 행동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후에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건을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식으로 무마하려는 태도,

 

 북한감싸기 등등

 

충분히 비난받을 행동을 사서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사자들의

 

유가족에게 가정먼저 유일하게 위문편지를 보냈던 사람은

 

한국의 정치인도, 군관계자도 아닌 주한미군 사령관이었죠.

 

 

 

교전 후 한달이 지나도록 한국인이 보낸

 

 위문편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SBS에서 다룬후 그제서야

 

정치인들의 위문편지들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대통령과 총리, 국방장관등 각료진등이 영결식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은 추모식에 단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유가족에 대한 처우

 

 

전사자들을 순직자로 적용한 보상등으로

 

 유족들이 받은 평균 보상금은

 

3천만원대였다고 합니다.

 

 

국가의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에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결국 이민을 가게 됩니다

 

<당시 정부의 태도는 유가족을 두번 울리는 짓이었습니다.>

 

 

교전수칙의 변경

 

 참수리 357호가 피해를 입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교전수칙의 변경이 그 이후 이루어 지게  됩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되어 있던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단순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북한의 또다른 도발 대청해전

 

연평해전 7년후의 2009년 북한은 

 

또다시 NLL에서 도발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교전수칙이 바뀐 우리군은 피해없이 

 

북한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357호의 생존자들

 

 연평해전 전투에서 참전하여 살아남은

 

박경수 중사는 이후에도 계속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가족들의 반대에도

 

 함정근무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재배치된 근무지가 천안함이었고

 

결국은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존자인 이희완 소령은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으나,

 아직 군에 남아 교관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신형 유도탄 고속정

 

전사한 6명의 용사들은 해군의

 

신형 유도탄 고속정에 함명으로 명명되어

 

다시금 서해를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국을 지키다 희생된

 

그분들에게 지금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