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다부동전투 어느 학도병의편지-

 

 

6.25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하나

 

다부동 전투

 

 

이번에는 더이상 물러설곳이 없이 치열하게

 

싸웠던 28일간에 다부동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전쟁 중 8월 3일에서 29일까지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유학산)에서 대한민국 국군

 

조선이민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백선엽 등이

 

이끄는 국군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지켜냄으로써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한 뜻깊은 전투입니다.

 

다시 말해,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다부동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게요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유엔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월 5일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도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7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천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고 제 1군단은 남에서 북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마산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습니다.

 

 

 일명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직접 내려와 인민군 사단을 돌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인민군을 독촉했었습니다.

 


8월 3일 17:00에 인민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국군은 김점곤 중령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제6보병사단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인민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습니다.

 

 이날 22:00에 강정 나루터로 인민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인민군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8일 1:00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그 북쪽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이 돌파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00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습니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준장이 12일 사단은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본 전투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습니다.

 

 

 'Y'선이란 백선엽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습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 국군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했습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등 혈투를 벌였지만 12연대는

 

 유학산 탈취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백선엽은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인민군이 대구
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없는 격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사단 좌익에 인접한 미군 1기병사단에서는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고,

 

사단 우익 인접 국군 6사단은 4Km나 물러나

 

 대구의 운명은 촌각을 다투었습니다.

다부동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원수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습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려 버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인민군이 침

 

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습니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편 증원된 미군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18일에는 남하하는 T-34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21일에는 야간침투를 시도하는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기타 차량들을 모든 화포를

 

총동원한 끝에 격파하여 5시간만에 격퇴시켰습니다.

 

 

특히 미군의 화력지원이 강력했는데,

 

이 날 제8포병대대는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 되었습니다.

이날의 야간전투를 참전자들은 불덩어리들이

 

마치 볼링장을 연상시킨다 하여

 

 '볼링장 전투'로 불렀습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혼란스러워졌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치러졌습니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져댔다고합니다.


전투가 끝난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국군 전사자 2,300명,

 

북한군 전사자는 5,690명이었습니다.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영화 고지전중 한장면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국군의 피와 죽음

 

 희생으로 승리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의도를

 

좌절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하여야 했고

 

 이는 이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국군에게 있어서는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하게

 

 해준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한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에 따라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한미간 상호신뢰감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국군 내에서 도는 말에 따르면 낙동강 오리알

 

 이 전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관련 추천글링크▼

 

나라를지킨 제6사단 청성부대

 

한국전쟁 중공군의 1차~7차공세

 

한국전쟁 최악의 참단한패전 현리전투

 

즐겁게 보셨다면 ↓↓공감♡한번씩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